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발레 프렐조카쥬 〈And then, One Thousand Years of Peace〉
원시와 현대의 극단적 조우가 뿜어내는 새로운 세기를 위한 씻김
이지현_춤비평가

〈And then, One Thousand Years of Peace (그리고, 천년의 평화)〉는 2010년 ‘프랑스-러시아의 해’를 기념해 프렐조카쥬가 볼쇼이 발레단원 11명과 자신의 발레 프렐조카쥬 10명과 함께 만든 작품으로 2010년 9월 모스크바에서 초연을 하였고 이번 31번째 MODAFE의 폐막작으로 공연되었다. 안무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은 요한 계시록(Apocalypse of John)에 바탕을 두고 인류의 종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보여주고자 안무되었다. 재앙과 심판, 사탄의 패배와 파멸이 강하게 부각되는 묵시록의 이미지에 대해 프렐조카주는 종말보다는 인간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평화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을 환기시킨다. 그에게 춤은 “육체의 기억 속에 인식된 (종말의) 분자들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사진 현상액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 바로 그 육체로부터 종말과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를 끌어내려고 시도한다. 그에게 육체와 그것의 춤은 종말이자 평화가 새겨진 곳이다.
 조명은 대부분 어둡게 조도를 유지하는 속에서 남녀의 몸들은 오히려 강하게 부각된다. 어떤 경우는 검은 바탕의 어두운 색의 의상속에서도 무용수들의 팔 다리, 그 살덩어리들은 강하게 ‘육체’로 드러난다. 그의 이런 의도 때문인지 발레 프렐조카주의 댄서들은 그다지 보기에 매끈한 몸으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몸은 짧고 굵으며, 그래서 강하고 튼튼한 노예의 몸처럼 보인다. 점멸을 반복하는 조명 속에서 몸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파편적으로 보이는 몸들은 원시적 살냄새를 뿜는다. DJ출신의 음악가 Laurent Garnier의 테크노 음악과 하우스 음악이 주는 강한 비트를 동반하거나 몽환적이고 초월적인 분위기의 음악은 춤이 벌어지는 공간에 이미지를 더한다. 거친 육체와 그 육체들의 힘찬 동작들이 전자음악속에서 에너지를 뽑아낼 때면 그곳은 지옥이기도 하고 천상이 되기도 하는 이중적 알레고리의 뫼비우스 띠가 되어간다. 

 




 프렐조카주는 특히 여러 도구의 도움을 받아 묵시록을 풀어나가는데, 나중에 각 나라의 국기로 드러나는 원색의 스카프들을 머리에 터번처럼 두르거나 허리에 둘러 마치 아프리카에서 주로 쓰는 원색적 색감처럼 사용하여 그것을 걸친 몸들은 인간의 육욕을 드러내는 검은 색의 육체로 강하고 단단하게 보여진다. 서서히 등장한 무용수들은 마치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것처럼 집단적 포즈를 완성하고 잠시 멈춘 뒤 다시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또 다른 집단 조형을 만든다. 그러나 관객은 그것이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야 그것이 역겨운 집단섹스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들은 서로 엉킨 체위와 다양한 성애의 자세로 그룹 섹스를 보여주나 그 행위에서 속도와 힘은 빠져 있기에 그것은 섹스의 분위기를 연상시키지 않고 자세가 주는 연상으로부터 빠져 나와 섹스를 바라보게 하는, 그것이 무대 가득 채워져 더욱 중첩되어 갈 때 면 그들의 음행은 단지 육체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현세를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담합과 결탁, 나눠먹기 위해 자행되는 더러운 교류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확실해 진다. 그래서 이 장면에서 프렐조카주는 단순한 정지의 컷에서 힘과 속도를 뺀 것만으로 인간을, 현세를 다룬 가장 탁월한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묵시록의 2부는 4장부터 22장까지 엄격한 묵시록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최후의 심판’, ‘아마겟돈’, ‘사탄의 패배’, ‘새하늘 새땅에 대한 환상’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런 흐름을 따라 그려지고 있는데, 사슬이 천정으로부터 무게감을 온전히 자극적인 소리가 바꾸어 가며 떨어지는 장면 역시 응징과 패배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실현한다. 한줄로 된 사슬이 무대 천정으로부터 비오듯이 떨어지면 종말의 공포는 그대로 귓속에서 살아난다. 무용수들과 쇠사슬이 만들어 내는 육체와 벌, 하늘과 땅의 분리는 무용수들이 작은 책을 입에 물거나 양손에 들고 나와 군무로 약동하는 무대를 만들 때면 어떤 변화의 희망이 만들어 진다. 그러면서 초점은 점차 인간 내면, 인간 자체에게로 옮겨지게 되고 무대 위에 이동 가능한 두터운 벽의 활용은 그 앞의 인간에 주목할 수 있도록 집중을 도와준다.

  



 흰 짦은 치마를 입은 여자 무용수 둘이 파란 포그를 뚫고 천천히 한손엔 거울처럼 반사력을 갖춘 쟁반을 들고 무대 전면으로 걸어 나오면 새로운 정돈의 이미지와 더불어 군무와 음악에 시달린 감각은 자연스런 집중으로 흐른다. 간결하고 힘있는 동작을 쌍둥이처럼 하면서 쟁반을 바닥에 강하게 내려 놓을 때의 소리와 더불어 거울에 반사되는 빛이 퍼런 긴장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머리에 스테인레스 보울과 주걱등의 주방기구 여러개를 쌓아 붙인 희한한 머리 장식을 하고 추는 여자 무용수 3명의 춤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에 의해 서로의 간격을 좁게도, 넒게도, 수평으로 벌리거나 각도를 달리해서 펼쳐놓은 속에서 인간이 아닌 새로운 존재, 인간이 어떤 변화를 맞아 새로운 세상에 걸맞는 구원된 존재를 긴장감있게 이색적으로 만들어 나간다. 

  



 후반으로 가면서 작품은 아주 강렬한 끝을 향해 펼쳐진다. 프렐조카주가 다양한 오브제와 무대장치를 묵직하면서도 재치있게, 중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에서 가장 압권은 마지막 장이 펼쳐지면서 확인이 된다. 무대의 뒤쪽엔 일렬로 가정용 보다는 훨씬 큰 씽크 수조 여러 개가 수평으로 놓여져 있다. 그 안에 물이 들어 있고 이미 그 속에 적셔진 채 있던 각국의 국기를 무용수들은 들어 올려 바닥에 내려치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물이 온통 무대에 흐트러진다. 그 행위가 주는 시각적 효과는 원색의 국기들이 공업용 빨래 꺼리가 되는 듯한 통쾌하고 시원한 변환의 과정이다. 그들은 그 젖은 국기를 맘것 휘두르다가 앞으로 끌고 나와 바닥에 하나씩 펼쳐 놓아 무대를 가득 채운다. 국기는 국가의 상징물로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다루어야 할 물건이다. 그런 국기가 세탁이 되는 모습이나 바닥에 빨래처럼 널려지는 모습, 그 위를 자연스럽게 밟고 걸어가는 장면은 고정관념의 전복시키기에 손색이 없다. 그 국기는 앞서 더러운 결탁, 혹은 강대국들 간의 세계화 담합과 같이 사람들의 머리나 허리춤에 둘러져 추한 행동의 들러리 였던 그러 과거를 갖고 있다. 그런 과거를 씻고, 바닥에 겸손하게 깔려진 국기를 두고 잠시의 정적이 흐른 후 무대의 양쪽에서 한쌍의 남녀가 따로 천천히 들어 온다. 직전의 정적 속에서 멀리 양의 울음소리가 몽환적으로 들려 온다. 그 순간 흰옷을 입은 남녀가 안고 들어오는 것은 한쌍의 양이다. 묵시록에서 이 장면은 ‘어린 양의 혼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의 바른 행실의 사람들이 깨끗한 옷을 입고 순수를 상징하는 어린 양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창조될 것임이 선언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천년의 평화〉는 이렇게 양들이 평화롭고 자연스럽게 무대 밖으로 걸어가면서 끝을 맺는다. 물과 양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은 너무도 강렬하고 의외여서 충격적이다. 국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것과 동시에 종말에 대한 강력한 전환의 계기를 ‘물로 씻어냄’으로 새로운 천년의 평화에 대한 본인의 정확한 정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완결성을 또렷하게 보여준다.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상당한 길이의 이 작품은 장편의 영화 한편을 보는 것과 같이 전개와 결말이 분명하고 시각적이다. 안무가는 춤을 무대에서 그려내는 거대한 그림에 중심으로 설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절대절명의 도구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프렐조카주는 조명과 무대장치, 여러 도구들을 사용하여 시각적인 스펙타클을 능란하게 만들며 그것이 주는 다양하고 강렬한 느낌이 그의 작품의 중심이다. 그 안에 춤은 차라리 단순하고 획일적으로 보인다. 그의 군무는 거의 하나의 동작으로 모두 같이하는 unison으로 처리 되며 쌍둥이와 같은 듀엣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강렬하긴 하지만 답답하고 재미가 없다. 그가 쓰는 동작들은 그저 단순한 현대적인 발레 동작들로 그리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그저 일률적으로 속도를 맞추는 정도에 그친다. 그래서 긴 시간동안 조명과 무대의 전환, 신선한 오브제의 사용이 없었다면 춤만으로는 지루하기 그지 없는 낮은 수준의 안무에 불과하다. 그는 동작에 의미를 두며 그것의 형식미에 탐착하는 것에서 자유롭고 과감한 듯 보인다. 그것에 익숙해져 있는 관객에게는 그저 그렇고 그런 60년대에도 이미 있었던 군무를 본다는 것은 불만스러운 것이지만, 그는 그것을 작품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것으로 보답하였다. 그가 작품을 끌고 나가는 목적은 미적인 것에 치중되어 있지 않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선이며 그것이 좀 더 무대 미학에 충실하도록 그 다음에야 장식을 하는 순서를 갖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춤은 소홀하며 다른 시각 장치들이 그 사이를 메꿔 준다.

 류의 미래에 대해, 2000년대 사는 예술가의 한 사람으로서 프렐조카주가 빚이 없는 것은 이 작품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해냈기 때문이다. 흔히 현대의 예술가들은 현대에 대해 문제의식을 화두로 가지면서도 스스로 다시 그 문제로부터 소외되는 불행에 처해 있다. 그래서 그들이 현대를 다루면서 자유롭고자 했던 출발점을 잃어버리고 미아가 된다. 그러면서 가장 빠지기 쉬운 미궁은 형식 놀이 빠져 버리는 것이다. 프렐조카주는 2010년 이 작품으로 그 미궁으로부터 성공적으로 탈출하였다. 그가 무대 위에서 현재와 미래를 적절히 오가면서, 천국과 지옥을 그려내고,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또렷하게 드러내면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많은 채무를 해결하였다. 그가 현대의 예술가로서 주목받을 수 있는 이유이다.


 


2012. 06.
사진제공_MODAFE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