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한국춤비평가협회 선정 2021 춤비평논저상 - 우수논문
발레계의 블랙페이스 / 옐로우페이스 논쟁 연구
정옥희

I. 서론
II. 인종주의와 피부색
III. 발레계의 인종주의에 대한 학문적, 행동주의적 성찰
IV.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 논쟁 분석
V.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I. 서론
2020년 11월 국립발레단은 〈해적 Le Corsaire〉(재안무: 송정빈, 각색: 강다영)을 재공연하면서 성착취와 노예제의 설정을 없애고 작품의 배경을 터키에서 환상의 공간으로 대체함으로써 원작의 여성혐오적이고 이슬람혐오적인 설정을 제거했다. 연구자는 이 공연이 한국의 발레사에서 중요한 기점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고전 작품에 내재된 문제점을 인식한 점, 고전 작품을 박제시키지 않고 변화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점, 그리고 이를 무용학자들이 아니라 현장의 예술가들이 주도한 점 때문이다.1) 현장으로부터의 변화는 세계적인 추세이다. 대표적으로 2018년 중국계 전직 발레무용수인 필 챈(P. Chan)과 뉴욕시티발레단의 현역무용수인 조지나 파즈코귄(G. Pazcoguin)이 이끈 ‘옐로우페이스 청원(The Yellowface Pledge)’ 운동을 들 수 있다. 〈호두까기 인형〉 속 인종차별적인 중국춤 분장을 바꾸자는 청원을 펼쳤으며 세계 30여 개 무용단이 동참하였다. 이처럼 오늘날 발레계에서는 고전의 문제점을 가시화할 뿐 아니라 이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왜 고전의 변화가 두드러진 것일까? 사실 고전(canon)으로 자리 잡은 레퍼토리들이 지닌 문제점은 일찌감치 지적되었다.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작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양 중심, 백인 중심, 가부장 중심, 이성애 중심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비백인,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인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곤 한다. 이에 1990년대 이후 발레 정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가시화되었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1995)나 마크 모리스의 〈하드 넛 The Hard Nut〉(1991)처럼 소위 ‘패러디’라 불린 작품이 대거 등장했다.2) 고전 레퍼토리의 관습과 특성을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것이 당시 시대정신이라 할 정도다.
 그런데 고전의 패러디로는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드 넛〉의 중국춤에서 보듯 패러디라고 해서 늘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3) 이에 발레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사회제도적 측면으로 확장되었다. 2000년대 이후 발레계의 인종적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비백인 발레무용수들에 대한 편견을 부수고 그들이 발레에 입문하고 프로페셔널 무용수로 활동하는 과정에 걸쳐 제도적으로 기회를 넓히려는 노력이 이어졌다.4) 이러한 사회적 변화 위에서 고전에 대한 성찰이 활성화된 점은 논리적인 수순이다. 비백인무용수가 늘어도 세계 정상급 발레단과 고전 작품이 바뀌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개혁이기 때문이다. 고전의 변화가 요청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사실 고전이라고 해서 늘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무대에 오를 때마다 의상을 바꾸고, 캐스팅을 바꾸고, 설정을 고치고, 메이크업을 수정하면서 고전은 좌표이동 해왔다. 이는 안무가나 예술감독의 자발적 성찰 때문이기도 하고, 무용계 및 사회적 요구에 따른 변화이기도 하다. 따라서 원작과 재해석을 이분법이 아닌 스펙트럼의 관계로 설정하고, 작품의 변화를 단지 대본이나 안무 상의 변화가 아니라 인종주의를 비롯한 보다 넓은 사회적 변화와 연결시켜야 한다.
 본 연구는 발레에 대한 비판적 성찰 및 행동주의적 접근이라는 맥락 속에서 반인종주의 담론을 파악하고자 한다. 논의의 구심점은 블랙페이스(blackface)와 옐로우페이스(yellowface)에 대한 논쟁이다. 블랙페이스와 옐로우페이스는 공연예술 및 대중문화에서 백인이 비백인 캐릭터를 재현하기 위해 피부색을 칠하는 관습으로 오늘날엔 노골적인 인종주의 장치로 여겨진다. 그런데 발레에서는 원본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원작자의 의도를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의 관습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최근 무용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을 이끌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옐로우페이스 청원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내 무용학계에서 발레의 인종주의에 대한 연구는 드물다. 작품 속 오리엔탈리즘을 분석한 경우는 있지만 작품의 테두리 너머 사회적 차원의 인종주의에 대한 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5) 원본과 전통을 존중하는 학문적 분위기 속에서 예술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연구는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 자체를 이해하는 게 목적이라기보다는 이를 문제 삼고 수정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한 맥락을 이해하고 논쟁의 논리적 구조를 분석하는 데 목적이 있다. 특정 작품을 대상으로 작품의 원본을 가늠하거나 안무가의 의도를 분석하는 대신 오늘날 여러 안무가와 무용가, 비평가들이 벌이는 논쟁을 분석하고자 한다. 고전 작품 속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에 대한 논쟁이 학문적 논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를 촉구한다는 점에서 반인종주의적 행동주의(anti-racist activism)라는 거시적 흐름의 일부로 파악할 것이다.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에 대한 연구는 간학문적이다. 초기의 학자들은 지나간 미국 문화에 대한 향수를 바탕으로 블랙페이스의 역사를 기술했으나 문화연구와 퍼포먼스학의 영향으로 학문적 경계를 넘나드는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학자들은 블랙페이스의 작동 방식과 사회적 영향력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6) 따라서 발레나 연극, 텔레비전 등 한 분야의 논의만으로는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 논쟁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다. 이에 연구자는 발레계의 논쟁을 분석하면서도 그 논리에 대해선 연극학, 공연학, 역사학 등에서의 논의와 연결시킬 것이다.
 II장에서는 인종주의에 관련된 이론적 토대를 파악하고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의 역사를 소개한다. III장에서는 발레계의 인종주의에 대한 학문적 성찰 및 행동주의적 변화를 살펴본다. 무용계의 인종 문제가 학문적 접근에서 행동주의적 접근으로 확장된 맥락을 들여다본다. IV장에서는 고전 작품 속 블랙페이스와 옐로우페이스를 둘러싼 논쟁의 논리구조를 분석한다. 발레에서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 관습은 여러 레퍼토리에 비슷한 유형으로 나타나기에 논쟁 역시 비슷한 구조를 띤다. 이에 본 연구는 특정 안무가, 특정 버전, 특정 작품에 한정하여 분석하기 보다는 특히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와 관련되어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페트루슈카〉와 〈호두까기 인형〉을 선택하여 담론의 전반적 구조를 파악하였다.
 본 연구는 문헌연구로서 무용서적, 신문기사, 인터넷 자료 등 다양한 1, 2차 자료를 활용했다. 이를 통해 발레 고전을 고정된 것, 혹은 신성불가침한 것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만들어지는 동시대의 사회적 구성물로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함을 제안한다.


II. 인종주의와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
인간은 인간을 다양하게 분류해왔다. 서양에선 16세기까지 4체질론이 우세했다. 고대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우주를 구성하는 네 가지 원소인 공기, 물, 불, 흙이 인체에서 각각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이 된다고 보았고 고대 로마의 의사 갈레노스(C. Galenous)는 이를 발전시켜 인간의 기질이 체액의 비율에 따라 네 가지로 구분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17세기가 되면 과학의 발전과 항해술의 발달로 타문화와 접촉이 늘어나면서 인종 개념이 대두했다. 가축의 혈통이나 품종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종(種) 개념이 피부색과 안면각, 두개골 모양 등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분류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7)
 인종은 “신체적 특성에 기초하여 사회적으로 규정된 집단”8)을 말한다. 여기서 사회적으로 규정되었음은 인종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따라 정의가 달라짐을 말한다. 실제로 인종 분류법은 역사적으로 변화하였다. 17세기 프랑스 의사 겸 여행가인 베르니에(F. Bernier)는 인간을 유럽인, 아프리카인, 아시아인, 라플란드인, 인디언의 다섯 가지로 분류했고, 독일 자연사교수인 블루맨바흐(J. F. Blumenbach)는 코카시안, 몽골리안, 말레이, 아메리칸 인디언, 에티오피안의 다섯 가지로 분류했다. 이후 근대의 과학자들은 두개골의 용량, 배꼽과 성기 사이의 거리, 뇌의 앞부분과 뒷부분의 비율 등을 기준으로 인종을 분류하고 서열화했다.9) 이처럼 과학적 방법을 통해 편견과 차별을 정당화함으로써 인종은 ‘발명’되었다.
 인종 개념은 두 단계로 작용한다. 인간의 몸을 구분하고 의미부여 하는 과정, 그리고 그 구분에 따라 사회적 재화를 차등적으로 분배하는 과정이다. 전자가 인종 개념이라면 후자는 인종주의이며, 둘은 상보적 관계를 형성한다.10) 인종주의(racism)란 인종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가 인간의 능력을 결정하며, 따라서 인종을 근거 삼아 인간을 차별해도 된다는 믿음이다. 염운옥은 “타자의 ‘행위’가 아니라 ‘속성’에 근거해 타자를 분류하고, 측정하고, 가치를 매기고, 증오하고, 심지어 말살하는 서양 근대의 이데올로기”11)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인종주의가 서양 근대에 생겨났다는 점이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팽창하면서 서양 백인들이 흑인을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과학적인 언어로 인종을 서열화한 것이다.
 인종의 서열화에서 기준은 백인이다. 백인성(whiteness)은 “변하지 않는 변수”이자 “변화하는 동일성”으로 군림해왔다.12) 백인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우월하며, 비백인은 백인의 타자이기에 차별당하거나 지배당해도 괜찮다고 여겨졌다. 인종 개념을 근거로 자행된 타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2차 세계대전으로 파국을 맞았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유네스코는 모든 인간은 단일한 종에 속한다고 선언했고 1960년대가 되면 인종 개념이 생물학적으로 실체가 없다고 밝혀졌다. 그러나 과학적 차원에서 반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종 개념은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이에 ‘인종 없는 인종주의(racism with race),’ ‘문화적 인종주의(cultural racism)’, ‘신인종주의(new racism)’라고 불린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시장만능화와 부의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이민자를 둘러싼 사회갈등이 세계 곳곳에서 심화되고 있다. 이에 인종주의는 과거의 산물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현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한편 인종은 어떻게 피부색과 연결되었을까? 인종을 최초로 과학의 언어로 표집한 이는 스웨덴의 과학자 린네(C. Linnaeus)이다. 그는 저서『자연의 체계 Systema Naturae』(1735)에서 인류를 백인 유럽인(Europæus albus), 적인 미국인(Americanus rubescens) 갈색 아시아인(Asiaticus fuscus), 흑인 아프리카인(Africanus niger)으로 나누었다. 인종 개념이 피부색과 일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자연의 체계』 제10판(1758)에서는 아시아인을 갈색에서 노란색으로 바꾸었다. 이때부터 흑인-황인-백인이라는 피부색의 분류법은 과학이 되고 권력이 되고 실재가 되었다.
 피부색은 인종을 생물학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으로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군림해왔다. 문제는 피부색이 과학적 근거가 약할뿐더러 지역의 기후와 일조량, 그리고 개인차로 인해 가변적인 성격이 크다는 점이다.13) ‘한 방울 법칙’에서 보듯 제도는 인종 간 구분을 명확히 상정해왔지만 수지 길로이 핍스 사건에서 보듯 겉으로 드러나는 피부색과 인종적 분류가 항상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14) 따라서 백인이 특권을 누리는 사회에서 피부색이 밝은 비백인이 백인 행세를 하는 패싱(passing) 현상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패싱이 모호한 외모를 바탕으로 타자를 속여 인종 경계를 넘는데 방점이 있다면 인위적이고 노골적이며 약속된 방식으로 인종 경계를 넘는 관습도 있다. 블랙페이스와 옐로우페이스이다. 둘 다 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흉내 내며 이를 볼거리로 삼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블랙페이스(blackface)란 백인이 흑인의 외모와 특성을 흉내 내는 행위를 지칭한다. 유럽에선 카니발이나 샤리바리(charivari)15) 등에서 등장하는 얼굴에 검은 칠을 한 악당(종종 크로스드레서로 나타남)이나 코메디아 델라르트의 할리퀸(harlequin) 캐릭터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고, 미국에선 1820년대 대중 여흥인 민스트렐(minstrel)에서 백인 남성이 흑인을 흉내 내며 춤과 노래를 행하던 전통에서 왔다.16) 19세기 동안 블랙페이스 민스트렐은 백인 남성 공연자들은 불에 그슬린 코르크로 얼굴을 칠하고 춤과 노래, 몸짓 등 흑인의 문화적 요소를 의식적으로 찾아내고, 모방하고, 웃음거리로 삼았다. 출발부터 명백하게 흑인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한 민스트렐은 백인노동자층 관객에게 엄청난 인기를 끄는 상업적 공연 산업으로 성장했으며 이후로도 헐리우드 영화 등 대중문화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블랙페이스는 공연자의 몸을 변형시킨다는 점을 강조한다. 의상과 화장, 머리 모양은 시간에 따라 바뀌었지만 현실의 몸에서 벗어나 과장된 웃음거리를 삼는다는 점만은 변함없다. 짐 크로우(Jim Crow)라는 대표적인 캐릭터에서 보듯이 블랙페이스의 전형은 늘 춤추고 노래한다. 문제는 블랙페이스가 백인이 설정해 놓은 흑인의 전형이며, 백인이 아닌 흑인이 맡더라도 이 전형을 강화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한편 동아시아인을 황인으로 규정하고 옐로우페이스(yellowface)로 표상하는 것은 블랙페이스에 비해 역사가 짧다. 키벅(2011)에 따르면 19세기 전까지 황색은 피부색과 관련되어 인종적 지시어로 사용된 바가 없으며 아시아인을 황색보다는 오히려 백색과 연관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아시아인을 백색이 아닌 존재로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멀게는 13세기 징기즈 칸의 유럽 침공, 가까이는 19세기 중국인이나 일본인의 대거 이주로 인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황색이 중국에선 황제가 쓰는 특권적인 색채라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서양인은 아시아인을 백색과 흑색 사이의 중간색인 황색으로 규정했다. 아시아의 다채로운 민족을 ‘몽고족’이라는 명칭으로 묶고 몽고반점, 몽고증(오늘날의 다운증후근) 등 인종 전체가 지닌 열등한 신체적 특징을 찾아냈다. 또한 황화(yellow peril)’라는 개념을 통해 이국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았다. 키벅의 말대로 ‘황색성이 발명’된 것이다.17)
 이러한 배경에서 옐로우페이스는 특히 미국의 공연계에서 중국인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을 패러디하는 관습이 되었다. 아시아성(Asianness), 특히 중국인 정체성을 전형화하고 비하하는 표식으로 찢어진 눈, 어두운 피부색, 변발, 뾰족한 턱, 가짜 이빨 등으로 표현된다.18) 얼굴을 노란색을 칠하는 관습으로 대표되지만 피부색 뿐 아니라 메이크업, 대화, 자세, 의상 등으로 아시아인이나 흑인을 열등하고 낯선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19) 여기엔 경멸과 찬사가 뒤섞여 있다. 그들이 잃어버린 문화나 가치가 남아있는 이상으로 욕망되기도 하고, 미개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는 모두 백인이 비백인의 존재 방식에 대해 헤게모니를 지닌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블랙페이스 연구자 리처드 톨(R. C. Toll)이 말하듯 블랙페이스에선 “백인에 의해, 그리고 백인을 위해 조종되고 조작된다”20)는 점이 핵심이다. 그렇다면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는 지나간 역사의 산물일까? 블랙페이스 연구자 스티븐 존슨은 오늘날에도 블랙페이스의 유산이 지속됨을 지적했다. 〈아메리카스넥스트탑모델 America’s Next Top Model〉과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전통적인’ 의상과 페이스페인팅을 믹스매치하거나 오프오프브로드웨이 쇼로 인기를 끈 우스터 그룹(the Wooster Group)이 공연자의 인종을 해체하기 위해 블랙페이스를 사용 하는 등의 방식으로 우리 곁에 편재한다.21) 실로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는 민스트렐 전통의 핵심적 기표이지만 그 전통에 대한 이해와는 괴리된 채 시공간을 뛰어넘어 영화, 춤, 소설, 만화,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넘나들면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고 다양한 문화 맥락에서 적응하고 활용된다는 점에서 인종적 헤게모니, 정치, 권력을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다.22) 이처럼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는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살아남아 영향력을 발휘하는 복잡한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


III. 발레계의 인종주의에 대한 학문적, 행동주의적 성찰
발레는 유럽 문명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 춤 장르이다. 백인 남성의 귀족적 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춤 양식이지만 보편적이고 유일한 예술춤으로 군림해온 탓에 구체적인 문화에 뿌리를 두었다거나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유럽 중심적인 발레에서 백인의 몸은 중립적이고 ‘표기되지 않은(unmarked)’ 몸으로 기준이 되었고, 여기에서 벗어난 비백인의 몸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20세기 초의 미국 무용비평가인 존 마틴이 발레의 “완전히 유럽적인 외양, 역사, 그리고 기술적인 이론이 [흑인 무용수에게] 문화적으로, 기질적으로, 그리고 해부학적으로 낯설기에 진입하지 않는 것이 낫다 ”23)고 표현한 바 있을 정도로 발레에서 비백인이 설 자리는 매우 좁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양 발레계에선 소수의 흑인 발레무용수와 흑인 발레단이 등장해 계보를 이어왔다.24)
 무용학자들은 발레, 나아가 서양 예술춤에 내재된 백인우월주의 신화를 무너뜨리기 위해 소수의 비백인 발레무용수의 존재를 발굴하고 이들의 업적에 의미를 부여하며 백인 중심의 서사와 통합시키려 노력해왔다. 크리스티 아데어(C. Adair)가 흑인의 발레무용수와 무용단이 소외되어 온 구조적 원인을 지적한 바 있으며, 브렌다 딕슨 고칠드(B. D. Gottschild)와 제인 데스몬드(J. Desmond)는 각각 Digging the Africanist Presence in American Performance(1998)와 Modern Dance, Negro Dancer라는 강렬한 제목의 저서를 통해 백인춤과 흑인춤을 구분해 온 역사쓰기(historiography)를 문제시하고 두 흐름 간의 상호작용을 집중 조명하였다. 또한 고칠드는 조앤 메이어 브라운(Joan Myers Brown)이라는 흑인 발레리나의 생애사를 추적하며 발레에서의 인종주의를 정면으로 파헤쳤다.25)
 그런데 2010년대까지 학자들의 문제 제기가 학술적 분석에 집중되었다면 그 이후는 좀 더 전방위적이고 대중적이며 현실적인 변화를 이끄는 예술 행동주의(Art Activism)가 감지된다. 행동주의가 “논쟁적인 이슈의 한 측면을 지지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직접적이고 격렬한 행위를 강조하는 주의나 행동”26)을 일컫는다면 예술 행동주의는 예술의 창조적 힘을 활용해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려는 행위이다. 춤이 사회적 변화를 촉진하는 경향과 이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 학자들은 학문과 실천의 괴리를 극복하고 보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으로 변화를 이끌려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저서를 통해 흑인 춤을 서양무용 서사에 포함시키려 노력했던 아데어와 램지 버트(R. Burt)는 2013-14년 영국 리버풀의 노예박물관에서 〈영국 춤: 흑인 경로 British Dance: Black Routes〉라는 전시를 개최하고 그 연구를 2017년 동명의 연구서로 출간했다. 학문적 탐구가 텍스트화 된 연구물로만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새롭게 조형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27)
 이러한 연구를 통해 무용학자들은 발레 역사에 만연한 제도적 인종주의를 드러내는데 초점을 두었다. 제도적 인종주의란 사람의 피부색, 문화, 혹은 민족적 기원 때문에 기관이 그에게 적절하고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총체적으로 실패함을 뜻한다.28) 발레에서 비백인이 적은 현상이 흑인, 캐리비언, 아랍, 라티노, 아시안 등 비백인 무용수가 발레에 적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발레계에 입문하고, 훈련받고, 고용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회제도적인 구조 때문에 지속적이고 집단적인 차별과 무시를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행동주의적 실천은 학자만의 전유물에 그치지 않고 무용 현장으로 확장되었다.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기존 발레단에서도 변화가 시작되었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가 2013년에 시작한 ‘프로젝트 플리에(Project Plié)’는 발레의 인종적/민족적 다양성을 증진시키고자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진행하는 교육프로그램이다. 최초의 흑인여성 수석무용수가 된 미스티 코플랜드가 전면에 나서 발레계에서 주변화된 커뮤니티를 끌어들이고 있다. 미국 퍼시픽노스웨스트발레단(Pacific Northwest Ballet)의 경우 2015년 ‘동등성, 다양성, 포괄성(Equity, Diversity, and Inclusion; EDI) 계획을 수립했다.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인종차별과 미묘한 차별에 대해 인식하고 무용단과 발레학교의 교수자, 학생, 무용수, 가족들과 긴밀한 대화를 통해 고쳐나가려 한다.
 반인종주의적 행동주의가 꼭 발레단의 차원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미국 뉴욕의 무용관련 비영리기관인 Dance/NYC는 2018년 인종적 정의 아젠다(Racial Justice Agenda)를 발표했다.29) 무용계에서 백인 우월주의를 무너뜨리고 ALAANA(African, Latina/o/x, Asian, Arab, Native American) 공동체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주장하며 인종적 정의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공개하고 있다. 할렘무용단의 흑인 발레무용수 잉그리드 실바는 비영리기관인 EmPowHer NY과 흑인발레무용수 권리단체인 Blacks in Ballet을 설립하여 사회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또한 무용수 개인이 나서서 반인종주의적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로열발레단의 스타 발레리노 마셀리노 삼베(M. Sambé)가 경찰 공권력에 희생된 흑인남성인 조지 플로이드에게 헌정하는 춤인 〈I Can’t Breathe〉를 안무하고 직접 춤춘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한 사례처럼 무용수들은 다양한 루트와 방식으로 반인종주의 운동을 개진하고 있다.
 발레에서 반인종주의적 행동주의는 비백인 발레무용수를 부각시키고 가시화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국제 흑인무용협회(The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Blacks in Dance)를 예로 들 수 있다. 1988년 필라댄코(Philadanco!)의 예술감독인 조앤 메이어 브라운이 국제흑인무용단컨퍼런스를 주최한 이래 이 협회는 학회, 마스터클래스, 포럼, 대회 등을 개최하고 있다. 특히 그들은 유색인 남녀 무용수, 그리고 클래식 발레와 모던 댄스를 기반으로 하는 무용단을 위한 오디션을 개최하며 무용수들을 위한 다양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냈다. 또한 2015년 테레사 루스 하워드가 설립한 MoBBallet(Memoirs of Blacks in Ballet)라는 단체는 발레무용수들을 조명하고 가시화하는 작업을 통해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했다. 특히 2020년 8월에는 가상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학술적이고도 사회적 움직임을 이어갔다.
 아예 비백인을 내세운 발레단이 새로 창설되기도 했다. 2001년 당시 21세의 카사 판초가 흑인 및 아시아계 무용수로 구성된 프로 단체인 발레 블랙(Ballet Black)을 설립하여 화제가 되었다. 미국에선 할렘무용단의 역사가 이어져왔지만 영국에선 최초이다. 이후 판초가 더햄대학에서 영국의 흑인여성발레무용수의 경험에 대한 논문인 All Things Black And Beautiful(2016)을 발표했다는 점은 이론과 실천의 접점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처럼 비백인 무용수를 가시화하는 것은 반쪽짜리 노력에 그친다.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발레단과 유명한 고전작품이 꿈쩍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할렘무용단이 이룬 것이 많지만 기존의 헤게모니를 변화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발레계의 중심에서의 움직임을 들여다보고 촉구해야 한다. 파리오페라발레단이나 마린스키발레단 같은 정상급 무용단이 바뀌어야 하고 소위 정전이라 여겨진 작품들이 바뀌어야 한다.
 다행이 2010년 이후 발레 레퍼토리의 인종주의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국적이거나 모욕적인?: 발레의 시대착오적 전형성은 진작 은퇴했어야 한다”(2010), “미안하지만 〈호두까기 인형〉은 인종차별적이다”(2014), “〈호두까기 인형〉의 옐로우페이스는 상냥한 발레 전통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스테레오타입이다”(2018) 등의 기사는 제목에서부터 직설적인 방식으로 발레 정전의 인종주의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30) 언론들은 〈호두까기 인형〉, 〈레이몬다〉, 〈라바야데어〉, 〈해적〉, 〈페트루슈카 〉 등 이제는 고전이 된 작품들을 둘러싼 인종주의 논쟁을 소개하고 적극적인 수정을 촉구했다. 또한 무용수 출신의 필 챈과 조지나 파즈코귄은 2018년 yellowface.org를 개설해 옐로우페이스 청원(The Yellowface Pledge)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2020년에는 그 경험을 담은 저서 『옐로우페이스에게 작별인사하기Final Bow for Yellowface』를 출판하는 등 다양하게 인종문제를 문제화했다. 〈호두까기 인형〉 2막의 중국 춤의 옐로우페이스를 문제 삼았던 그들의 활동은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 뿐 아니라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주의를 공론화하는데 기여했으며, 고전 레퍼토리에 대한 수정을 촉구했다는 의의가 있다.31)
 최근에는 파리오페라하우스의 총감독인 A. 네프(A. Neef)가 『르몽드』지와의 인터뷰에서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을 지속시키는 고전 발레를 올리지 않겠다고 말한 바 있다.32) 그의 발언은 발레단 내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일으켰으며 실제 어떻게 전개될 지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는 2016년부터 블랙페이스의 관행이 사라졌고 2020년에는 발레단 내 비백인 무용수들이 인종주의 작품을 문제 삼는 성명서를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압박을 느낀 네프가 인종주의적 작품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연구를 의뢰했다는 점은 반인종주의적 행동주의가 표면적인 잡음에서 끝나지 않음을 시사한다.
 발레의 인종주의 중에서도 고전으로 군림하는 작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특별하다. 발레의 중심부를 그대로 둔 채 주변적 존재들을 끼워 넣으려는 방식이 아니라 중심 자체를 움직이려 한다는 점, 그리고 ‘패러디’와 같은 구별되고 추가적인 형식이 아니라 고전 자체를 바꾸려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근본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IV.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 논쟁 분석
17세기 발레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면 19세기 전반의 낭만 발레는 인도, 스페인, 이집트 등 이국적인 문화에서 영향을 받았다. 필리포 탈리오니가 안무한 〈라 실피드 La Sylphide〉(1832)가 당시 서유럽에서 이국적인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했고 〈신과 무희 Le Dieu et la Bayadere〉(1830)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19세기 후반 이후로도 이국주의로 점철된 작품은 수없이 많다. 프티파의 〈파라오의 딸 La Fille du Pharaon〉(1862), 포킨의 〈 클레오파트라 Cléopâtre〉(1909) 와 같이 노골적인 방식부터 〈호두까기 인형〉이나 〈페트루슈카〉처럼 부분적인 방식까지, 이국성은 발레의 주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발레 작품들이 비서양 문화를 자주 재현한다고 하여 그 문화를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는 주변적인 것이 상징적으로는 중심에 놓이는 경우가 너무 자주 있기”33) 때문이다. 이국성을 표방한 발레들이 해당 문화를 존중하며 충실하게 재현하기 보다는 조롱, 혐오, 혹은 노스탤지어의 대상으로 삼았음은 익히 알려졌다. 이국적인 발레 작품에 등장하는 비백인은 타자화된 존재이다. E. 사이드(Edward Said)가 오리엔탈리즘 개념을 통해 말하듯 비서양인은 자기결정권을 가진 주체가 되기보다 전시되는 이국적인 사물로서 침묵 당한다. 본 장에서는 여러 작품 중에서도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 논쟁이 가장 활발한 〈페트루슈카〉와 〈호두까기 인형〉을 중심으로 논쟁의 논리적 구조를 순차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 〈페트루슈카〉와 〈호두까기 인형〉는 왜 인종주의라 비판받는가?
〈페트루슈카 Pétrouschka〉(1911)는 알렉산더 브누아의 디자인과 대본, 미하일 포킨 안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작곡으로 완성된 발레 뤼스의 초기 작품이다. 마법사가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난 페트루슈카, 발레리나, 그리고 무어인(Blackamoor) 인형의 삼각관계 이야기이다. 페트루슈카는 발레리나에게 반하지만 그녀는 무어인의 유혹에 넘어간다. 페트루슈카가 이들 커플을 갈라놓으려 노력하지만 무어인은 칼로 페트루슈카의 머리를 자른다. 이야기는 소심하고 애처로운 남성인 페트루슈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발레리나는 아름다운, 그러나 대상화된 여성이고 무어인은 발레리나를 두고 페트루슈카와 대립하는 적대자(antagonist)이기에 부정적으로 타자화 될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처량할 정도로 나약한 페트루슈카와 대조적으로 야비하고 공격적이다. 문제는 무어인이 북아프리카에 살던 이슬람계인이라는 특정 민족/인종을 지칭하며 이들을 동물적이고 성적이며 무식하고 폭력적이라 보는 비하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페트루슈카〉에서 무어인은 발레리나의 사랑을 받지만 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일 뿐 아니라 칼로 코코넛을 여는데 실패하자 코코넛을 숭배할 정도로 멍청하다.
 〈페트루슈카〉는 파리 초연 때부터 호평을 받았고 지금도 모더니즘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후 발레 시어터(1942; ABT의 전신)나 조프리 발레단(1970) 등 여러 발레단이 재공연해왔지만 무어인 캐릭터가 언론이나 학계에서 문제시 된 적은 드물었다. 2020년이 되어서야 무용비평가 웬디 페론이 “〈페트루슈카〉의 블랙페이스(혹은 블루페이스) 인형을 점검할 때다”34)라는 기사로 공론화했고 무용학자 한나 예르비넨(H. Järvinen)은 무어인 캐릭터가 메이크업 뿐 아니라 안무와 음악 측면에서도 타자화되었음을 지적했다.35)
 흑인은 고전 발레 레퍼토리에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이다. 프티파의 〈파라오의 딸〉, 〈라바야데어〉, 〈탈리스만 Le Talisman〉(1889)에 모두 흑인 노예가 등장했다. 발레 뤼스 작품에서도 〈클레오파트라〉, 〈살로메의 비극 La Tragédie de Salomé〉(1913), 〈세헤라자데〉에 흑인 노예 캐릭터가 등장한다. 백인 무용수가 블랙페이스 및 브라운페이스로 흑인 캐릭터를 공연하는 관행은 1930-40년대까지 이어졌.36) 특히 〈페트루슈카〉의 무어인은 인형이라는 설정 때문에 검은 피부색 뿐 아니라 눈과 입 주변에 흰색 원을 그려 넣고 입술을 붉게 칠하며 그로테스크함을 강조한다.
 한편 〈페트루슈카〉가 역사적이되 자주 공연되지 않는 레퍼토리라면 〈호두까기 인형〉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는 발레 레퍼토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892년 마린스키 극장의 황실발레단에서 프티파가 안무하고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했다. 초연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으나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작품이 되었다. 1954년 조지 발란신이 뉴욕시티발레단을 위해 안무한 버전이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전역에 방영되면서 크리스마스 시즌과 긴밀히 연관된 작품으로 자리 잡았다.
 〈호두까기 인형〉의 2막 ‘과자의 나라’는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느낌을 만끽하게 하는 장치이다. 초연 당시 어릿광대 춤(오늘날의 러시안 춤)과 중국 춤의 인기가 높았는데 특히 중국 춤은 앙코르 받을 정도였다.37) 그러나 인기와는 상관없이 중국 춤은 인종주의적이라 비판받는 춤이기도 하다. 2막에선 다양한 민속춤이 등장하지만 러시아 춤이나 스페인 춤이 비교적 정확하게 해당 민속춤을 묘사한다면 중국 춤과 아라비아 춤은 정확성이 결여될 뿐 아니라 부정적으로 표상한다. 아라비아 춤은 동양여성을 성적 대상화하고 중국 춤은 아시아 남성을 남성적이지 못하고 열등한 존재로 보았다. 그 중에서도 중국 춤은 주로 검지 찌르기, 고개 까딱거리기, 그리고 촐싹대는 걸음걸이 등이 대표적인 안무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나 피셔(J. Fisher)가 지적하듯 실제 동양춤의 특성과는 관련 없다.38) 챈은 손가락 찌르기가 젓가락 사용, 종종거리는 걸음은 전족(纏足), 고개 까딱거림은 머리를 깊이 숙이는 인사법(叩頭; kowtow)을 흉내 낸 것이라 추정했는데, 서양인의 시선에서 낯선 풍습을 과장하고 비하하는 논리라 받아들일 수 있다.39) 디즈니 애니메이션 〈환타지아〉(1940)에서 고개를 까딱거리며 춤추는 갈색 버섯들에서 보듯 손가락 찌르기는 동양인에 대한 움직임적 약어로 발레를 넘어 대중매체를 통해 퍼져나갔다. 뿐만 아니라 중국 춤은 옐로우페이스를 영속시킨다. 전 세계 발레단이 보유한 여러 버전의 〈호두까기 인형〉에서 중국 춤은 찢어진 눈과 푸 만추(Fu Manchu) 콧수염,40) 노란 피부색, 베트남 모자와 게이샤 가발 등으로 아시아인에 대한 스테레오타입을 반영하고 증폭시킨다.
 앞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호두까기 인형〉은 그 대중적 인기로 인해 2010년대 이후론 연말마다 인종주의 문제가 불거졌다. 이에 문제의 공론화 및 변화도 가시적이다. 뉴욕시티발레단은 2017년 발란신 버전의 중국 춤에서 종종거리는 걸음과 손가락 찌르기를 없애고 게이샤 가발과 옐로우페이스 화장도 없앴다. 발란신 안무를 관리하는 발란신 트러스트는 이 변화를 필수 사항은 아니지만 가능한 선택으로 인정했다. 발란신 안무에 대해 유독 엄격하게 보존해왔음을 생각하면 큰 변화이다. 또한 발레웨스트(Ballet West)는 머리를 까딱거리며 파라솔을 돌리는 윌리엄 크리스튼슨의 중국 춤 버전(1944)을 용과 싸우는 중국전사가 등장하는 샌프란시스코 발레단 버전으로 교체했다. 2018년 연말에는 챈과 파즈코귄가 이끈 옐로우페이스 청원 운동이 『뉴욕타임즈』지에 소개되면서 사회적 반향을 얻으며 변화를 가속화하고 있다.41) Final Bow for Yellowface(2020)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지금까지 31개 무용단이 청원에 서명했다.

2. 왜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를 없애지 않는가?
옐로우페이스와 블랙페이스는 노골적인 인종주의의 표식으로 알려진 만큼 비판의 표적이 된다. 무용 뿐 아니라 연극, 뮤지컬, 오페라 등에서 블랙페이스를 제거하는 움직임이 가속화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요 발레단들은 좀처럼 변화하지 않았다. 2019년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이 〈라바야데어〉공연을 하며 ‘흑인어린이 춤(la danse de négrillons)’의 무용수들이 검은 전신 타이즈 뿐 아니라 블랙페이스 분장을 한 사진이 SNS에 퍼지며 비슷한 논쟁이 일었다. ABT 수석무용수 미스티 코플랜드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으나, 마린스키 극장장이 우리는 이렇게 해왔다고 응수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42) 2015년 미국 사라소타 발레단에서도 〈페트루슈카〉 드레스 리허설 때 백인 무용수가 검은 얼굴에 하얀 입술만 보이도록 블랙페이스 분장을 한 사진이 SNS에 퍼지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한편 보수적인 파리 오페라발레단에서 개혁적인 예술감독으로 부임했던 벤자멩 밀피예(B. Millepied)는 〈라바야데어〉의 블랙페이스를 없애고 ‘흑인 어린이의 춤’을 ‘어린이의 춤’으로 바꾸었다가 보수주의자들의 반대를 초래했고, 1년 후 예술감독 직에서 사임했다.43)
 이처럼 작품에 내재된 인종주의를 인정하는 것과 이를 바꾸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인종주의 발레에 대한 담론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원작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보존주의와 문제가 되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수정주의로 나눌 수 있다.
 보존주의자들은 몇 가지 논리에 따라 ‘원본 그대로’ 유지할 것을 주장한다. 첫째, 창작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원본성이 가진 신성불가침적인 가치를 존중한다는 논리이다.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중국춤과 아라비아춤 음악이 인류학적으로 정확하길 의도한 바 없다”44)고 말한 『뉴욕타임즈』 춤 비평가 알래스테어 맥컬리(A. Macaulay)가 대표적이다. 대개 무용사학자들은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를 보존하려 한다. 이는 짐짓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며 학문적 엄격함으로 해석되어 권위를 얻는다. 더군다나 2000년대 들어 춤이 개인 안무가의 지적 재산으로 여겨지면서 안무가가 아닌 이가 작품을 바꿀 역량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미쳤다.
 둘째, 시대의 산물로 보존한다는 논리이다. 당시의 문제를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지금과는 별개임을 강조하는 태도. 현재와의 단절을 통해 작품은 화석처럼 굳어졌다고 본다. 무용복원전문가 밀리센트 호드슨(M. Hodson)은 역사를 바꿀 수 없고 단점마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 작품을 제시해야 한다고 항변했다.45) 안무가 장-크리스토프 마이요(J. C. Maillot) 역시 “〈페트루슈카〉를 공연하는 것은 루브르박물관에 가서 아름다운 르노아르 회화를 보는 것과 정확히 같다”46)고 응수한다. 그러나 Black Lives Matter 시위가 휩쓴 오늘날 인종주의가 지나간 일이 아니듯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이 블랙페이스나 옐로우페이스를 종종 활용한다는 점에서 시대의 산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셋째, 예술적 가치와 윤리적 문제를 분리한다는 논리이다. 흔히 ‘미학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간의 괴리로 여겨지는 이 지점은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내재적이고 본질적인 것으로 보고 사회적이고 윤리적 문제를 외부적이고 맥락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경향이다.47) 이는 식민주의를 비롯한 구시대 작품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인종주의에 대해 침묵하는 것만큼이나 인종주의와 작품의 미적 가치를 분리하는 것 역시 인종주의 헤게모니를 지속시킨다.
 탈식민주의 학자들은 이러한 보존주의가 백인 학자들의 묵인 하에 백인 위주로 설정된 체계를 공고히 한다고 지적한다.48) 위에서 언급한 맥컬리와 마이요 모두 백인 남성이다. 학자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애써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헤게모니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특히 2010년대 이후 학문과 실천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무개입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3. 메이크업을 바꾸면 해결될 것인가?
어떻게 블랙페이스나 옐로우페이스를 해결할 수 있을까? 검은색이나 노란색 메이크업만 안 하면 될까? 많은 무용단들은 원본을 유지하면서도 노골적으로 비하적인 장치를 피할 방법을 강구했다. 예를 들어 루마니아 안무가 에드워드 클루그(E. Clug)는 볼쇼이발레단에서 세련되고 초상적인 〈페트루슈카〉를 연출하면서 무어인의 메이크업을 검은 원으로 그려 넣었다. 클룩은 신중한 해결책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미국 관객들에게 흑인 민스트럴 쇼49)로 해석된다는 점에서 다시금 볼에 검은 점을 그리는 메이크업으로 바꾸었다.50) 한편 오클랜드 발레단은 1991년 무어인을 블랙페이스 대신 블루페이스로 칠했고, 이후 샌프란시스코발레단도 이 방안을 따랐다. 인간의 피부색이 아닌 푸른색을 선택함으로써 인종적 논쟁에서 벗어나려 한 것이다.
 무용비평가 페론은 ‘아바타 해결책’인 블루페이스가 노골적인 인종주의를 걷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녀는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토론을 하며 이것이 인종주의를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애매한 장치를 통해 빠져나가지만 원래 있었던 인종주의적 비하는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에 그녀는 〈페트루슈카〉 안무가 포킨의 손녀이자 저작권 대리자인 이자벨 포킨에게 연락하여 블랙페이스를 걷어낼 것을 요청했다.51) 비평가로서 논평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행동주의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4. 비백인이 비백인 역할을 하면 해결될까?
블랙페이스와 옐로우페이스는 인종교차적 캐스팅(cross-racial casting), 즉 백인이 비백인 역을 맡는 것이 핵심이다. 〈페트루슈카〉의 초연 당시 무어인이 블랙페이스로 공연된 이유는 비백인 무용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블랙페이스와 옐로우페이스가 단지 비백인 무용수 부족에서 비롯된 현실적인 문제는 아니다. 인종교차적 캐스팅은 백인의, 백인에 의한 비백인에 대한 표상이며 여기엔 타자를 체현하고 침묵시키며 표상할 인종 간 권력 위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비백인 발레무용수가 많아지면서 흥미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피부색 캐스팅(color casting)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흑인 캐릭터를 블랙페이스의 백인이 아닌 흑인 무용수가 맡는다면 인종주의는 해결될까? 발레에서 피부색 캐스팅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1년 뉴욕에서 공연된 〈페트루슈카〉에서 흑인 남성 무용수인 랜돌프 소여(L. Sawyer)가 무어인 역할을 한 기록이 있다.52) 오늘날에도 각 발레단의 흑인 무용수가 무어 캐릭터를 맡는 경우가 있다. 1991년 버밍험로열발레단에서는 발레단의 첫 번째 흑인남성무용수였던 에반 윌리엄스(E. Williams)가, 2009년 잉글리쉬내셔널발레단에서는 흑인남성무용수 셔벌 디노트(S. Dynott)가 무어인 역을 맡았다.
 백인이 백인 역을 하듯 흑인이 흑인 역을 하는 것이 표면적으론 이상적이다. 게다가 때로는 피부색 캐스팅으로 전복적인 의미를 생성할 수도 있다. 1981년 프레데릭 프랭클린(F. Franklin)이 할렘무용단에서 〈세헤라자데〉를 재안무했을 때 조베이드와 흑인 노예 역할을 모두 흑인무용수에게 맡겨 작품의 암묵적인 초점, 즉 백인여성과 흑인남성의 성교라는 함의를 파괴시킨 사례가 있다. 또한 인도계 영국안무가 쇼바나 제야싱(S.Jeyasingh)이 인도계 무용수들로 〈라바야데르〉를 재해석한 〈아홉 번째 생(The Ninth Life)(2015) 역시 피부색 캐스팅의 전복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백인 중심적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발레에서 피부색 캐스팅만으로 타자화되고 침묵 당한 흑인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예르비넨은 피부색 캐스팅이 비백인 무용수로 하여금 인종주의적 표상에53) 공모하게 하며, 나아가 이로 인해 인종주의적 전형이 ‘진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했다.
 위에서 언급한 1931년 공연에 대한 존 마틴의 비평을 보자. 마틴은 무어인 역을 진짜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 맡는 것이 더 낫다고 논평했다.54) 소여의 춤이나 연기력과는 무관하게, 무어인은 온전한 드미-캬락테르(demi-caractère)55)이기 때문에 진정성을 가질 수 없는 백인이 명백한 연기를 통해 그럴 듯하게 흉내 내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것이다. 마틴의 구분은 배우의 실제 몸이 캐릭터의 기호학적인 몸과 구분된다고 본 피셔-리히테(E. Fischer-Lichite)의 개념과 일치한다.56) 이 논리는 무어인이 이미 행위자성과 주체성을 지닌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라 납작한 캐리커쳐임을 드러낸다.
 더욱이 오늘날의 무용수들은 피부색 캐스팅이 헤게모니를 공고화하는데 기여한다고 지적한다. 최근엔 주요 발레단에서도 비백인 무용수를 뽑지만 비공식적인 할당량이 있어 한두 명의 비백인 무용수를 뽑는데 그치는데다 홍보를 위해 활용될 뿐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57) 피부색 캐스팅은 능력에 따른 캐스팅이 아니기에 스테레오타입을 강화할 뿐 아니라 발레단 내 무용수의 입지를 제한한다. 피부색 캐스팅에 비백인 발레무용수들이 양가적 감정을 가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5. 피부색과 상관없는 캐스팅이면 해결될까?
피부색 캐스팅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한 것이 색맹 캐스팅(color-blind casting)이다. 무용수의 피부색, 젠더, 인종 등과 상관없이 가장 능력을 갖춘 적합한 사람을 캐스팅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 캐스팅(meritocratic casting)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색맹 캐스팅은 일면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보인다. 블랙페이스도, 피부색캐스팅도 모두 문제이니 아예 무시해버리자는 논리이다. 그러나 연극학자 아만다 로저스(A. Rogers)는 색맹 캐스팅이 논리적으론 중립적이고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론 주류에서 주변화된 인종적 소수자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고자 하는 의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인종 간 격차를 무시한 기계적인 공정함을 강조하는 것은 기만적이라고 지적한다.58) ‘피부색과 무관한’ 색맹 캐스팅은 그 의외성 때문에 무용수의 피부색에 주목하게 하고 전복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백인이 비백인 역할을 맡는 기존의 문제를 공고화하는 위험도 있다. ‘능력주의’라는 기계적 평등 하에 기존 제도에서 공고화된 불평등을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색맹 캐스팅이 지닌 역설, 그러니까 피부색을 무시해도 인종주의가 철폐되지 않는 한 피부색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인종주의 발레에 대한 행동주의 경향에 대한 비판을 곱씹게 한다. 앞 장에서 언급한 영국의 발레 블랙을 들여다보자. 비백인 무용수로 구성된 발레단임을 내세운 발레 블랙이 등장한 것에 대해 한 저널리스트는 이러한 단체의 존재가 문화적 분리주의를 조장한다고 역설했다.

발레 블랙과 같은 단체의 존재는 우리가 예술을 피부색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고화한다... 거의 모든 예술 형식의 역사에서 흑인과 아시아 예술가들은 주류에 진입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리고 이는 수치스럽다. 그러나 주류 극장에서의 색맹 캐스팅이 점진적인 성공을 보여주듯, 이러한 어려움은 별도의 민족적 소수자 단체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주류를 비판하고 비난하여 재능에는 민족적 경계가 없음을 인식하게 함으로서 해결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문화적 분리주의는 과거의 것이 되어야 한다.59)

 판초 역시 이러한 모순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목표가 비백인 무용수를 백인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발레의 인종주의가 사라져서 그들 단체의 존재 이유가 소멸되는 것이라 표현했다.60) 아직까지 주요 발레단에서 색맹 캐스팅이 이루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다 하더라도 인종주의가 유효한 상황에서 발레단의 존재 자체가 권익단체로서 역할을 하는 행동주의라 할 수 있다.

6.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는 피부색의 문제인가?
2010년대에 들어 여러 발레단이 〈호두까기 인형〉 중국춤의 옐로우페이스 메이크업을 제거했다. 그렇다면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인종주의는 피부색 혹은 메이크업의 문제인가? 챈은 “옐로우 페이스의 문제는 메이크업이 아니라 캐리커쳐이다”61)라고 단언한다. 챈은 캐리커처를 캐릭터와 구분한다. 캐릭터(character)가 정확한 자료에 근거하고 대상과 공감하며 입체적으로 표현하며 뉘앙스를 살린다면, 캐리커처(caricature)는 타자로 바라보며 부정확하거나 단편적인 자료에 근거하고 납작하고 과장되게 묘사한다는 것이다.62) 이에 따라 캐리커처는 대상을 과장하고, 다른 것과 구별 지으며, 부차적인 의미를 형성해내고, 관객들이 공유하는 맥락을 전제로 한다. 캐리커처는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며 비하한다.
 문제는 캐리커처가 메이크업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본, 안무, 장치, 의상 등 총체적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중국 춤에서 문제시 되었던 것은 단지 옐로우페이스가 아니라 손가락 찌르기, 총총거리기, 고개 까딱거리기 등으로 아시아 남성을 발레의 문법 속 열등한 타자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페트루슈카〉에서도 무어인은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발레의 미학적 원리에서 벗어나 있다. 내회전(turn in)한 발과 그로테스크한 움직임, 깨진 바디라인 등은 이 인물을 부정적으로 표상하고 타자화시킨다. 그래서 옐로우페이스와 블랙페이스를 걷어내고 의상을 변화시키더라도 근본적인 문제가 남는다. 비백인이 부정적인 것의 전형이 된다는 것이다.
 무어인에 대해 브누아는 “무분별하게 매력적이고 강력하게 남성적이며 부당하게 의기양양한 모든 것의 체현”이라 했고, 포킨은 “멍청하고 외향적이고 자기만족이며, 태평스럽고 운 좋은 애완동물의 의인화”했다고 회상했다.63) 또한 이자벨 포킨은 포킨이 상트페테르부르크 통근열차에서 본 과도하게 자신만만한 남자가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모습에서 따왔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듯 이는 이슬람인의 특성이라기보다는 외향적이며 과격한 부정적인 인물 캐릭터를 “보편적인 바디 랭귀지를 통해 묘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페론과 학생들의 수정 요청에 대해 이자벨 포킨은 무어인이 시대착오적이고 부적절하기에 ‘전사’ 캐릭터로 바꿀 것을 제안했다. 이런 캐릭터라면 “특정한 민족과 연관되기보다는 그의 행동에 따라 사납고 탐욕스러운 인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64)를 통해 부정적인 인물 유형과 민족/인종 간의 부당한 연관성을 인식하고 끊어낼 수 있다.

7. 무대에 올리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될까?
〈페트루슈카〉와 〈호두까기 인형〉 중에서 인종주의 논쟁이 더 큰 쪽은 후자이다. 전자는 고전으로 인정받되 드물게 공연되지만 호두까기 인형은 매년 연말이면 공연되는 인기작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관심은 후자에 쏠린다. 전자는 어차피 드물게 공연되어 영향력이 없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페트루슈카〉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발레 뤼스의 역사적 가치 뿐 아니라 포킨, 스트라빈스키, 마티스, 브누아 등 발레 뤼스 협업자들의 명성과 역사성, 고전으로서의 권위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가는 상황에서 기존에 덜 부각되었던 작품이 새롭게 발굴되는 추세이다. 〈페트루슈카〉만 해도 요한 잉에르(J. Inger, 2018), 에드워드 클루그(2018)를 비롯한 안무가들이 재해석한 바 있다.
 예르비넨은 발레 뤼스 100주년인 2019년을 기점으로 러시아에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발레 뤼스가 크게 조명 받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발레 뤼스는 러시아 외부에서만 활동한 단체지만 이제 자신들의 서사로 끌어들이려는 작업이 활발하다는 것이다.65) 이에 러시아 발레단들은 여러 작품들을 복원하고 ‘원작’을 고정시키고 있다. 작품의 역사성을 무비판적으로 경외하는 와중에 특히 인종문제에 대해 둔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게다가 발레 뤼스는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활동했기에 그 계보 역시 쉬이 확장된다. 발레 뤼스를 계승했다고 자부하는 몬테카를로발레단은 1999년 단체의 90주년을 기념하여 발레 뤼스의 〈나이팅게일의 노래 Le Chant du Rossignol〉(1925)를 복원했다. 발란신 안무, 스트라빈스키 작곡, 마티스 의상 및 무대 디자인이라는 호화로운 협업을 자랑하는 작품이니 복원에의 욕구를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아픈 중국 황제가 마법의 새의 노래를 듣고 낫는다는 안데르센 원작 동화를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 모든 무용수들이 옐로우페이스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사례는 노골적인 인종주의에 대한 논란이 고전 복원의 역사적 가치 및 무용단의 계보 전승이라는 정당성에 가려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소실된 작품이 언제든 돌아오고 좀처럼 볼 수 없던 작품이 금세 각광 받는 사례를 보면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문제 제기 없이는 인종주의가 해결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V. 결론
무용작품은 고정된 것이 아니며 멈추어 있지도 않다. 공연 때마다 새로운 관객이 새로운 의미를 새롭게 끌어낼 뿐 아니라 작품의 모습 또한 새로운 시대에 맞춰 변한다. 작품을 대할 때 고전이나 원작, 그리고 그에 한 재해석 작품을 이분법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지난 시대 작품이 지닌 문제점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예술 행동주의에 영향 받은 이들은 이러한 고정성과 본질성에 의문을 품으며 고전의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다.
 무용학자 예르비넨은 유명한 작품에 깔린 인종주의적 함의를 외면하는 것에 대해 “인식론적 폭력”66)이라고 말한다. 행동하지 않는 것이 그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행동이며, 애써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제도화된 인종주의에 공모한다는 것이다. 결국 인종주의적인 작품에 대한 성찰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이 작품들은 ‘고전’의 이름으로, 혹은 재해석이나 헌정, 모티브, 패러디의 형태로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와 인종주의를 지속시킨다.
 본 연구는 발레에서 특히 블랙페이스와 옐로우페이스의 논쟁이 활발한 〈페트루슈카〉와 〈호두까기 인형〉을 중심으로 고전 레퍼토리에서 나타난 인종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의 방식을 살펴보았다. 2010년 이후 예술 행동주의의 일환으로 고전에 대한 보존주의보다 수정주의가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학계 뿐 아니라 예술 현장에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블랙페이스와 옐로우페이스로 대변되는 고전 레퍼토리의 인종주의에 대한 다양한 대응방식에 깔린 논리를 분석해보고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블랙페이스/옐로우페이스가 피부색만의 문제가 아니며, 안무나 대본처럼 비가시적인 영역까지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메이크업을 지운다고 인종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
 발레에서 인종주의를 철폐하려는 목표를 전면에 내세운 퍼시픽노스웨스트발레단의 예술감독 엘렌 워커(E. Walker)는 “발레의 전통과 토대에 대한 참된 감사는 또한 그 끊임없는 진화를 인정하는 것이며, 이 진화하는 예술형식의 산물은 모두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67)고 말했다. 고전 발레 레퍼토리가 매년 무대를 채우지만 인종주의에 대한 담론은 부족한 우리에게도 발레를 진화하는 동시대의 예술로 바라보는 자세가 어느 때보다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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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옥희(2020년 12월), 우리가 함께 목격한 신기루, 『몸』, pp.25-27.
2) 김세용·김경희(2013),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Jean-Christophe Maillot)의 작품에 나타난 패러디(Parody)에 관한 연구:〈로미오와 줄리엣(Romeo & Juliet)〉을 중심으로, 『대한무용학회 논문집』 71(2), pp.23-46; 공혜진(2017), 매튜 본(Matthew Bourne)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나타난 패러디 양상연구, 중앙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3) 〈하드 넛〉의 중국춤에서 무용수들은 머리에 젓가락을 꽂고 나온 무용수들이 긴 손톱과 만다린 수염을 붙이고 나온다. 모리스는 “최대한 인종차별적으로 만들려 했다”며 이를 일종의 풍자로 접근했다고 회고했다. Phil Chan(2020), Final Bow for Yellowface: Dancing Between Intention and Impact. Brooklyn (NY: Yellow Peril Press), pp.77-78.
4) Brenda Dixon Gottschild(2012), Joan Myers Brown and the Audacious Hope of the Black Ballerina: A Biohistory of American Performance(New York: Palgrave Macmillan); 정옥희(2017), 흑인 발레리나의 소외 원인과 변화에 대한 논리적 탐색, 『대한무용학회논문집』 74(3), pp.157-179; Hanna Järvinen(2020), Ballets Russes and Blackface, Dance Research Journal 52(3), pp.76 – 96.
5) 김유미(2013), 유럽 현대발레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양상 : Michel Fokine, Rostislav Zakharov, Maurice Bejart, Jean Christoph Maillot의 작품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정옥희(2004), 고전발레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적 특성 연구 -마리우스 쁘띠빠의 〈라바야데르〉를 중심으로, 『무용예술학연구』13, pp.193-232.
6) Catherine M. Cole and Tracy C. Davis(2013), Routes of Blackface, The Drama Review 57(2), p.8.
7) 염운옥(2019), 『낙인찍힌 몸: 흑인부터 난민까지, 인종화된 몸의 역사』(파주: 돌배개), pp.24-30.
8) 박경태(2009), 『인종주의』(서울: 책세상), p.13.
9) 위의 책. pp.75-77.
10) 위의 책, p.71.
11) 염운옥(2019), p.6.
12) 로빈 디안젤로(2018),『백인의 취약성: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이재만(역)(서울: 책과함께, 2020), p.9.
13) 염운옥(2019), p. 73.
14) 한 방울 법칙(one-drop rule)은 미국 노예제 시절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본다는 법률에서 유래한 관점이고, 수지 길로이 핍스(Susie Guilloy Phipps)는 백인으로 살던 여성이 알고 보니 먼 조상으로 인해 흑인으로 규정된 사건이다.
15) 샤리바리는 중세 이후 유럽에서 공동체의 규범을 어긴 자에게 가하던 의례적인 처벌 행위이다. 비정상적인 결혼을 한 부부나 성 규범을 일탈한 사람들, 즉 재혼, 간통 등을 행한 사람들에게 물리적·언어적 폭력을 행사하는 관행이다. 김종목(2014.6.13.), 성일탈 등 응징… 중세 유럽 ‘비정상의 정상화, 〈경향신문〉, 〈https://bit.ly/3xbWE1J, 2021. 4. 15.〉.
16) Stephen Johnson(2012), Burnt Cork: Traditions and Legacies of Blackface Minstrelsy (Amherst: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pp.5-6.
17) M. 키벅(2011), 『황인종의 탄생: 인종적 사유의 역사』, 이효석(역) (서울: 현암사, 2016), pp.17-47.
18) Krystyn R. Moon(2005), Yellowface: Creating the Chinese in American Popular Music and Performance, 1850s–1920s (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p.42.
19) Krystyn Moon(2005), p.6.
20) Robert C. Toll(1974), Blacking Up: The Minstrel Show in Nineteenth-Century Americ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p.224-245(Harriet J. Manning(2016), Michael Jackson and the Blackface Mask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p.8, 재인용).
21) Stephen Johnson(2012), pp.1-2.
22) Catherine M. Cole and Tracy C. Davis(2013), p.7.
23) “[Negro dancer] has been wise enough not to be drawn into it, for its wholly European outlook, history and technical theory are alien to him culturally, temperamentally and anatomically.” John Martin([1963], 1970) John Martin’s Book of The Dance (New York: Tudor Publishing Company), pp.178-179(Sandie Mae Bourne(2017), Black British Ballet Race, Representation and Aesthetics, Doctoral Thesis, University of Roehampton, p.115, 재인용).
24) 흑인 무용수로는 1950년대 몬테카를로 발레 뤼스(Ballet Russe de Monte Carlo)에서 활동했던 흑인 발레리나 레이븐 윌킨슨,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의 첫 흑인 여성단원인 애나 벤 심스, 그리고 ABT의 첫 흑인여성주역무용수인 미스티 코플랜드 등을 들 수 있다. 정옥희(2017), 흑인 발레리나의 소외 원인과 변화에 대한 논리적 탐색,『대한무용학회논문집』 74(3), pp.157-179.
25) 크리스티 아데어(1992), 『춤, 여성, 그리고 남성』, 김채현(역),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 Ransay Burt(1998), Alien Bodies: Representations of Modernity, 'Race' and Nation in Early Modern Dance (London: Routledge); Brenda Dixon Gottschild(1998), Digging the Africanist Presence in American Performance: Dance and Other Contexts (Westport, CT, London: Greenwood Press); Jane Desmond(2004), Modern Dance, Negro Dance: Race in Motion (Minneapolis: th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Brenda Dixon Gottschild(2012), Joan Myers Brown & the Audacious Hope of the Black Ballerina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6) 미리엄-웹스터 온라인사전. 〈https://www.merriam-webster.com/dictionary/activism, 2021. 1. 13.〉.
27) Sanjoy Roy(2013년 9월 20일), How black dancers brought a new dynamism to British dance, The Guardian. 〈https://bit.ly/2XEN8na, 2021. 1. 14.〉.
28) William Macpherson(1999년 2월 24일), The Stephen Lawrence Inquiry, GOV. UK. 〈https://www.gov.uk/government/publications/the-stephen-lawrence-inquiry, 2021. 1. 13.〉.
29) Dance/NYC 홈페이지. 〈https://bit.ly/363vNce, 2021. 1. 13.〉.
30) Joseph Carmen(2010년 6월 29일), Exotic or Offensive?: Ballet's Outdated Stereotypes Are Overdue for Retirement, Dance Magazine, 〈https://bit.ly/39CGxz8, 2021. 1. 13.〉; Alice Robb(2014년 12월 25일), Sorry, 'The Nutcracker' Is Racist, The New Republic, 〈https://bit.ly/3nJ39TS, 2021. 1. 13.〉; Jennifer Fisher(2018년 12월 11일), ‘Yellowface in ’The Nutcraker’ Isn’t a Benign Ballet Tradition, It’s Racist Stereotyping, Los Angeles Times. 〈https://lat.ms/3sBMPaY, 2021. 1. 15.〉.
31) 정옥희(2020), 발레와 옐로우페이스, 글쓰기와 세상 바꾸기, 『무용예술학연구』80(4), pp.127-130.
32) AFP(2021년 1월 14일). Beyond blackface: Paris Opera tackles race cliches in repertoire. France 24. 〈https://bit.ly/2YaQPl3, 2021. 1. 15.〉.
33) “What is socially peripheral is so frequently symbolically central.” Peter Stallybrass and Allon White(1986), The Politics and Poetics of Transgression(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p.5 (Krystyn R. Moon(2005), Yellowface: Creating the Chinese in American Popular Music and Performance, 1850s–1920s(New Brunswick, NJ: Rutgers University Press), p.6, 재인용).
34) Wendy Perron(2020년 7월 15일), It's Time to Overhaul the Blackface (or Blueface) Puppet in Petrouchka, Dance Magazine. 〈https://bit.ly/38zhZbg, 2021.1.11.〉.
35) Hanna Järvinen(2020), Ballets Russes and Blackface, Dance Research Journal 52(3), pp.76 – 96.
36) 위의 책, p.80.
37) Wirely, R. J.(1997), The Life and Ballets of Lev Ivanov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pp.140-143( Chan(2020), p.34, 재인용).
38) Jennifer Fisher(2018년 12월 11일), ‘Yellowface in ’The Nutcraker’ Isn’t a Benign Ballet Tradition, It’s Racist Stereotyping, Los Angeles Times. 〈https://lat.ms/3sBMPaY, 2021. 1. 15.〉.
39) Chan(2020), pp.36-37.
40) 20세기 전반기에 유행한 색스 로머(Sax Rohmer)의 소설 The Mystery of Dr. Fu-Manchu(1913)에 등장한 허구인물인 푸 만추 박사의 콧수염을 지칭한다.
41) Robin Pogrebin(2018년 11월 13일), Toning Down Asian Stereotypes to Make ‘The Nutcracker’ Fit the Times, The New York Times. 〈https://nyti.ms/2z39CCs, 2021. 1. 13.〉.
42) Marshall, Alex(2019년 12월 23일), Blackface at the Ballet Highlights a Global Divide on Race, The New York Times. 〈https://nyti.ms/2QbCUqs, 2021. 1. 13.〉.
43) Lindsey Winship(2019년 11월 20일). Blackface and Fu Manchu moustaches: does ballet have a race problem?, The Guardian. 〈https://bit.ly/3oXfXHB, 2021. 1. 15.〉.
44) Alastair Macaulay(2012년 9월 5일), Stereotypes in Toeshoes, The New York Times, 〈https://nyti.ms/NRzAYE, 2021. 1. 13.〉.
45) Chan(2020), p.144.
46) “When I perform the original Petrushka, it’s exactly like when I go to the Louvre and see a beautiful Renoir painting.” Jean-Christophe Maillot. Quoted in Lindsey Winship(2019년 11월 20일). Blackface and Fu Manchu moustaches: does ballet have a race problem? The Guardian. 〈https://bit.ly/3oXfXHB, 2021. 1. 15.〉.
47) J. 월프(1983), 『미학과 예술사회학』, 이성훈(역), (서울: 이론과 실천, 1988).
48) Hanna Järvinen(2020), p.84.
49) 민스트럴 쇼(minstrel show)는 19세기 중·후반 미국에서 유행했던 코미디 풍의 쇼이다. 백인이 얼굴을 검게 분장하고 흑인 풍의 노래와 춤을 선보이며, 흑인노예의 삶을 희화화했다. 두산백과 〈https://bit.ly/3it2ViG, 2021. 1. 15.〉.
50) Lindsey Winship(2019년 11월 20일), Blackface and Fu Manchu moustaches: does ballet have a race problem? The Guardian. 〈https://bit.ly/3oXfXHB, 2021. 1. 15.〉.
51) Wendy Perron(2020년 7월 15일), It's Time to Overhaul the Blackface (or Blueface) Puppet in Petrouchka. Dance Magazine. 〈https://bit.ly/38zhZbg, 2021. 1. 11.〉.
52) Sandie Mae Bourne(2017), p.94.
53) Hanna Järvinen(2020), p.85.
54) John Martin(1931년 8월 30일), “Stravinsky’s Petrouschka” Opens the Dance Centre’s Season of Experiment – A Novel Theatre and Production, The New York Times,. p.4.
55) 드미 캬락테르 춤은 클래식 발레 테크닉에 기초한 동작을 행하는 캐릭터 춤이고, 드미 캬락테르 무용수는 캐릭터나 마임 역할을 하지만 엄격하게 고전적인 무용수는 아니다. Gail Grant(1982), Technical Manual and Dictionary of Classical Ballet (New York: Dover Publications, Inc.), 3rd ed., pp.38-39.
56) Erika Fischer-Lichite(2008), The Transformative Power of Performance: A New Aesthetics, trans. by Saskya Iris Jain(Abingdon: Routledge), p.82
57) Gia Kourlas(2007년 5월 7일), In ballet, blacks are still chasing a dream of diversity, The New York Times, 〈https://www.nytimes.com/2007/05/04/arts/04iht-swans.1.5565827.html, 2021. 4. 10.〉.
58) Amanda Rogers(2014), Asian Mutations: Yellowface from More Light to the Royal Shakespeare Company’s The Orphan of Zhao, Contemporary Theatre Review, 24(4), p.454.
59) “the existence of companies such as Ballet Black perpetuate a belief that we can categorise the arts by skin colour.....In virtually every art form there have historically been difficulties for black and Asian artists in entering the mainstream. And it has been shameful. But, as the gradual success of colour-blind casting in mainstream theatre demonstrates, these difficulties can be addressed, not by forming distinct ethnic minority outfits, but by publicly challenging and even shaming the mainstream into recognising that talent has no ethnic boundaries. Cultural separatism, surely, has to be a thing of the past.” David Lister(2014년 3월 7일), Ballet Black is a wonderful company. But it’s a shame on the arts that it still exists, Independent. 〈https://bit.ly/2NhETeP, 2021. 1. 13.〉.
60) 발레 블랙 홈페이지. 〈https://balletblack.co.uk, 2021. 1. 14.〉.
61) P. Chan(2020). p.13.
62) 위의 책, p.54.
63) A. Benois(1941), Reminiscences of the Russian Ballet, Trans. Mary Britnieva (London: Putnam, 1945), p.326; Fokine(1961), Memoirs of a Ballet Master, Trans. Vitale Fokine, ed. Anatole Chujoy (Boston: Little, Brown and Co), p.185(Järvinen(2020), p.83, 재인용).
64) Wendy Perron(2020.7.15.), It's Time to Overhaul the Blackface (or Blueface) Puppet in Petrouchka, Dance Magazine. 〈https://bit.ly/38zhZbg, 2021. 1. 11.〉.
65) Hanna Järvinen(2020), p.86.
66) 위의 글, p.86.
67) “Real appreciation for the traditions and foundation of ballet also acknowledges its constant evolution, and the product of this evolving art form needs to have room for everyone.” Ellen Walker. Quoted in Riis William(2020년 7월 15일), Pacific Northwest Ballet Strives Under the Long Shadow of Classics-Notably, Racism, South Seattle Emerald.〈 https://bit.ly/3sspzwj, 2021. 1. 13.〉


※지면 관계상 '참고문헌' 및 'Abstract'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용예술학 제82집, 2021 바로가기

2022. 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