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현태 〈1919〉, 장현희 〈곡-선〉
대구, 두 안무가의 (춤)세부, 더 춤 쪽으로
권옥희_춤비평가

예술가의 삶이란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관객들의 마음속에 어떻게 기억되며, 그 기억이 어떤 춤 언어와 어떤 방식으로 만나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것인가, 아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인가, 고민한다.
 무용수와 안무가로 살아남는 것, 예술가라는 자부심보다 가난이 앞서고 때로는 모욕 받는 삶. 오직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도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잊어버리기 위해서만 살아남는 것.
 이렇듯 가난한 예술가의 삶은 감당하기 어려운 의지와 노력을 요구하지만, 그 삶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영리해야 하는가.
 지난해 12월 말 대구, 김현태의 〈1919〉와 장현희의 〈곡-선〉(공연날짜 순)이 무대에 올랐다.


김현태 〈1919〉 (12월 26일, 웃는얼굴아트센터)

앞서 25분여 길이의 감각적인 작품 〈민란〉으로 말을 걸어온 뒤, 골몰해야 할 다른 일이 있다는 듯 딴청을 부리더니 〈1919〉를 내놓았다. 모호한 의식을 춤적 상태로 끌어올리고 춤을 일으키고 세워야 할 춤적 실천의 측면에서도 바른 역사의식은 본질이다. 작품의 깊이 또한 거기에서 생긴다. 〈민란〉으로 촉발된 역사라는 강렬한 주제가 좀 더 철저한 방법에 따라 조직되고 정리되어 다시 무대에 오르길 기다렸다.




김현태 〈1919〉 ⓒ옥상훈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 무대에 올린 〈1919〉. 비통, 울분, 체념, 그날, 총 4장으로 구성된 작품은 그 주제와 형식이 선명하여, 설명할 말이 많지 않다.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영상, 정육면체의 큰 상자를 쌓아 올린 설치물, 흰색의상의 무용수들이 마음을 모으듯 한 명씩 등장, 설치물의 위와 아래에 올라앉거나 선다. 모두 모인 18명의 무용수들이 서로를 안으며 슬픔을 눌러다지는 ‘비통’의 장, 선명하나 춤은 다소 진부하다.
 푸른색 수의를 입은 남자(최재호)가 수의 상의를 머리에 뒤집어 쓴 채 춤을 춘다. 그는 윤동주이고 이상화인가 하면 이육사이기도 하다. 온 힘을 다해 추는 격렬한 고통이, 덜 익은 채로 읊조리는 독백 같아서 더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군무진이 허공에다가 팔로 휘두르며 그를 에워싼다. 남자가 설치물 위에 올라서 이들을 내려다본다. 고통을 견뎌내고 있다는, 자신의 고통을 저항의 어려움과 겹쳐놓으려는 힘겨운 시도, 결연한 눈빛으로 열정을 다해 추는 춤. (춤)재능에다 폭발적 감수성까지 가졌다.




  

김현태 〈1919〉 ⓒ옥상훈




 해체한 설치물을 서로 위협하듯, 밀면서 무대 위를 다닌다. 설치물의 모양은 같거나 비슷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라고 규정하는 말은 같지 않다. 정육면체 설치물 한 면에 칠해진 노랑, 녹색 붉은 파스텔 톤의 색. 저 흐리고 여린 꿈같은 색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힘없는 민초들이거나, 혹은 독립을 부르짖던 어느 곳에서 그들의 죽은 몸을 담고 썩어갈 관이거나, 모이면 견고한 바위처럼 단단한 덩어리가 되었다가 흩어지면 힘없이 스러지는, 힘의 물컹하거나 단단함이거나, 희망 없이 밀고 다니는 석탄 수레일까.
 밀고 다니는 설치물위에 번갈아 올라섰다 내려서는 이들. 강제된 노역으로 천천히 닳아 없어지는 불행한 낯빛의 민초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거나 아니면 희생자일까.
 첼로음악에 한국 춤을 얹었다. 독립운동에 사람의 구별이 있지 않은 것처럼, 남녀무용수의 무대 위치와 춤 언어를 달리 하지 않은 것, 인상적이다. 안무자의 의식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 과잉이 없는, 단단하면서도 조용하게 의지를 드러내는 춤이 이어진다. 독립 운동가들의 이름이 담긴 빛바랜 태극기 영상. 마지막 4장 ‘그날’에서 〈1919〉의 주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 둘, 겉옷을 벗어 흔들며 추는 춤은 이내 들불처럼 군무진의 춤으로 번진다.




김현태 〈1919〉 ⓒ옥상훈




 안무자(김현태)의 춤 형식과 구조가 단단해졌다. 역사의식에 대한 생각은 춤으로 다듬는 가운데 깊어지고, 안무는 그 생각과 함께 발전하면서 내적으로 단단해졌을 것이다.
 짐작컨대 어떤 형태든 독립안무가로 겪는 현실은 상상보다 더 큰 장애가 될 것이다. 허나 개인이든 국가든 장애를 넘지 않고 뛰어간 역사는 무효고, 그 장애를 말하지 않는 춤은 허위라고 생각한다. 말해야 할 것을 춤으로 결정짓고, 춤으로 말해야 할 것의 힘으로 안무가는 존재해야 한다. 안무가의 존재감은 그 때 일어나는 것이다.


장현희 〈곡-선〉 (12월 29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안무자는 안무노트에서 〈곡-선〉을 ‘현대춤으로 풀어낸 한국적 정서’, ‘한국전통 움직임을 소재로 풀어낸 컨템포러리 댄스’라고 밝힌다. 의미의 충돌이자 아이러니다.
 ‘곡哭’을 한국적 정서라고 하면 2부에서 춘 김현태의 솔로는 현대춤 감각을 획득한 춤이었으나, 1부 박진미의 춤은 ‘선線’으로 푼 컨템포러리 댄스라 하기엔 전통춤이 너무 날 것으로 얹혀 모호한 감이 있다(으나). 안무자는 이 모호함과 투명성이라는 양면을 지닌 형식이 의미의 충돌을 일으키기를 기다린 듯, 마치 현장검증 하듯 자신에게 들이대는 기대와 불안이라는 촉수를 지우고 잘라낸다.




장현희 〈곡-선〉




 춤은, 사선으로 나뉜 검정색 무대와 무용수의 실루엣만 보여주는 조명,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으며 추는 듀오. 뒤돌아 걷는 군무진의 무리를 가르며 등장하는 박진미의 솔로 등 군더더기 없는 배치에서 안무자(장현희) 특유의 감각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군무진의 춤을 뚫고 홀로 등장하는 박진미의 (전통)춤은 (현대)군무진의 춤(삶)과 엮여 있는 또 하나의 삶이다. 충돌하면서 점화하는 불꽃처럼 군무진의 웅성 북적거림이 박진미의 춤으로 옮겨 붙는다.
 회색의 통이 넓은 바지에 연미복 디자인의 오버사이즈 재킷을 입은 박진미의 솔로는 마치 전통춤사위의 불씨를 품어 안고 추는 듯, 느리고 단단하고 고요하다. 뒤돌아 무대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가다 잊고 채 못춘 춤이 있는 듯, 다시 시작하는 춤은 마치 춤(정신)을 연마하는 듯 극히 절제된 움직임이다.
 박진미의 정적인 춤과 칼날처럼 날카롭게 각을 맞춘 군무진의 춤은 고요함과 웅성거림에 대한 또 하나의 모순된 충돌이다. 겹쳐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1부 춤 전체에 대한 원론으로서의 맥(모호함과 투명성)을 세운다. 깨트리고 나아가는 것과 기다리며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것의 관계다. 숙제이기도.




장현희 〈곡-선〉




 2부, 바닥에 깔린 사각의 흰 조명, 가장자리를 따라 흰색 승무고깔을 쓴 두 무용수.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은 이는 무대 앞으로, 부풀린 흰색 망사치마에 검정색 재킷을 입은 이는 무대 막에 붙어 걷는다.
 치마를 입은 이가 무대 가운데서 춤을 춘다. 그런데 치마를 입은 이가 남자라는 것도, 그의 춤에서 성별이 읽히지 않는다는 것, 관객의 의식에 균열을 내는 이 매혹적인 춤(힘)이 작가의 의도를 넘어선다. 춤은 괴로움을, 깊은 슬픔을 깔고 춤으로 누리는 자유로움 속에서 일렁인다. 죽음인 듯, 사자使者 인 듯, 남자가 사각 무대의 가장자리에 서서 춤을 추는 김현태를 지켜보고 있다. 김현태가 자신을 지켜보는 남자 앞으로 다가와 춤을 춘다.
 김현태의 춤은 죽은 이와 춤추는 이가 뒤섞이는 인접성, 춤으로 부르는 곡哭, 환유다. 환유는 결여된 은유다. 춤의 결여와 세상의 결여가 김현태의 결여 속에 들어옴으로써 춤이 되는 것이다.
 고깔을 벗어 든다. 모든 내용을 소진한 듯, 김현태의 고요해진 정서. 훌륭한 춤이었다. 김현태가 춘 ‘선線’의 춤은 안으로 삼킨 ‘곡哭’이었다.
 장현희의 작품 〈곡-선〉은 오버사이즈 재킷 안의 전통춤사위로 ‘선線’을 온전하게 안아 든 낯선 방법이어서 중요하고, 위험한 조건을 만류하는 척 격려하는 조건이기에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장현희 〈곡-선〉




 공연 횟수와 무대장치의 규모 무용수들의 숫자 등 작품의 물질적인 면에 감동을 받는 관객은 이제 없다. 작품에 쏟은 시간이나 춤의 효과나 인상을 만들어내는 데 필요했던 노력의 양이 반드시 작품의 수준을 가르지만도 않는다. 가난한 안무가들이 작업하기에 나쁘지 않다. 창조의 영감과 예감으로 무장하고 오로지 자신의 작품이 진실로 찬사를 받을 만한,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인가에 대해 자성하고 집중하는 일이 중요할 뿐.
 도처에 사람이 있다. 어쩌면 춤작가에게 춤(삶)적 삶을 괴롭게 하는 현실 속의 저 불가해한 것들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춤을 선택한 이 작은 것의 공간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한 춤적 실천일지라도 앞서가다 보면, 세상살이는 물론 춤(삶)의 실제적 성장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것이 자명하다. (방법으로) 춤판에 있지만, 살지 않는다는 존재방식도 있고. 어떤 방식이로든 춤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작가에게 이보다 더 큰 야심은 없으리라.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대구, 부산 공연을 많이 보고 있다.​ ​ ​ ​ ​ ​ 

2020. 2.
사진제공_김현태, 옥상훈, 장현희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