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자유무용단 · 강미리
춤의 타자, 춤의 깊이
권옥희_춤비평가

자유무용단의 〈Exiles〉 · 〈paradise〉
춤의 타자, 춤적 실천의 확장


현대무용단 자유의 정기공연 무대에 오른 두 작품 〈Exiles〉와 〈paradise〉(부산문화회관 중극장, 9월15일). 성장이 놀라웠다. 자유무용단이 이례적으로 미나유를 객원안무자로 초청, 그의 작품 〈Exiles〉와의 만남은 자유에 부재했던 타인으로 자유가 서 있는 자리에서 ‘자유’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이 예기치 못한 만남이 매혹적인 이유는 자유의 춤적 실천의 확장과 현실의 논리를 넘어서 자유의 춤적 자유를 확보하게 된 것. 이 만남이 매혹적인 이유다.






현대무용단 자유 〈Exiles〉 ⓒ현대무용단 자유




 미나유의 〈Exiles〉. 세 남녀의 갈등과 심리를 훌륭하게 그려낸 정태민과 이언주, 안선희의 춤으로 〈Exiles〉는 무대에서 생생하게 빛을 뿜었다. 16년 전 작품이건만 빛하나 바래지 않은 〈Exiles〉, 그 자체가 춤의 원리였다. 달리는 기차 안, 나란히 앉은 남녀와 혼자인 여자. 기차의 흔들림에 남자 쪽으로 몸을 경사로 기울였던 여자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기를 반복한다. 치밀하게 재단한, 정연한 춤이다.
 남자가 마이크로 자신의 몸과 소파를 긁는 소음. 신경을 자극하고 정신을 재촉한다. 세 남녀가 춤을 춘다. 여자(안선희)가 말한다.
 “왜 그랬는지 말해줄 수 있니?” “…”
 “물이 왜 100도에서 끓는지 아니?” “…”
 “넌 누구니?” “넌 어딜 향해 가니?” “…”
 여자인지 남자인지. 누구라 지칭하지 않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벗어나 작동하는 이 무감동의 춤에서 말하는 주체와 소통주체의 새로운 관계를 본다. 그것은 볼 필요도 말할 필요도 없는 것과 보고 말할 필요가 있는 것의 경계를 반복해서 바꾸는 일이다.
 서로의 밀침 끝에 항복하듯 남자가 두 팔을 위로 들고 돌아서자 여자가 남자를 쫓고, 또 다른 여자가 상황에 합류한다. 갈등과 때로는 협력이 공존하는 춤은, 남자가 여자를 들쳐 메고 이동하면서 무대는 붉은 조명과 기타선율이 흐르는 다른 공간으로 바뀐다. 너와 나가 특정되지 않은 소통, 갈등에서 비롯된 전쟁 같은 춤은 계속되고, 저마다 춤을 추는 그 자리에서 의미를 넘나들고 에너지를 뿜어내지만 이들의 춤(삶)은 바뀌지 않는다.
 다시 처음의 구도로 앉는다. 남자에게 몸을 기대는 여자. 어깨를 내어줄 뜻이 없는 남자가 벌떡 일어선다. 미처 되돌아갈 틈을 얻지 못한 여자가 쓰러진다. 남자가 마이크로 다시 소파를 문지르고, 지친 듯 비척대며 팔을 위로 들고 추는 춤.






현대무용단 자유 〈Exiles〉 ⓒ현대무용단 자유




 〈Exiles〉에서 안무자는 3인칭이며 1인칭이며 2인칭으로 보인다. 16년 전 그때 그가 보려 하지 않았던 것을 지금〈Exiles〉에서 안무자(나)가 보는지도. 〈Exiles〉에서 안무자의 시선은 자주 황량하고, 인간을 바라보는 그의 감정은 깊기도 하고 숙연하기도 하나 풍요로운 것 또한 아닌 듯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인간에게 다가가나 하지만 거기에는 기대(기댈 곳이 없는)한 것이 없다는 것을 벌써 알고 있는 사람처럼 물러난다. 항복하듯 두 팔을 위로 쳐든 채, 마치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 어쩌면 그가 인간관계에서 미련 없이 물러나고 자리를 옮기는 것은 그곳이 싫어서라기보다 거기서 시시한 것을 보고 발견해야 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기 때문일 수도. 그는 (망명자가 아니라) 유목민이다. 마치 잘 사라지기 위해서 남게 되는 흔적, 노마드의 본질적 은유처럼.




현대무용단 자유 〈Exiles〉 ⓒ현대무용단 자유




 작품에서 무용수의 춤은 안무자가 작품으로 말하고자 하는 목적에 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욕구의 실현이다. 그 실현이 안무자가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표현할지 그렇지 않게 되든 그것은 무용수의 평소 훈련의 정도에 달려있다. 좋은 작품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춤의 사고에 안무자가 철저하게 훈련된 무용수의 춤과 연기와 그 연기의 스타일을 부여하는 이다. 앞에서 밝혔듯, 이 매혹적인 만남의 여파는 〈paradise〉로 이어진다.






현대무용단 자유 〈paradise〉 ⓒ현대무용단 자유




 안선희, 이언주, 이혜리 공동안무 〈paradise〉. 춤(몸)의 paradise에 대한 질문을 나신처럼 보이는 스킨색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느린 움직임으로 시작한 춤은 의자로 춤(몸)이 가진 욕망과 갈등을 춤으로 풀어놓는다.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이, 그것을 바라보는 이가 있다. 먼저 잡았으나 다른 이가 앉자 앉기 좋게 놓아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먼저 앉아 있는 이의 무릎에 겹쳐 앉은 이도 있다.

 현대무용단 자유의 구성원들은 모두 안무자이자 무용수다. 이들은 서로가 복제한 나를 여러 개 모아놓은 것과 같다. 단체 속의 나, 대부분은 나를 강화하지만 자주 나의 반성을 가로막기도 한다. 외부가 없기에 내부가 없는 이곳에는 나와 너와 그의 넘나듦이 실천될 자리 또한 적다. ‘자유’ 속의 나에 관해서, 춤추는 내 몸에 대해서 ‘자유’라는 우리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인 것에 관해 공동의 무지를 공유하고 있는지도. 춤의 재능은 이 무지가 인식되고 소통되는 객관적 순간에 작동한다. 믿었던 방향에 의문을 삼고, 지금 이 자리에서 추는 춤이 내내 옳은 방향인지를 묻는 무지가 바로 춤적 재능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파라다이스〉는 이 무지의 재능 속에서 그려진다. 그 무지의 빈자리에서 다른 춤(몸)을 만난다. 나에게 부재했던 타인들이 나에게 내가 서 있는 자리와 내 모습을 그려준다. 나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보는 사람이 되고 보이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춤(몸)의 〈파라다이스〉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현대무용단 자유 〈paradise〉 ⓒ현대무용단 자유




 의자가 사라진 마지막 장. 안무자와(안선희, 이언주, 이혜리) 무용수들(황정은, 하주은, 김규나, 박수인, 강선미, 임소희)의 춤에 활력이 더 붙었다. 춤(몸)의 이해도에 변화가 있는 듯. 섬세하고 분명한 춤의 표현에서 현대무용단 자유의 변화와 성장을 읽는다. 휘는 반사판이 조명을 받아 되쏘는 빛으로 춤에 에너지를 더해지고, 판을 밟아 바닥에 붙이니, 사라지는 빛으로 춤이 깊어진다. 에너지를 뿜듯 무대 위에 쏟아놓는 춤. 춤(몸)이 가 닿을 파라다이스를 이른바 전통적인 춤의 서정으로 보여준 장이었다. 감동적으로, 그리고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로.




현대무용단 자유 〈paradise〉 ⓒ현대무용단 자유




 안무자들이 가졌던 진지한 질문처럼, 본질적이고 튼튼하다고 믿었던 춤의 토대가 어느 순간 얼마나 허망하며, 그래서 존재가 얼마나 부박한가를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문제는 춤(삶)의 ‘허허로움’과 자신이 느끼는 ‘초라함’도 이 혼란 속에 있다는 것. 이 초라한 현실을 잊어버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 ‘허허롭고 초라한’ 현실 그 조건을 그대로 간직한 채 더 큰 현실로 연결되는 한 (춤이)낯선 얼굴로 나타난다. 그게 춤의 얼굴이고 힘이다.
 춤추는 이들이 갈망하고 꿈꾸는 춤추는 몸의 상태, 온전한 몸(춤)이 원하는 ‘파라다이스’는 어떤 곳일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춤은 ‘관계 속에서 평안과 휴식’을 얻고 그것이 지속될 때 온전한 춤(몸)에 이를 수 있다는. 그곳이 파라다이스라고 안선희와 이언주, 이혜리는 〈파라다이스〉를 통해 말한다. 아름답고 수려한 춤의 얼굴로.







강미리의 〈영산靈山〉
춤의 깊이, 그 전망의 자리


강미리의 춤(부산민주공원 소극장, 9월 10일) 〈영산靈山〉. 〈롱〉(弄, 2010)에서 소품 ‘월하보’, ‘춘앵’, ‘전’, ‘귀’와 〈념〉(念, 2017), 그리고 새롭게 올리는 표제작 영산(靈山) 속의 ‘문’과 도(渡). 7개의 소품을 올렸다.
 앞으로 강미리의 춤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전의 작품과 현재의 춤을 한 무대에서 확인하고 점검한 이 작업은 춤적 의지, 다짐과 다른 것이 아니다. 한국춤 뿌리에 내재된 춤의 그 깊은 자리에서 점검하는 작업은 강미리가 한국춤의 정신을 잊지 않기에 그의 가장 단단한 또 다른 춤 전망의 자리가 될 것이다.
 강미리는 자신의 춤을 올리는 곳이면 그곳이 어떤 곳이든 그 공간의 모든 것이 춤이 되게 만든다. 이번에는 민주공원의 소극장 객석 의자를 춤이 돋보이게 재배열한 뒤, 객석 바닥을 자잘한 붉은색 꽃무늬 천으로 덮었다. 꽃무리 위, 의자 위에 놓인 종이에 문자추상 ‘영산’(靈山)이 웃고 있다. 영산으로의 초대, 시적인 장치다. 관객들은 꽃무리에 앉아 ‘지도 속에 있지만 그 곳에 가면 영산은 없다’는, 그곳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언젠가 영산에 갈 때면 꽃 한송이 준비하라. 지도 밖에 떠 있는 산, 사람의 걸음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다’는 대본 속 영산. 사물을, 춤을, 사람을 시적으로 만든다는 것은 옳은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높이로 정신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다. 어떤 무대든 춤과 관객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춤을 대하는 강미리의 춤 윤리다.




〈롱弄〉 월하보(月下步)-새벽 달빛 봄을 품다 ⓒ강미리할무용단




 먼저 〈롱弄〉. 이마에 얹은 흰색의 작은 탈과 짧은 베일, 풍성하게 부풀은 치마를 입은 이혜진의 춤 ‘월하보(月下步)-새벽 달빛 봄을 품다’를 시작으로 짧은 3색 한삼과 바로크 음악에 춤을 얹은, ‘춘앵’은 전통춤 재해석의 아름다운 모범이었다. ‘전(囀)’은 글자 그대로 17세기 서양의 바로크 음악과 조선(효명)의 춤을 소리와 춤을 바꿔 얹은 작품으로 동작을 길게 늘이며 추는 춤으로 시대를 재해석 한 춤에서 안무자의 재기를 엿볼 수 있었고, ‘귀(歸)’는 돌아왔으나 다시 돌아갈 채비를 마친 듯한, 서정이 있는 춤이었다. 춤적 서정이나 춤 동작은 세대별로 경계를 짓는 것이 아니기에 좋은 춤, 즉 시대를 초월한 작품은 힘을 가진다. 필요 없는 정서를 걷어낸 롱의 작은 소품, 춤의 심미감이 상당하다.




〈롱弄〉 춘앵, 전(囀), 귀(歸) ⓒ강미리할무용단




 그리고 〈영산〉-‘문問’. 검정색 의상에 높고 꼿꼿하고 검고 아름다운 깃을 머리에 얹었다(한지은). 목에 둘러 늘어뜨린 노랑색 긴천을 엇갈리게 엮어 허리에 한 번 묶었다. 앞섶에 꽂은 부채. 거문고 소리 하나에 의지하고 추는 ‘꽃을 물고 온 새’의 단단한 춤은 아름다웠으나 검정색 의상과 비장한 춤이 주는 의미가 다소 무겁다. ‘꽃’이 ‘진리’라면, 굳이. 삶(진리)의 무게를 투명하게 삼투하는 춤이어도 좋았을 듯.




〈영산〉 문(問) ⓒ강미리할무용단




 강미리의 2017년 전통춤 〈승무〉를 재해석한 〈염念〉 은 한국춤 정신은 물론 문질(文質)의 그 미적 시선에서도 균형감이 뛰어났던 작품이다. 2021년 이혜진이 춘 〈염念〉. 여러 겹으로 접힌 청색 보자기를 한 자락씩 천천히 펼치는 춤은 마치 명상에 드는 과정 같고, 펼쳐 드러난 붉은 색 보자기를 한 쪽 어깨를 지나 반대쪽 겨드랑이에 가사처럼 묶은 뒤 추는 춤은 수행의 춤으로 보인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춤의 지루한 풀림과 상승수행의 이미지가 갈등을 일으키는 이유를 찾아야 할 듯.




〈영산〉 염(念) ⓒ강미리할무용단




 마지막 도(度), 7명이 ‘걸림 없는 바람’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어딘가를 넘어 ‘한 송이 꽃(진리)’을 피우기 위해 춤으로 길(道)을 묻는다. 주먹을 쥐고 추는 두 팔의 움직임과 고도가 높은 곳(티벳)의 음악과 다리의 깊은 굴신, 박에 맞춰 두 손 손바닥으로 보이지 않는 공간을 밀었다가 가슴으로 당기는 춤, 발바닥으로 무대 바닥을 쓸며 추는 춤은 〈염〉의 엎드린 사위에서 일어나기 전 한 쪽 다리를 뒤로 들어 발바닥을 보여주는 동작과 맥을 같이한다. 현실을 안아 올리기 위해 정신의 날을 세워 ‘진리’의 높이로 춤을 올리려는 의지다. 두 손으로 모아든 연꽃, 티벳 승려의 가사 같은 붉은 색 저고리와 바지의 형태, 여정의 무사와 안녕을 빌며 목에 둘러주는 흰색 천의 연장인 듯한 흰 저고리 동정, 그 압축된 은유들이 춤을 추켜올린다.






〈영산〉 도(度) ⓒ강미리할무용단




 엄지를 세운 주먹춤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내려 디뎌야 할 자리를 염려하지 않고 비상하듯 몸을 날려도 가 닿지 못하는, 영산은 없다. 허나 춤 〈영산〉은 춤을 추기 전의 영산과 같지 않다. 춤으로 가 닿을 수 있는 어떤 곳이 되었다. 하여 영산은 있다. 춤 ‘문問’, ‘염念’, ‘도度’로 〈영산〉에 이르는 길의 의미를 구축하였다.

권옥희

문학과 무용학을 전공했다. 자유로운 춤, 거짓말 같은 참말로 춤이 춤으로 진실(춤적 진실)을 말하는 춤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유로워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춤을 만드는 춤작가와 무용수들을 존경한다. ​ ​ ​ ​​​​

2021. 10.
사진제공_현대무용단 자유, 강미리할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