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노네임소수 최영현 〈BLACK〉
깊은 감정의 정체를 흔드는 춤
김혜라_춤비평가

무거운 돌덩어리가 짓누르는 시간, 최영현 안무작 〈BLACK〉(12,19~20,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을 보는 동안 느끼게 되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우리의 숨겨 놓은 고립감을 파헤치며 어둠(블랙)의 공간으로 침잠하게 한다. 불빛에 도드라져 보이는 댄서의 근육이 몸짓으로 파고들어 깊은 감정을 드러낸다. 우리가 살아가며 누구나 느끼는 긴장, 당혹, 은밀, 우울, 불안, 공포, 고독, 처절함 같은 감정의 민낯이다. 형체가 없는 감정을 날 것의 육체로만 느낄 수 있게 안무한 최영현의 작품에서 몸의 실존성을 생각하게 한다.






노네임소수 최영현 〈BLACK〉 ⓒ옥상훈




 최영현이 인용한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 속에 있다’는 문장이 적나라하게 무대에서 시각화된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조명 불빛은 어둠을 들추는 오브제로서 요동치는 감정을 고요하게 비추기도 하고, 어둠을 가르는 한줄기 빛으로 인도되는 환영(幻影)으로도 보인다. 비틀어지고 구겨진 치열한 몸짓이 오브제와 어우러져 감정의 속살을 드러내며 차곡차곡 쌓이는 무대에서 사람들의 침묵 속에 담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노네임소수 최영현 〈BLACK〉 ⓒ옥상훈




 깜깜한 무대에 등장한 빛(형광등)은 이 작품의 전지적 시선으로 누군가를 쳐다보듯이 댄서 신체 부위를 탐색하며 몸의 미세한 반응까지도 포착한다. 남자의 손가락이 여성 신체 부위를 가볍게 터치한다거나 댄서들이 손을 지퍼에 넣고 바닥에 누워 있는 장면 같은 은밀한 성적 경계로 표현된다. 상징적인 장면들이 여러 상황과 감정적인 측면을 암시하지만 사실 작품 초반에는(온라인으로 본 탓도 있지만) 완전한 집중을 이끌어 내지는 못한다. 그러다 거대한 덩어리가 의자에 앉은 댄서를 누르는 장면에서 정신이 바짝 들며 작품에 몰입하게 된다. 오롯이 거대한 물체를 감당하며 버텨내는 댄서의 치열한 몸부림 속 미미하게 세어 나오는 신음소리가 보는 이의 감정까지 무너뜨린다. 댄서를 짓누르는 감당할 수 없는 물체는 누군가에게는 무서운 감정의 무게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버거운 삶의 무게일 것이다.






노네임소수 최영현 〈BLACK〉 ⓒ옥상훈




 최영현의 감각적인 안무와 연출은 장면마다 상징적인 레퍼런스로 연동되어 나만의 감정이 아닌 공동의 고통스러운 감정까지 비춘다. 여자 댄서가 줄에 매달려 흔들리는 상황을 묵묵히 응시하는 남자의 시선이나 세 명의 남자가 여자의 몸을 물건처럼 다루는 상황을 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에서 목격되는 왜곡된 시선과 사건을 환기시킨다.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감정이다.




노네임소수 최영현 〈BLACK〉 ⓒ조태민




 무대에서 펼쳐지는 숨겨진 감정의 정체는 한 올씩 벗겨져 더욱 강렬한 느낌으로 전달된다. 거대한 벽으로 설정된 오브제가 무대 양쪽에서 댄서 한 명의 몸을 천천히 조여 온다. 한 뼘도 안 되는 공간에서 살아남고자 고군분투하는 댄서의 구겨지고 꿈틀거리는 몸이 치열하여 극한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가두려는 자들과 벗어나려는 자의 싸움이 반복되며 무대는 고통스러운 공간으로 탈바꿈된다.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이다. 관절과 근육에서 묻어나는 살고자 하는 본능적인 몸부림이 처연할 뿐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비닐에 온 몸이 부서지듯 포효하는 댄서들의 몸짓에서 다시 한 번 숨겨진 감정들이 난도질당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처절함, 깊은 침묵 속에 감춰진 그 감정의 정체이다.
 팬데믹 상황으로 고립과 고독의 정서가 만연한 요즈음에 작품 〈블랙〉은 관객들의 감정을 뒤흔들고 말았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극대화된 감정의 무게를 보여준 무대는 처절하지만 아름답다. 단조로워 명쾌하다. 최대한 절제된 댄서들의 움직임과 빛의 명암만으로 ‘감정을 시각화’하여 안무가의 의도와 주제가 적확하게 표현되었다. 극한의 감정은 오브제와 결합해 이미지를 만들고, 이 이미지들이 어우러져 관객에 따라 의미 있는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점이 이 작품의 가능성이다.
 최영현은 유행하듯 오브제를 사용하고 트렌드를 따라 타장르와 협업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시각적 효과와 과잉된 춤 테크닉을 배제하는 과단성과 내공이 있어 보인다. 안무가가 영감을 받았다는 미국의 추상화가인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작품이 침묵과 명상의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하였다. 최영현도 자신의 감정의 그림자를 흑백의 색감과 무게감으로 무대에서 관객과 나누고 싶은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무엇보다 인간만이 인간됨으로 어루만지는 인간 정서의 문제를 조명한 작품 〈블랙〉은 평자의 마음도 비추며 상대의 마음을 보게 한다. 평자는 비록 영상(12월19일, 네이버TV)으로 관람하였지만, 작품이 주는 여운이 오래 갈 것 같다.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하고
이 순간도 어딘가에서 고통 받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못한 나를 돌아보게 한다.

김혜라

춤웹진 편집위원. 춤미학과 비평을 전공하였고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비평가로 등단했다. 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심의전문위원으로 할동하며, 〈춤웹진〉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기고하고 있다.​ ​ ​ ​

2021. 1.
사진제공_옥상훈, 노네임소수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