리뷰

인천시립무용단 제 75회 정기공연
‘나례’가 회복해야할 화자(話者)의 존재감
이지현_춤비평가

 휴일이었던 지난 5월 13일 경복궁 근정전에선 <세종 회례연> (국립국악원, 문화재청 주관/ 김석만 연출, 2012. 4. 27-28. 인천종합문예회관 소공연장)이 악사 240여명과 무용수 160여명에 의해 거행되었던 당시의 상황을 재연했다. 1433년 세종이 조선의 기틀을 ‘예악’을 정비한 것으로 마무리 짓고 중화주의적인 시각에서 탈피하여 제 나라 백성을 챙기는 완성된 국가로서의 대내외적인 선포로서 준비된 군주와 신하의 의례인 ‘회례연’을 재연한 행사였다. 문무와 무무의 일무(佾舞)로 연회의 장을 열고 몽금척, 오양선, 동동, 무고로 연회의 절정을 향해가는 다분히 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되는 궁중연회의 재연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회의 재연이 갖는 의미는 문헌기록에 근거하여 조선조의 궁중음악과 정재를 당시의 시연 장소인 근정전에서 재연하였다는 것과 그것이 지금의 관중들에게 공개되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과거의 춤을 춤이라는 좁은 의미의 형식: 복색과 소도구, 춤의 순서와 음악만으로 재연하는 것이 아니라 올챙이를 건져 제 있던 곳에서 옮기기 위해서는 두 손을 모아 주변의 물까지 다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담아 올리듯, 그 춤을 있게 한 맥락: 잉태의 배경이나 시연의 환경까지 재연하려는 시도들은 춤을 문화로 사고하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춤만을 달짝 건져내어, 물기를 탈탈 털어 무대에 올려놓으면 깔끔하게 그 춤의 순수한 형식적 골격을 드러내어 보기에는 적당하나 춤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하고 그 춤을 깊이 이해하여 공감하게 하는 보드라운 양수(羊水)를 없애버린 격이라 춤의 맛은 텁텁하고 껄끄럽게 된다.
 그간 우리의 전통춤들은 양수까지를 감상하는 것은 생각도 못할 정도로, 아니 그간 그것을 잊은 양 그저 춤만을 똑 떼어 무대에 올려놓는 것에만 급급할 상황이었다. 그러다 보니 춤은 잃어버린 맥락 속에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했을 그 춤이 왜 탄생했으며, 어떻게 추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잃어버리고 말게 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춤을 공연함에 있어 상황자체를 재연하려는 궁중악(樂)과 무(舞)에서의 시도는 건조해진 춤을 보다 윤택하게 하는 행위로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춤이 추어졌던 원형을 재현하고 그 의미를 보다 밀도 있게 느끼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볼 필요가 있다.

 재연적인 춤공연 외의 많은 전통 재창작공연에 흔히 내포된 과정은 전통 형식의 의미를 탐구하고 그것을 현대적 감각과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해내는 일이다. 심지어 이런 과정은 해방 후 근대한국예술에서는 중심 담론이었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런 상황에 힘입어 그간 우리 예술은 전통적 소재들을 길어 올리고, 그것을 현대감각에 맞도록 창작하는 일에 많은 소득을 얻었으며, 축적된 소득을 바탕으로 보다 현대적인 언어를 획득하기 위해, 현대적 관객의 호응을 얻기 위해 현재도 고군분투중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런 창작의 흐름을 전통형식을 고수하면서 재연에 방점을 두는 전통재창작 공연과는 달리 ‘전통에 기반을 둔 한국창작춤’내지 ‘원심성(contrifugal) 한국창작춤’으로 분류해서 쓰고 있다. 이미 발레와 현대춤을 배경으로 하는 안무가들 역시 소재 뿐 아니라 주제전개 방식이나 여러 미감에서 전통예술 형식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전통에 기반을 둔’이란 단서를 달아 한국전통춤 배경에 중심을 두고 한국현대춤을 지향하려는 욕구(원심성의 욕구)를 가지고 창작 공연을 할 경우를 지칭하기 위한 개념이며 또한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예술춤들을 지칭하는 넒은 의미의 한국현대춤(Korean Contemporary Dance)안에 세분화된 영역을 지칭하기 위해서 라고 할 수 있다.
 올 초 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이 된 손인영씨는 ‘전통에 기반을 둔 한국창작춤’을 추구하는 것으로 주목받아 온 안무가이다. 손인영씨는 그간 <위무>, <나례>, <삼일낮, 삼일밤> 등에서 한국의 굿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현대 한국의 현실에서 회복해야할 중요한 춤의 정신성을 전통춤에 내재된 제의성에서 찾고자 하는가 하면, <신데렐라 되기>와 같은 최근작에서는 언제 전통에 기반을 뒀던가 하는 식으로 전통과는 미련없이 결별하는 매몰참을 보여주는 것으로 창작의 형식 폭에 있어서 진폭이 큰 편에 속하는 안무가였다. 이런 형식 실험에 과감할 수 있는 경우는 주로 형식에 묶일 수 없는 강렬한 주제의식을 가질 때, 또 전통춤 배경 외에 현대춤 언어를 획득하고 있을 때 주로 나타난다. 표현하고 싶은 것이 정확하게 있고, 그것을 위해 다양한 형식들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어릴 때부터 전통춤 배경을 갖고 있다하더라도 새로 획득한 현대춤 언어들을 익숙하지는 않더라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시도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가진 안무가가 흔치 않기에 손인영씨의 그간의 활약은 주목을 끌만한 것이었다.
 

 

 

 


 ‘나우무용단’의 안무를 잠시 뒤로 미루고, 새롭게 인천시립무용단에 자리 잡으며 처음으로 택한 작품은 이미 나우무용단에서 공연을 했던 <나례>를 바꾸어 올린 <인천대나례>였다. 공연의 첫시작은 이 큰 굿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배경을 설명해 준다. 보편적인 현대사회의 문제는 점차 연평도 사건으로 이어지고 나라를 위해 꽃처럼 스러져간 젊은 군인들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 진다. 인천의 지역 사안에서 뿌리를 찾아 공연의 의의를 새기고자 한 시도는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영상의 무게감 있는 편집이 후반부로 갈수록 젊은 죽음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공유할 수 있게 만들어 과거의 나례와는 다른 느낌으로의 도입에 성공하였다. 이어진 닥종이 인형의 탈을 쓴 재담꾼이 큰 나례가 벌어짐을 알리는데 과거 공연에서 그것이 대사로 처리되었다면 이번엔 영사막에 말풍선으로 처리되어 보다 시각적 집중력을 높여 관객의 입장에서 쉽게 전개를 따라갈 수 있는 배려가 돋보였다. 프롤로그 후에 액운이 감도는 터를 정화하고 제의를 준비하기까지의 상황 역시 무용수들에게 검은 옷을 입혀 구체적 형상을 갖게 함으로써 정화되어야 할 것과 정화하는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한 대중적 이해를 도왔다. 1부는 시립무용단의 남자 무용수에 의해 처용신의 춤이 보다 강렬한 힘과 역동성을 얻음으로 해서 단단해 졌으며, 2부에서의 앵무새들의 춤, 초랭이 춤 등의 여성군무 역시 훈련된 단원들의 앙상블로 안정된 군무를 확보해 나가 작품은 전반적으로 안정감있게 진행되었다.
 

 

 

 


 과거의 <나례>가 의례를 중심으로 제의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이번 <인천대나례>는 축제와 놀이가 더욱 풍성해졌다. 이전 공연에서 이 놀이와 여흥의 부분은 여성스럽고 고운 선으로, 의상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함께 주면서 전개되었는데, 이번에는 인천시립무용단원들이 보여주는 노련하고 맛깔스러운 시장터 장면을 구성하여 보다 소박하고 텁텁하나 정스러운 이야기가 있는 춤판으로 꾸몄다. 걸쭉한 장터의 분위기를 단원들의 연기와 몸짓으로 해학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처녀와 총각의 사랑놀음은 수줍은 듯 빠지지 않고 놀이의 핵심을 이루었다. 길놀이, 북춤등이 신나게 이어졌으며, 시립단원들의 해학적 표현은 관객이 이완 속에서 함께 즐길 수 있는 여지를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새로운 단원들과 호흡을 맞춘지 넉달도 채 안되었으나 그간의 손인영 스타일의 맵시있게 여성적 곡선을 가볍게 만들어 나가는 군무와 그 짜임새가 그런대로 맛을 유지하였는가 하면, 이전에는 없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해학적인 표현들이 인천의 단원들을 만나 새롭게 힘을 얻었다. 이런 절충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생각되지만 개인무용단 시절의 춤을 고집하지 않고 현재의 무용단원들의 역량을 잘 흡수하고 발휘하도록 한 현명한 판단이었으며 이런 절충은 <나례>를 <인천대나례>로 만들어 인천시립무용단의 지속적인 레퍼토리가 될 수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지점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상황으로서는 예술감독은 임기제로 일정기간만 머무는 반면, 단원들은 정년보장이 되어 있다. 말하자면 예술감독이 중심이 되어 창작한 작품은 단명하지 말고, 단원들의 것으로 소화되어 무용단의 작품으로, 레퍼토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구조상, 재정상 마땅한 일이다. 말하자면 <인천대나례>는 이제 인천시립무용단의 작품으로 보다 성숙되어지는 길을 가며 발전해야 할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제 궁중춤이든 민속춤이든 그것이 처했던 맥락을 함께 선보일 수 있는 춤공연 형태는 춤공연의 새로운 양식을 창출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그 양식이 관객에게 춤을 문화로 받아들이게 하여 춤을 보다 풍성하고 쉽게 접근하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에 만족하지 말고 한 걸음 더 가는 욕심을 내었으면 한다. <세종 회례연> 재연행사에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시에도 400명 이상의 연행자를 동원했던 국가적 연희의 웅장함을 통해 왕권의 강건함과 이를 통한 자부심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재연행사를 넘어 현재의 관객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 배경에 숨어 있는 ‘스토리텔링’을 널리 알리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말하자면, 세종대왕은 이 행사를 위해 이전까지의 예악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새롭게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예악을 새롭게 창작하려 시도하였다. 그리고 완성된 형태의 회례악은 바로 그것을 위해 고민하고 선택했던 1433년 당시의 내용들이다.
 세종은 제례의 아악을 전거에 맞게 제정할 수 있었지만, 이전에 향악·당악을 사용하던 회례의 관습을 고려하여 아악을 사용하는 것을 조심하여 ‘아악 전용론’을 한발 물러섰다. 그래서 회례연의 전반부에서는 아악을, 후반부에서는 향악과 당악을 쓴다는 절충안을 선택하였다. 또 그 과정에서 세종은 문무·무무의 춤출 때에 나가고 물러가는 절차가 혹시 옛 제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기위해 회례악으로 선정된 일곱 가지 곡,수보록>·<근천정>·<하황은>·<성택>·<포구락.·,아박>·<무고>의 적부(適否)를 따지는 동시에, 태조와 태종의 악장인 <몽금척>과 <수명명>을 첨가해 선왕의 업적을 기리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이미 많은 관객이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보아 세종에 대해 친숙하게 느끼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세종회례연>이 담고 있는 이런 ‘스토리’는 보다 이 공연과 행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그 결과는 공연이, 공연을 통한 그 스토리가 관객의 삶으로 스며들어가 힘을 발휘하게 되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기에 중요하다.
 이런 사례를 <인천대나례>에 적용하여 보면 어떨까? 손인영 예술감독이 지향한 바대로 이 작품은 우리 전통의 뿌리인 ‘굿’에 탐착하고, 그것을 되살려 현대적 ‘축역의식’과 ‘구나의식’이 되길 원한다. 게다가 거기에 만백성이 즐기던 놀이와 축제까지 담아내려 풍성한 대중적 공연이 되고자 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이전의 나례의 구성을 크게 발전시키지 못해 장면이 나열식으로, 평면적으로 전개되는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제의와 축제, 무거움과 경쾌함, 성과 속의 흥미로운 양극적인 분합적 요소가 모두 갖추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 간의 화학작용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면은 독립된 장처럼 유기적 연결없이 분리되어 있으며, 각각의 춤들은 지루하게 형식적으로만 반복된다. 그렇게 장면이 섹션화되어 있는 문제는 작가나 안무가가 주제의식에 맞는 장면들은 수집해 놓았으나 그것을 한줄 로 꿸 관점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난다. 주제는 소재로 설명되고 표현되어 질수 있지만 소재의 나열이 저절로 주제가 되지는 않는 법이다. 수집된 소재적 장면들은 주제의식의 강건함 속에서 힘과 리듬을 갖추면서 꿰어져야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것을 주관하는 것은 작가이며 안무가이고 그 주관자는 자연스럽게 주제를 전달하는 ‘화자’가 되는 것이다. <인천대나례>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이 좋은 장면들을 이야기해주는 화자가 없다는 것이다. 화자는 작품에 등장하지 않는 ‘관점’이며 이 소재들을 생생한 이야기로 살아있게 만드는 어떤 ‘터치’로 드러난다.
 

 

 

 


 세종이 성군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우리는 회례연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가 그 과정에서 했을 나라와 백성을 위한 고뇌와 집중을 이 뒷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웅장한 연회와 더불어 우리는 그 옛 왕과 예인들의 삶의 한편을 나눈다. 그렇듯이 <인천대나례>에서도 죽음은 이름없는 다수의 죽음보다는 누군가의 죽음으로 다가와야 하며, 액운과 처용신 역시 대결과 승리의 섬세한 이야기가 춤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용이 어떤 기분으로 승천을 했는지, 그 승천이 사람들에겐 왜 환호와 축제를 하게 했는지, 그 백성은 스러져간 죽음을 겪고서도 어떻게 춤추고 노래 부를 수 있었는지가 어떤 이야기로 다가와 한다. 그래야 관객은 감동으로 그것을 소화한다.
 대중과 함께 하길 원하는 춤은 대중에게 매력적이어야 하며, 대중은 이제 구체적인 이야기에 자신을 공감시키길 원하며 그런 이야기가 있는 것에 끌린다. 그건 어찌 보면 공감의 A, B, C 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99%의 우리는 모두 지구에서의 삶이 녹록치 않다. 그런만큼 우리는 이 삶에 고뇌하고, 삶의 정체를 알기 원하거나, 탈출하기를 원한다. 그런 이야기를 춤으로 다뤄줄 때 대중은 춤으로, 춤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2012. 05.
사진제공_인천시립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