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창호 〈웜바디〉
자연과 더불어 정화로 향하다
김채현_춤비평가

한창호의 근작 〈웜바디〉(Warm Body)는 2018년부터 그가 지속해온 일련의 작업을 다시 다듬어낸 것으로서, 이번 무대는 움직임과 천지자연을 염두에 두고 일종의 원형을 스케치해가면서 전체적으로는 정화(淨化)를 경유하는 어떤 정서와 소통하였다(서강대 메리홀, 1월 29일).
 지난 20년간 그는 김은정(지금은 도유라는 이름으로 활동)과 듀엣으로 결성한 온앤오프무용단으로 더 잘 알려져왔었다. 초창기부터 그들의 무대는 대체로 상대의 몸을 낚아채듯 포획하는 기세의 움직임으로써 객석의 시선에 글자 그대로 깊은 인상을 남기곤 하였다. 이번 무대에서 움직임들의 포맷은 적잖이 달라졌고 세월도 그만큼 흘렀으며 그들이 청년기를 지나 장년기에 들어섰다는 감을 주었다.








한창호 〈웜바디〉 ⓒ김채현




 〈웜바디〉에서 서두를 이끈 춤은 한창호의 홀춤이다. 한창호는 무대 한 지점에 머물러 선 상태에서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자세로 자기 내면의 그 무엇에 귀기울이는 자세를 먼저 취하였다. 그가 곧 양팔을 가로저으며 전신을 느리게 일렁이자 양손은 가슴 아래 부위 앞에서 서로 만나거나 엇갈리고 양팔 또한 둥근 모양을 이루다가 활짝 펴지기를 되풀이한다. 그 움직임의 진폭이 점차 커지는 가운데, 잠시 뒤 등장한 도유가 한창호와 떨어진 상태에서 한창호와 거의 흡사한 움직임으로 호응하면서 춤은 홀춤으로부터 두 사람의 듀엣으로 전환한다. 어느 누가 선도한다고 의식할 여지도 없이 두 사람은 듀엣으로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미세한 것들이 모여 점차 가시적인 흐름을 이루어낸다는 것을 〈웜바디〉의 서두는 암시한다. 안무자로서 한창호는 소개 글에서 대지에 서서 고요한 바다를 응시하며, 바람과 더불어 숨을 쉬고, 물이 발에 입맞춤한다고 자기 내면의 한 자락을 비추어 보였다. 이로 미루어 해석하면, 안개나 물방울 같은 대자연 속 미세한 물과 물은 홀춤과 듀엣을 거치는 그 사이에 점차 대하(大河)의 물결을 이루게 된다.






한창호 〈웜바디〉 ⓒ김채현




 이어 등장하는 9명의 사람들은 이제 대하의 물결 속에서 존재할 것이다. 무대 곳곳에 흩어진 그들은 어둠 속에 서 있는 모습을 매우 조용히 드러낸다. 사방의 고요함을 조금씩 헤쳐나가듯 그들은 전신을 느리게 일렁이며 조금씩 파동을 더해간다. 특정 스토리나 캐릭터가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한 무리의 집단인 듯한 모양새로 공동의 움직임과 모습들을 전개한다. 전반적으로 그들의 동작은 앞서 한창호와 도유가 양팔을 휘저으며 전신을 가동시켰던 그 동작과 닮은꼴이다. 아주 다양한 구도와 대열로 변주되는 과정에서 닮은꼴의 이 동작은 어느덧 〈웜바디〉의 주제 동작으로 다가오고 새겨진다.
 집단무의 기운에 기대어 그들은 꽤나 오래 여러 상태의 바리아시옹들을 구축해나간다. 흩어진 사람들은 서로 모여 하나의 무리를 이루며, 특히 여기서 양팔이 수행하는 역할은 그 비중이 높아간다. 양팔들은 직선 같은 뻗침보다는 안으로 굽혀진 곡선미를 동반하는 움직임에 치중하고, 때로 의도적으로 활짝 펴진 손 모양새들은 팔 움직임에 장식성은 물론 의미를 더한다. 여기서 양팔은 잠시라도 머물 틈을 갖지 않으며 상반신은 무수한 굴신들과 비틀음들을 강하게 되풀이하고, 이윽고 물결의 파동은 에너지의 상승을 타고선 어떤 극점에 다다르는 양상을 보인다. 하체보다 상반신이 움직임의 주축을 이루도록 의도한 이러한 점은 〈웜바디〉에서 주목할 개성이라 여겨지고, 그 집단무 장면들 자체는 아름답게 수용될 것이다.






한창호 〈웜바디〉 ⓒ김채현




 극점에 닿은 사람들의 움직임은 모종의 계기에 의한 듯이 잦아들고 그들은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춘다. 연이은 부분들에서 그들은 삼삼오오 등장하여 다시 하나의 무리를 이루지만 팔동작의 기운도 전과 같지 않고 무리의 집단적인 모습도 어그러져서 앞서와 같은 균질감마저 찾기 힘들다. 오히려 그들은 느리게 일렁이며 비틀대거나 몸을 가누지 못한 채 모두들 쓰러지는 모습들이다. 바닥에는 물결 무늬의 조명 디자인이 여기저기 비춰져서 그들이 이 세상 깊은 어디에선가 집단으로 실종해서 침몰된 상태임을 가리키고 있다. 현실과 삶에 관한 느낌을 그린 듯한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금 세상살이와 삶, 생명에 대한 안무자의 단상을 읽을 수 있다. 앞서의 활달한 분위기가 가라앉긴 했어도 사람들은 칙칙하고 무거운 상황을 물리치려는 몸짓을 온힘을 다해 펼쳐보인다. 마치 재난 현장에서 인명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인명 구조에 나서는 사람들이나 생명을 애타고도 숭고하게 갈구하는 것처럼.
 〈웜바디〉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장면은 설정되지 않았다. 이어지는 부분에서 도유가 그려내는 다음의 몸짓들에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얼마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홀로 등장한 도유는 서두에서와 유사한 흐름을 재연한다. 가슴에 모은 손이 아래로 쓸어내리는 것과 동시에 전신을 동요시키는 도유의 움직임들은 양팔이 둥근 모양을 비롯하여 서로 엇갈리거나 흩어지고 제 위치에서 뻗어나가며 조성하는 다채로운 생김새로 전개되도록 한다. 무대 한가운데 지점에서 그려지는 이 부분은 높은 집중성을 보였고, 그것은 그러한 품새로 오래 수련된 몸이라야 표출할 움직임들이었다. 여기서 〈웜바디〉가 환기하려 한 것은 안무자의 소개대로 몸이 빛나고 자유로워진 순간, 빛이 물결치고 생명이 속삭이며 생명의 몸이 신비한 힘을 주는 그러한 상태였다.
 〈웜바디〉에서 서두와 마지막 부분에서는 〈대지를 위한 전주곡〉(L. Einaudi 곡)이, 집단무 부분에서는 주로 〈타이타닉호의 침몰〉이 효과음으로 활용되었다. 두 가지 효과음은 해당 부분들의 전개를 제각각 서정적으로, 아니면 극적으로 적절히 받쳐주었다. 음향의 가짓수를 제한하면서 움직임에 집중한 연출 방침이 통한 것으로 보인다.




한창호 〈웜바디〉 ⓒ김채현




 〈웜바디〉에서 웜(warm)은 함축적이다.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뉘앙스의 그 말은 온앤오프의 진화 혹은 변신을 짐작케 한다. 결성 초창기부터 온앤오프가 웜했더라면 이런 짐작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나의 관측으로 온앤오프는 움직임에서 웜하기보다는 훨씬 핫했었고 몸 역시 그러하였었다. 이와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웜바디〉에서 작동하는 움직임들은 굳이 형체를 구하고 형태를 지어내는 데 연연하는 기색은 없이 몸으로 표출되는 흐름을 타는 움직임들로 다가온다. 이들 자연(스런 상태)과 인접한 움직임은 각자의 개별성을 벗어나 움직임 그리고 몸에 대해 어떤 원형질에 속함 직한 질감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작품이 의도하는 자연과의 어울림이라는 명제도 구현될 수 있었다. 단적으로, 우리가 〈웜바디〉에서 정화(淨化)의 순간들과 조우할 것은 자연스럽고, 이 공연은 또한 치유의 느낌으로 이끄는 사례로서 기억될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를 비롯 다수의 논문,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다.​​​​​ 

2021. 3.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