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한국춤비평가협회 선정 2021 춤비평논저상 - 최우수논문
디지털 퍼포먼스에서의 로봇 존재론 연구
한석진

Ⅰ. 서 론

Ⅱ. 인간과 기계의 존재론을 둘러싼 철학 담론
Ⅲ. 현존에 대한 퍼포먼스 담론 
Ⅳ. 디지털 퍼포먼스에서의 로봇의 현존
Ⅴ.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I. 서 론

인간의 가치와 주체를 강조하는 철학적, 윤리적 태도로서 휴머니즘은 인간의 존재 방식과 사회질서 기준을 규정했다. 특히 자유주의 휴머니즘은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존재로서 인간을 강조하고 비인간과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인간중심주의적 태도를 전제로 한다. 이러한 사고 아래 역사적으로 로봇은 서구사회 속에서 사회문화적으로 인간을 위협할 수 있는, 통제되지 않는, 위험한 타자로 인식되어 왔다. 오토마타(자동인형) 그리고 그것의 진화된 형태인 로봇은 종종 문학이나 공상 과학에서 인류를 위협하고 인간성을 상실시키며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를 침범할 수 있는 두려운 존재였다. 

 기술과의 결합을 통해 인간 주체성이 구성되면서 인간과 기계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으며, 로봇기술의 발전과 인공지능과의 결합으로 인해 로봇의 독립된 주체로서 존재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과연 인간과 기계가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질문은 포스트휴머니즘 사상이라는 지평 아래  인간 존재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재정의 하고 인간과 로봇의 계층적 구조의 전복으로 이어졌다. 

 로봇이라는 용어가 체코의 극작가 차펙의 〈로섬의 유니버설 로봇〉(1921)이라는 희곡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로봇은 공연예술에서의 오랜 관심사였다. 20세기 초 바우하우스의 오스카 슐레머가 제시한 인체의 기계적 법칙을 기하학적으로 변형시킨 ‘기계적 유기체’ 개념과 연출가 고든 크레이그가 인간 배우에게서 심리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그들의 신체를 도구처럼 사용한 ‘초인형’이 그 예이다. 이들은 무대 위 실제 로봇을 등장시키진 않았지만 로봇의 개념을 기계로서의 인간/신체 개념과 결부하여 실험하였다. 2000년대 이후 로봇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함께 실제 로봇이 무대에 출연하고 인간 공연자와 상호작용하는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로봇이 기술적 전시 또는 타자적 존재로서 볼거리에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지만 몇몇 작품들은 로봇이 지니는 자동화, 지향성, 신뢰, 취약성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동시에 로봇이 가까운 미래에 일상 속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퍼포먼스에서의 몸은 사유하는 신체와 체화된 정신을 전제로 인간 주체성을 드러내는 주된 통로로 여겨진다. 따라서 퍼포먼스에서 ‘인간이 가진 신체는 기계로 봐야 하지만 사유, 정신으로서 인간 자신은 결코 기계일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인체기계론에 저항하는 것이 자명한 일일 것이다. 퍼포먼스 예술가들이 인간 공연자와 로봇이 무대에 공존하길 원할 때, 그들은 ‘로봇과 인간이 본질적으로 다른가?’ ‘로봇과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다르다면, 이성적 사유의 유무인가 또는 신체의 차이인가?’ ‘공연자로서 로봇이 존재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로봇 퍼포먼스는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가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로봇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로봇 퍼포먼스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인간중심주의적 이분법적 시각을 전제로 하여 로봇을 인간의 우위적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도구적 활용에서 벗어나 공연자로서 로봇이 만들어내는 미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디지털 퍼포먼스에서의 로봇에 대한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면서 로봇 퍼포먼스가 담아내는 인간과 로봇의 관계에 대한 미학적, 사회문화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기계인간과 인간기계를 둘러싼 철학적 담론과 공연자의 현존에 대한 퍼포먼스 연구 이론을 조사하고 이를 바탕으로 퍼포먼스에서 로봇이 현존하는 방식을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로봇 퍼포먼스 관련 연구는 로봇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한 기술공학 또는 콘텐츠 개발 관점이 대부분이었다.1) 로봇이 등장하는 퍼포먼스를 미학적, 예술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국내 선행연구로는 오창근의 ‘기계와 로봇을 위한 안무의 유형과 방법’2), 이유선의 ‘로봇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무용공연의 발전가능성 탐구’3), 김선혁의 『발레리나를 꿈꾼 로봇: 로봇과 퍼포먼스』4), 주현식의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의 퍼포먼스 - 배우로서 로봇에 대하여’5)가 있다. 그동안의 연구는 로봇을 활용한 퍼포먼스를 다루는 연구가 매우 드문 상황 속에서 다양한 로봇 퍼포먼스를 소개했다는 의미를 지니지만 작품에 대한 소개와 설명을 중심으로 다루어져 작품 속 로봇이 지니는 의미론적 담론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제한점을 지닌다. 예외적으로 주현식의 연구는 퍼포먼스에서 로봇 배우의 현존의 개념을 다루면서 이것이 관객이 수용하는 경험을 현상학적 관점에서 심도있게 다루면서 로봇 퍼포먼스 미학을 조망했다는 측면에서 기존의 연구와 차별화된다. 본 연구는 로봇 공연자의 현존에 대한 논의를 다룬다는 점에서 주현식의 연구와 같은 맥락에 놓이지만 인간기계론과 기계인간론을 바탕으로 로봇공연자 존재에 대한 철학적 의미에 대한 탐구 역시 핵심적 연구 내용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지닌다. 

 국외의 경우 퍼포먼스, 연극, 설치미술에서 로봇을 활용한 작품에 대한 연구6)들이 이뤄졌으며 단순히 작품을 열거하며 소개하는 것 이상으로 매체미학, 철학적 관점에서 로봇의 존재론적 위치에 대한 논의로 진전되어왔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서구의 작품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디지털 퍼포먼스 학자 스티브 딕슨과 유지 소네는 로봇의 인식하는 데 있어서 서구와 동양은 문화적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들은 서구 대중문화 속 로봇은 인간 또는 인간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반면, 동양 특히 일본의 경우 만화 속 로봇 이미지에 의한 문화사적 영향으로 인간 친화적이고 귀여운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한다.7) 이렇게 서구와 동양에서의 로봇에 대한 인식이 다름을 고려했을 때 본 연구는 동양의 로봇 퍼포먼스를 분석함으로써 기존의 서구 작품 속 로봇을 바라보는 태도 및 현존하는 방식 속에서 차별화된 존재론적 관점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디지털 퍼포먼스에서 로봇이 현존하는 방식을 분석함으로써 공연자로서 로봇의 존재론적 의미를 논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황이(Huang Yi)의 〈황이와 쿠카(Huang Yi and KUKA)(2013), 히라타 오리자(Hirata Oriza)의 〈일하는 나(I, Worker)(2008), 열혈청년예술단의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2014)를 연구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위의 작품을 선정한 것은 두 가지 기준에 따른 것이었다. 먼저 로봇이 공연의 일부보다는 전반적인 주제이자 주요 공연자로 등장하는 작품일 것, 그리고 기술적 전시나 볼거리 제공이 아닌 인간 몸과 로봇기계 사이의 존재론, 현존의 문제를 논의하기에 적합할 것이었다.  

 본 연구의 주된 연구방법은 문헌연구와 작품사례분석이다. 문헌연구에 있어서 크게 세 가지 분야, 로봇의 존재론을 둘러싼 철학, 공연자의 현존을 다루는 퍼포먼스 연구, 로봇 퍼포먼스를 다룬 공연예술학 분야의 문헌자료를 조사할 것이다. 작품분석에 있어서 로봇이 작품에서 현존하는 방식을 탐구하고 이렇게 현존하는 로봇이 인간 공연자와 관계 속에서 어떠한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는지 기계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할 것이다.


 


II. 인간과 기계의 존재론을 둘러싼 철학 담론 

전통적으로 서구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져 왔다. 인간과 비인간과의 관계를 탐색함으로써 비인간과 구별되는 사유할 수 있는 우월적, 고결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위치를 공고히 해온 역사는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의 동물기계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카르트는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와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를 바탕으로 인간과 동물을 범주적으로 구별하고 동물을 기계와 동등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신체는 뼈, 신경, 근육, 혈관, 혈액, 피부로 구성되어 있는 기계이며, 신체 안에 정신이 없다면 의지로 통제되지 않을 때 계속 움직일 것이다.8) 인간 신체는 기계화될 수 있으며 인간의 본질인 이성적 영혼은 그럴 수 없다. 데카르트에게 신체는 정신이 없는 기계이기에 동물과 동일하게 분류된다.  따라서 데카르트 관점은 인간기계론이 아닌 신체기계론이자 동물기계론으로 볼 수 있다.9) 

 영국 경험주의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인간과 기계가 다르듯이 동물과 기계도 다르다고 보았으며 인간과 동물 사이에는 이성의 양적 차이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동물 역시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데 동물의 이성은 추상을 통한 관념이 아닌 감각과 관련된 관념으로만  한정된다고 주장하였다.10) 더 나아가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01~1776)은 “짐승이 인간과 마찬가지로 사고와 이성을 가졌다는 것만큼 명백한 진리는 없다”고 주장한다.11)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이성적 사고와 추론 능력 여부를 떠나 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 초점을 맞춘다. 동물은 이성적 사고가 부재하기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는 데카르트의 생각과 반대하여 동물 역시 고통을 느끼는 감각적 개체임을 주장하고 동물윤리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위의 경험주의적 철학자들의 시각에서 인간과 동물은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며 둘 다 기계와는 구별된다.   

 반면 인간, 동물, 기계를 모두 같은 범주로 보는 상반된 시각도 존재했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는 세계를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인 기계라고 보았다. 자연적 기계로서 우주, 인공적 기계로서 국가, 자연적이면서 인공적인 기계로서 인간을 제안했다. 또한 정신을 포함한 인간 역시 물질적이며 정신은 “인간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기계의 일부일 뿐”이라고 보았다.12) 쥘리앵 오프루아 드 라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 1709~1751)는 홉스의 유물주의를 계승한다. 그는 데카르트가 제시한 기계로서의 신체 개념을 수렴하는 동시에 비물질적 존재로서 영혼 개념을 부정한다.  영혼 역시도 기계로 간주하면서 물리주의 일원론을 주장하고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거부한다. 라메트리에 의하면 정신과 영혼은 형이상학적 개체가 아닌 물질이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나타나는 물리적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핵심은 행위이며 영혼이 아닌 활동과 감각경험이 생명체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물질화된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이 둘의 본질적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라메트리의 인간기계론은 급진적이고 비종교적이며 위험하여 당시에 널리 수용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버트 위너(Norbert Wiener, 1894~1964)의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 개념은 인간의 신체, 정신활동을 기계화했던 라메트리 이론을 증명해낸다. 사이버네틱스는 피드백과 정보전달에 의해 구축된 자율적이고 안정된 정보시스템을 말하며, 이는 생리학적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유기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를 자동기계와 유사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이버네틱스 개념은 이후 인공지능과 인간 뇌의 탈물질화의 핵심 개념으로 이해된다. 

  라메트리와 위너가 인간(과 정신)을 물질화하고 물리적, 기계적 현상의 결과로 간주한다면 앨런 튜링(Alan Mathison Turing, 1912~1954)은 기계를 인간화하고 생각하는 개체로 제시했다. 튜링은 컴퓨터 과학의 토대적 수학 구조인 유니버설 튜링머신을 통해 기계가 인간처럼 사유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36년 고안된 유니버설 튜링머신은 계산이나 논리조작을 순서에 따라 행하는 알고리즘에 착안하여 이를 실행하는 장치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알고리즘이 주어진다면 모든 문제를 처리, 실행할 수 있는  기계가 가능함을 보여준 것이다.  튜링은 생각이 인간만의 고유의 능력이 아니며 기계도 수행할 수 있는 물리적 기능임을 튜링머신을 통해 증명해낸다. 

 미디어 철학자인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A. Kittler, 1943~2011)는 라메트리의 유물론적 신념과 유기체론적 본질주의로부터 해방시킨 튜링머신과 사이버네틱스를 확장시킨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사유는 기술적 표준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인터넷의 발전은 인간이 기술의 반영으로 되어가는 것과 더 관련이 있다... 결국은 기계가 우리에게 적응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기계에 적응하게 된다.”13) 인간이 기술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 역시도 세상을 구성하는 물질과 여기서 비롯된 기술에 의해 정의된다고 본다. 급진적 유물론자인 키틀러는 인간 주체를 구성하고 인간 삶을 제어할 수 있는 기술의 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술결정론자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또한 정보기계로서 인간은 더 이상 사유하는 근대적 주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기술에 의해 형성될 뿐이라는 후기구조주의의 반(反)인간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키틀러의 이론은  현대 매체기술의 조건 하에서도 끊임없이 인간이 자율적으로 선택 가능하다는 자아도취적 태도에 일침을 가한다.    

 포스트휴먼 이론의 선구자적 학자인 캐서린 헤일즈(N. Katherine Hayles, 1943~)와 키틀러는 초기 정보 이론에 대한 비판적 독해라는 동일한 시작점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키틀러와 마찬가지로, 헤일즈는 모든 기초를 이루는 물질적 맥락, 조건, 실천으로부터 정보를 분리시킬 수 있다는 초기 정보 이론과 사이버네틱스의 전제에 의구심을 표한다. 하지만 키틀러와 헤일즈는 인간 신체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차이점을 보인다.  키틀러는 인간을 정보기계로 간주하고 인간과 기계를 구별 짓지 않기에 인간 신체라는 생물학적 토대를 고려하지 않는다. 키틀러는 “미디어 시대는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기계인지 구별을 불가하게 만든다”14)고 언급하면서, 인간 신체가 계속 존재할지라도 그것 자체의 행동주체적(agentic) 힘이 아니라 기술의 구성 또는 영향으로 다뤄질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헤일즈는 인간이 포스트휴먼으로 존재할 때 정보를 물질적 세계에 가져오는 물리적 신체의 실천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녀는 인간이 기계가 된다거나 기계가 인간처럼 되는 것을 논증하지 않는다. 체화된 상태의 인간은 기계와 다르다고 간주하고 물질성과 정보의 끊임없는 상호전달을 통해 포스트휴먼의 주체성이 구성된다고 주장한다.15)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과 기계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위치를 설명하는 시각은 변화를 거듭해왔다. 자유주의 휴머니즘 아래 정신이 부재한 인간의 신체를 기계 또는 동물과 동일시 하는 태도부터 인간, 동물과 같은 유기체와 기계를 분리시키는 태도, 인간우월주의를 벗어나 인간, 동물, 기계 모두 물리적 현상의 결과로서 동등하게 보는 관점, 정신의 물질화와 기계의 인간화를 증명해내는 시도, 물리적 신체와 정보기술의 혼합으로 구성되는 인간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시각, 그리고 인간이 기술에 의해 종속된 인간기계론의 극단적 입장까지 등장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구 철학을 지배했던 인간, 이성, 정신중심주의적 사고가 흔들리고 있으며 인간의 우월성, 자율성에 대한 나르시시스트적 관념은 해체되었다. 

 공연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인간을 강조하고 공연의 본질로서 살아있는 공연자의 관객의 시공간적 공유를 절대적으로 믿어온 공연예술은 위와 같은 변화하는 시각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동시대 퍼포먼스에서 로봇은 기계의 인간화를 증명하는 시도를 통해 본질주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도전하지 않는다. 로봇이 얼마나 감정과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지, 물리적 능력을 뛰어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대신 로봇의 다양한 현존 방식을 통해 공연의 현존에 대한 전제, 공연자로서 인간의 개념을 재고하고 성찰하도록 한다.

 


Ⅲ. 현존에 대한 퍼포먼스 담론 

살아있는 공연자의 행위를 시공간적으로 공유하는 살아있는 관객이 경험할 때 그 속에서 상호간에 오고가는 에너지와 생동감은 공연의 핵심이자 본질이라고 여겨지며 이는 현존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곤 한다.16) 연극학자 코맥 파워(Cormac Power)에  의하면 연극학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현존이라 하면 “직접성(Immediacy), 자발성(spontaneity), 친밀성(intimacy), 생생함(liveness), 에너지(energy), 배우의 현존(the presence of the actor)”이라고 할 수 있다.17)  그렇다면 로봇이 공연자로 출연하는 퍼포먼스의 경우 현존의 양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퍼포먼스에서의 현존감이 인간 공연자의 자발적이고 현상학적인 몸을 전제로 한다면 로봇의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몸의 현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퍼포먼스 연구를 중심으로 논의된 현존의 개념은 보다 유연하고 다중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2000년 이후의 미디어 퍼포먼스, 장소특정형 퍼포먼스, 뉴다큐멘터리 연극, 설치미술 등의 작업들은 공연자와 관객의 직접적 관계와 현재성에 기인한 현존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현장과 더불어 학계 역시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관점을 토대로 하여 절대적이고 자기충족적 의미로서 현존이 허상임을 지적하고 현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모색했다. 매개된 현존의 가능성, 부재하는 현존에 대한 지각, 기억과 흔적의 추적 또는 기록의 재연(reenaction)을 통한 현존, 현존하는 주체의 정체성, 관객과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통한 현존 등을 다루는 21세기의 현존 담론에서 생산보다 수용이 가지는 의미가 중요해졌으며 현존의 수행성, 타자성, 다층성이 강조되었다. 이와 같은 해체적 개념의 현존은 로봇 퍼포먼스가 현존하는 방식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개념적 근거가 된다. 

 이렇게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현존 개념이 동시대 공연에서 왜 중요해진 것인가? 현존은 연극학을 중심으로 20세기 후반 이래 활발하게 논의되었다. 이러한 논의가 시작된 계기는 텍스트 위주의 기호학적 의미에서 벗어나서 비재현적이고 물질성을 강조하는 연극이 많아지게 되면서부터였다. 물론 이전에도 현존에 관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8세기부터 20세기 초 연극에서의 현존은 배우의 재현적 연기에 기인하여 설명되었다. 연기, 연출, 무대미술, 의상 등 연극의 요소들이 초월적 기표를 재현하고 특히 배우가 희곡 속 허구 인물을 실감나게 구현하는 방식을 통해 현존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파워는 실제가 아닌데 실제인 것처럼 연기하는 현존의 ‘허구적 방식(fictional mode)’를 ‘현존하게 만들기(Making-present)’라고 명명한다.18)

 20세기에 들어서 아돌프 아피아(Adolphe Appia), 고든 크레이그(Edward Gorden Craig), 앙토넹 아르토(Antonin Artaud), 예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 등과 같은 연출가들은 희곡을 바탕으로 절대적 기표를 재현하는 연극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중에서도 아르토와 그로토프스키는 허구적 환영을 만들어내지 않고 무대 위의 몸과 물질성을 통한 연극의 현존을 만들어내려고 했다. 비재현적 공연을 추구하면서 초월성을 가진 아우라적 현존감을 발현하는 것은 ‘현존 가지기(Having-presence)’라고 볼 수 있다.19) 

 1950-60년대 네오아방가르드 연극이나 이후 퍼포먼스 작업에서 추구되는 ‘현존하기(Being-present)20)는 앞서 성취된 현존과는 차별화된다. 연극적 환영을 만들거나 물질성을 통한 초월성을 발현하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공연자와 관객이 한 공간에 있는 ‘거기에 있음(being-there)’을 의미한다. 재현적, 비재현적이 아닌 실제적 현존 개념을 강력하게 피력한 학자는 에리카 피셔 리히테(Erika Fischer-Lichte)였다. 그녀는 퍼포먼스의 미학이 공연자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현존(bodily co-presence)과 공연의 물질성에 기반함을 강조했으며. 연기자와 관객 사이의 창발적(emergent) 관계와 여기서 발생하는 변형의 힘을 수행성 개념을 바탕으로 설명했다.21)

 위의 ‘현존하게 만들기’, ‘현존 가지기’, ‘현존하기’는  근본적으로 현재성, 시공간성, 관객과의 공동현존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현존의 조건은 21세기 이래로 필립 오스란더(Philip Auslander)를 비롯한 여러 퍼포먼스 연구 학자들에 의해 회의의 대상이 되었다. 오스란더는 라이브니스(liveness)를 공연의 본질이자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여기고 공연자와 관객의 신체적 공동현존에 의해서만 충족될 수 있다는 주장에 반박하였다.22) 미디어가 삶 속에서 침투해있는 사회에서  라이브 공연과 매개된 공연이 가지는 현존감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본다. 물질성과 현재성을 근거로 한 라이브 공연의 에너지와 힘이라는 허상을 쫓고 있음을 지적한다. 

 가브리엘라 지아나치(Gabriella Giannachi)와 닉 케이(Nick Kaye)의 저서 『현존 수행하기(Performing presence)(2011)에서 현존의 개념을 재고하고 미디어 퍼포먼스에서의 매개화된 현존 방식을 고찰한다.23) 후설, 하이데거, 레비나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현존의 현상학적 개념을 탐구하면서 데리다의 해체적 의미를 이미 내포하고 있음을 말한다. 현존은 그 자체로 완성되고 통일되는 것이 아닌 차연과 지연을 통해 기호화되어 존재함을 수행한다고 지적하면서 미디어 퍼포먼스 작품 속 매개된 대상이 어떻게 현존하는지를 분석한다. 파워는 역시 연극이 현존을 보여주는 방식은 현상학적, 실제적 측면으로만 설명될 수 없으며 텍스트로서, 기호화된 측면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질적 현상이 기호작용의 의미화와 함께 작용하면서 현존이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임을 강조한다.24) 

 살아있는 공연자와 관객 사이에서 일어나는 직접성, 현재성을 기반으로 한 본질화된 절대적 현존을 벗어나면서 현존은 더 이상 어떤 고정된, 환원적인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고 있다. 연극에서의 현존은 현상학적 세계와 재현의 허구적 세계가 결합되어 긴장관계를 형성하고 이러한 현존이 지니는 모호성, 이중성을 유희하게끔 한다. 이러한 해체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로봇 퍼포먼스는 현존감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며 현존을 수행하는 방식 역시 다양할 것이다. 예를 들어, 퍼포먼스에서의 로봇의 현존은 인간과 유사하게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음을 증명해내거나 로봇 퍼포머가 얼마나 허구적 캐릭터를 잘 재현해내는가, 즉 재현적 방식으로 성취될 수 있다. 비재현적으로 초월적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비재현적 접근이 될 수도 있으며 실제 그자체로 존재하여 수행하는 실제적 접근이 될 수도 있다. 또는 시공간적 차이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등장하는 복수성과 타자성을 지닌 해체적 현존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존은 로봇의 실제 그 자체의 현상학적 경험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니는 기표로서 작동하고 의미화하는 것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발현될 것이다.  

 


Ⅳ. 디지털 퍼포먼스에서의 로봇의 현존

본 장은 연구대상으로 선정한 세 작품, 황이의 〈황이와 쿠카〉(2013), 히라타 오리자의 〈일하는 나〉(2008), 열혈청년예술단의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2014)를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로봇이 현존하는 방식을 현상학적 측면과 기호학적 측면의 상호관계 속에서 탐구할 것이다. 다음으로 작품 속 로봇의 현존이 제기하는 존재론적 의미를 기계철학 이론을 바탕으로 논의할 것이다.  

 

1. 황이 〈황이와 쿠카〉(2013)

대만 안무가이자 무용수인 황이는 작품 〈황이와 쿠카〉에서 로봇을 자신의 춤 파트너로 삼는다. 그의 파트너는 황이 자신이 프로그램한 산업로봇인 쿠카이다. 로봇은 모든 방향으로 돌아가는 오렌지색의 팔 한쪽 모양을 하고 있다. 안무가는 쿠카의 유동적이고 미끄러지는 듯한 움직임에서 인간 움직임과의 유사성을 발견하여 쿠카를 선택하였다고 전한다.25) 

 안무가가 열 살이었을 때 부유했던 부모님이 파산하고 면적 12㎡의 방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그는 완벽한 자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26) 그는 부모님에게 복종하고 친절하며 뛰어나고 사려 깊으며 반항하지 않는, 마치 성격을 가지지 않는 로봇처럼 되기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했다. 성격과 감정을 지우고 스스로를 로봇화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에서 로봇에게 영혼을 부여하려고 했던 것 역시 황이였다. 그는 코딩 기술과 안무적 감수성을 활용하여 규격화된 쿠카에게 다양한 움직임과 성격을 부여하고자 했다. 쿠카는 안무가의 자아(ego)를 드러내는 동시에 황이가 어린 시절동안 갈망했던 충성심이 있고 이타적인 친구로서 일본 만화 캐릭터 로봇을 반영했다. 무용수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쿠카는 그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호기심, 그와 맞춰나가려는 파트너십, 그를 살피고 염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다. 

 공연은 관객이 무대 위를 거의 식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다. 어둠 속에서 짙은 색 정장을 입은 황이가 맞은편 쿠카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첼로 음악 선율이 울려 퍼지고 두 파트너는 작은 손전등으로 공간과 서로를 비춘다. 둘이 마주했을 때 쿠카 움직임의 타이밍과 형태에서 주저함과 긴장감을 감지할 수 있다. 깜깜해진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가 비출 때 둘은 서로를 따라하고 탐색하며 서로에게 다가간다. 황이가 팔을 공중으로 뻗을 때 쿠카는 그 움직임을 따라한다. 황이가 쿠카를 향해 기댈 때 쿠카는 금속 팔로 그를 받쳐들어 지탱해준다. 앞뒤로 부드럽게 흔들고 속도가 느려졌다가 빨라지는 쿠카의 움직임에서 근육질의 우아함이 느껴진다. 황이가 바닥에 쓰러질 때 쿠카는 초록색 빛 레이저로 그에게 도움을 준다. 관객은 이 둘의 상호간에 주고받는 시선, 호기심, 의심, 우정을 상상할 수 있다. 로봇의 바닥에 스티커가 보여주듯, 산업 영역에서 쿠카에게 근접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이와 쿠카가 마지막에 서로 닿았을 때 관객은 그들의 진정성 있는 정서적 교류와 공감을 느낄 수 있다. 

 약 한 시간 동안 유기체와 기계의 교감을 보여준 후 이어지는 작품의 마지막 8분은 이전과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두 명의 남녀 무용수가 등장하여 마주보고 앉아 마치 자동기계가 된 듯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발레 작품 〈코펠리아(Coppélia)〉의 기계인형과 같이 그들은 감정과 자유의지가 부재한 상태로 보이며 마치 기계처럼 관절을 꺾어 동작을 분절시키면서 천천히 움직인다. 그들 뒤에 앉아 있는 쿠카는 붉은 색 빛 레이저로 그들 사이의 공기를 가로 지르고 마치 그들의 동작을 조정하고 통제한다. 쿠카의 레이저 포인터는 두 무용수를 일으키고 안게 만들며 떨어뜨려 놓는다. 

 〈황이와 쿠카〉에서 로봇은 사람과 교감이 가능한 감정을 가지는 존재로서 재현된다.  마치 처음 누군가를 마주해서 조심스럽게 다가가고 호기심을 표현하고 서로가 의지하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재현적 방식의 현존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러한 로봇의 환영적 행위에 의미와 감정을 부여한다.  라메트리와 위너가 영혼이 비물질적인 존재가 아니고 물리적 조직의 현상이자 결과라고 말했듯이, 작품은 쿠카가 자신의 성격과 감정을 보여주면서 기계가 영혼을 가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더 나아가 튜링이 기계도 인간과 동일하게 지적인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쿠카의 인지적, 학습 능력을 암시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쿠카가 메트로놈 작동법과 탱고 추는 법을 관찰하여 성공적으로 이해한다는 장면에서 그러하다. 공연 중반에 무용수가 로봇의 머리 쪽에서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하여 그 영상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무대 뒤편 스크린에 투사한다. 관객들은 로봇의 시선으로 로봇, 무용수, 공간, 그리고 객석의 자신들을 경험하게 된다. 쿠카가 감정과 인지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디오 이미지를 보면서 로봇이 자기인식을 하고 타인과 외부 환경을 지각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관객뿐만 아니라 안무가 역시 유사한 마음을 가진다. 황이는 한 공연에서 리허설 시간이 끝날 때까지 쿠카가 작동하지 않다가 마침내 정상으로 돌아와 무대 위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무대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고백하고 “그 순간 나는 모든 것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쿠카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27) 그 순간만큼은 실제로 쿠카는 안무가가 심적으로 의지하고 믿고 따르는 존재였던 것이다. 

 공연 대부분의 장면 속에서 기계의 인간성을 부각시킨다면 남녀 무용수와 쿠카가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인간의 기계화를 보여준다. 기계가 다른 개체들을 지배하는 권한을 갖는 반면 두 무용수는 완전히 제어당하고 자신의 의지, 사고, 영혼 없이 존재한다.  무용수들의 뒤에서 그들을 제어하는 쿠카의 존재는 키틀러가 제시한 인간 주체성을 구성하는 기술의 힘을 암시한다. 키틀러가 기술결정론적, 반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주장했듯이, 쿠카는 인간이 소통하고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에 머무르지 않으며 자율적이고 행동주체적이며 인간의 사고와 주체성을 구성하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표현된다. 

 〈황이와 쿠카〉는 기계가 감정을 교감하고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존재로 진화하여 인간과 동등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 가능성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기계가 인간의 투입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다른 기계와 구상하고 소통하는 것을 배우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만들어나갈 때 인간 삶을 결정짓는 힘까지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과정 속에서 로봇은 인간과 교감하는 영혼을 가진 존재이자 인간 주체를 지배하고 결정하는 존재로서 재현되면서 안무가의 기계에 대한 양가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안무가는 인간중심주의적 패러다임 아래  인간의 좋은 친구이자 동반자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정복자로서 로봇의 잠재력과 위험을 드러내고 있다.  

  

2. 히라타 오리자 〈일하는 나〉(2008)

일본의 현대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히라타 오리자는 ‘현대구어연극’을 주창한다. 서양연극을 수입하여 교육받은 일본의 근대연극이 지니는 무대언어의 이질감 그리고 구어와의 간극을 넘어서기 위함이었다. 그의 연극론은 배우의 연기론과도 일맥상통한다. 히라타는 배우의 자연스러운 연기를 위해서는 불필요한 움직임인 ‘마이크로 슬립(micro-slip)’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8) 마이크로 슬립이 제거된 기능과 목적에 충실한 움직임을 행하면 오히려 덜 자연스럽고 덜 리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로봇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히라타는 로봇전시회나 박람회에서 단순히 로봇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로봇을 바라보는 정서적 간극을 좁히기 어렵다고 말한다. 히라타의 극단 세이넨단과 로봇 공학자 이시구로 히로시 교수의 오사카 대학 로봇 연극프로젝트가 지속적인 협업 활동을 하게 된 것도 여기서 기인하였다. 이시구로의 연구 핵심인 “어떻게 하면 로봇이 인간사회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은 로봇에게 마이크로 슬립을 프로그램하여 자연스럽고 리얼한 움직임으로 변모시키는 히라타의 연출법으로 해결법을 찾아나가게 되었다.29)

 2007년 이래로 극단 세이넨단과 오사카 대학 로봇연극프로젝트는 협업을 시작하여 “로봇이 지금 이 시점에서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 분명한 기술을 마치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에 착수하였다.30) 휴머노이드 로봇 와카마루를 사용한 〈일하는 나〉(2008), 안드로이드 로봇 제미노이드F를 사용한 〈사요나라〉(2010), 그리고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 로봇이 등장하는 〈세 자매〉(2012), 새로운 안드로이드 로봇을 선보인 〈변신〉(2014)까지 이어지고 있다.

 1미터의 휴머노이드 로봇 와카마루(WAKAMARU) 2개(또는 2명)와 배우 2명이 등장하는 〈일하는 나〉는 2008년에 초연된 작품으로 약 30분 동안 공연된다. 마야마 유지와 이쿠에 부부의 집에 남성 목소리의 다케오와 여성 목소리의 모모코라는 로봇이 함께 살고 있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그려낸다. 작품 내내 그들에게는 특별한 사건이나 상황이 설정되지 않는다.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유지가 우주과학에 관한 엉뚱한 질문을 계속 던지고 다케오가 질문에 답변하는 식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모모코가 준비한 밥을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이쿠에가 들고 무대에 등장하고 부부는 다소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한다. 이후 로봇과 인간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 속에서 로봇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인간과 로봇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작품 속 대화를 통해 관객은 몇  가지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첫째는 생산과 재생산 노동 능력과 관련된 인간과 로봇의 유사성이다. 다케오는 자신이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임을 인지한다. 하지만 회로에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일을 하려는 의지가 없는 상태임에 답답함을 드러낸다. 유사하게도 유지 역시 일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데 다케오와는 달리 유지는 자신이 일을 하지 않고 있음을 개의치 않아한다. 이 둘은 어떤 이유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지만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유사성을 보인다. 이쿠에와의 대화 속에서 모모코가 무심코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서둘러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장면이 있다. 정확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이쿠에와 유지가 아이를 가질 수 없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과 로봇의  본질적 차이를 만드는 것이 인간의 재생산 능력이라고 간주되나 작품 속 인간과 로봇 모두 재생산이 불가하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불분명해진다. 

 둘째, 인간과 로봇의 대화 속에서 로봇이 감정을 지니는 동시에 인간의 감정을 유추하고 반응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케오는 괜찮다는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운 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이 일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장면과 일하기 싫은 자신의 상태의 이유를 찾지 못해서 답답해하며 자리를 피하는 모습에서 로봇에게도 감정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로봇은 왜 이런 것을 물어보나요 라는 말을 하지 않느냐”라는 유지의 말에 다케오는 “자신이 그렇게 물으면 인간이 화나지 않을까요?”라고 답변하는 장면, 이쿠에와 유지 사이의 냉랭한 기류가 흐르자 다케오가 자리를 피해주려고 하는 장면, 유지가 일하지 않음에 속상해하는 이쿠에에게 다가가 위로해주는 다케오의 모습 등에서 인간의 감정을 관찰하고 느끼며 그에 맞는 행동을 취하거나 공감해주는 로봇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대로 유지는 이쿠에가 외출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헤아려 주지 못하고 다케오를 엉뚱한 방식으로 위로해주는 등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섬세하게 배려해주지 못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는 인간이 오히려 로봇보다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 부족함을 보여준다.

 셋째, 작품 속 로봇은 인간의 감정을 파악할 수 있지만 로봇의 감정은 인지할 수 없음을 명백하게 언급한다. 모모코가 이쿠에에게 말하길, 로봇은 인간에게 세심하게 신경을 쓰도록 프로그램 되어 있는데 로봇을 신경 쓰도록 되어 있지 않아서 다케오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말한다는 장면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다케오는 “노을을 보고 예쁘다고 느끼는 것은 누구랑 같이 보니깐 좋다고 느끼는 것”임을 이야기하면서 그렇기에 로봇끼리는 노을을 보고 예쁘다고 느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는 그렇게 진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 속에서 앞으로 로봇간의 감정 인지가 가능한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공연이 끝난다. 

 작품 속 로봇의 움직임은 무대 주위로 설치된 센서에 의해 감지되어 오퍼레이터에 조종된다. 마이크로 슬립을 이용하여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기를 수행하고 이를 통해 마치 의식과 감정을 가진 존재처럼 인지하게끔 한다. 마치 인공지능 기술을 바탕으로 사람의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감정인식 로봇인 소프트뱅크의 페퍼31)처럼 존재하는 듯한 환영을 만들어낸다. 더 나아가 로봇이 수행 가능한 영역을 제한되고 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로봇과의 담화 및 행동 속에서 그 둘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산과 재생산의 가능 여부는 인간과 로봇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으며, 로봇은 스스로의 감정을 가지는 능력이 없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감정을 느끼고 있는 듯 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인간의 감정을 추론하여 그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으며, 작품 속에서 오히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정 공유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더 ‘인간적’인 반응을 보여준다. 즉 작품 내내 로봇의 감정과 의식 가능성을 내포하는 환영을 만들어내면서 영혼과 감정 모두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물리주의 일원론 입장을 취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인간과 로봇을 재현하는 물리적 일원주의는  연출가가 가지는 인간 배우와 로봇 배우를 접근하는 태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히라타는 극단 세이넨단 배우들에게 슬픔과 기쁨과 같은 감정을 표현해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대사 사이의 시간차를 조절하는 등 물리적인 수치로서 지시를 내린다. 이것은 연기자의 감정이 내면에서 어떻게 나오는지가 아니라 밖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32)

 

히라타 오리자에 있어서 ‘로봇연극’이란, 말하자면 ‘현대구어연극’을 보다 순화시킨 것, 일종의 이상형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배우에게 마음은 필요없다”. “배우는 로봇도 충분히 할 수 있다”라는 발언을 되풀이해온 그는, 바로 그 ‘로봇’이라는 시도를 통해, 스스로의 이론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자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33)

 

 히라타에게 있어서 인간 배우와 로봇 배우의 존재론적 차이는 없다. 연극에서 인간 배우와 마찬가지로 로봇 배우를 통해서도 관객은 감동을 할 수 있으며, 이 둘이 연기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지시를 내리면 된다고 본다. 

 

3. 열혈청년예술단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2014)

연극과 무용을 넘나들며 다원예술작업을 실천하고 있는 열혈청년예술단의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는 2010년부터 연작으로 공연해오던 ‘불안하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연극 속 연기와 비연기, 무대와 비무대, 허구와 실재 간 경계를 불안하게 오가는 〈불안하다〉(2010)를 시작으로 연극적 환영이 만들어지는 방식을 유전, 진화 등의 소재로 다루는 〈불안하다 ver.02 – 인어이야기〉(2011)로 이어졌다.  〈불안하다 ver .03- 텔레파시 이야기〉(2012)에서 배우의 진정성 있는 연기를 둘러싼 허구적 믿음을 뇌과학 관점에서 폭로한다면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에서는 배우로서 로봇의 존재가능성을 통해 반론한다. 예술감독 윤서비는 ‘불안하다’ 시리즈에서 연극을 둘러싼 전통적 관념을 해체한다. 무대 위 연극의 주지라고 믿어지는 연기의 진정성을 성찰하고 무대에서 현존하는 몸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궁극적으로 연극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한다. 네 번째 작품을 기점으로 ‘불안하다’ 시리즈는 ‘로봇을 이겨라’ 로 이름을 변경하여 본격적으로 로봇을 둘러싼 철학적, 사회문화적 담론을 다루기 시작한다. 

 ‘로봇을 이겨라’ 3부작은 각각 ‘연기’, ‘정의’, ‘사랑’을 주제로 하지만 시리즈를 관통하는 시각은 ‘인간’을 바라보는 포스트휴머니즘적 태도이다. 이 시리즈는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인간의 영역으로 침투해오는 기계의 공격에 대항하여 자신의 우월성 또는 고유성을 천명하고자 하는 인간의 바람을 보여주고 그 안에 내재된 절대적 관념, 모순, 부조리를 역설적으로 폭로한다. 이를 위해 인간과 기계를 대립적 구도로 설정하는데 기계가 얼마나 인간과 유사하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이 기계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재고하고 기계와 인간의 분명한 경계를 흔들어놓는다. 

 ‘로봇을 이겨라’ 시리즈 1편인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에서 로봇 배우가 등장하는 미래를 상정하여 배우는 로봇으로 대체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배우들은 각자의 연기론을 설파하는데 이때 로봇은 도달할 수 없는 인간 배우가 수행하는 연기의 진정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거꾸로 연극계의 관습적 훈련법, 구태의연한 시각을 반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속옷만 입은 한 남성이 올려진 이동식 조리대를 요리사 복장의 남성이 끌고 나오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식탁 위 배우는 자신의 이름이 이종민이라고 밝히고 허구적 인물이 아닌 실제적 인물로서 관객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마치 음식 재료처럼 고정된 자세를 취하고 요리사는 그의 몸에 양념을 바르고  물을 뿌리는데 조리대 아래에는 물이 끓고 있다. 관객이 자신의 진정한 연기를 맛볼 수 있도록 즉물적 신체로부터 나온 육수를 짜낼 것이라고 말한다. 공연 내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연기를 절대적 신념으로 간주하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하거나 내재된 모순을 드러내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핑계로 자행된 폭력적 관습을 폭로한다. 한편 연기는 감정이나 정신과 무관한 물리적 현상으로 보는 대조적 주장을 과학적 논거를 바탕으로 펼친다. 감정은 신경 전달 물질에 의한 결과이고 연기는 진실성 있는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술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본다. 분노, 공포, 슬픔 등을 생리학적 관계 속에서 설명하고 이러한 감정표현은 신체의 물리적 원리를 바탕으로 할 때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로봇의 존재를 통해 인간의 진정성 있는 연기는 더 노골적으로 풍자된다. 예를 들면, 매 맞는 로봇인 ‘매봇’에 압력센서가 내장되어 있어서 외부로부터 물리적 충격을 받으면 로봇이 그에 대해 반응한다. 한 남성 배우가 상체 석고상 형태의 매봇을 때리면  매봇과 연결된 스크린 속의 인물이 말을 하고 행동을 취하는 식이다. 남성 배우는 진정성 있는 연기가 행해져야 할  신성한 무대 위에서 감히 로봇이 가짜 연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며 화를 낸다. 하지만 이후 그 배우에게 물리적 충격이 가해졌을 때 나오는 반응 역시 허구임을 드러냄으로써 배우가 말하는 연기의 진정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공연 중반쯤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연기와 눈물보조수단인 양파나 티어스틱을 이용한 눈물연기를 구별할 수 있는가를 배우들에게 실험하는 인터뷰 영상을 보여준다. 그 결과 대부분이 진짜 연기를 찾아낼 수 없었음을 말하면서 마음 속 우러나오는 눈물연기가 진정성 있다는 믿음은 허구에 불가함을 증명한다. 두 여성 배우가 등장하여 특정 대사를 연기할 때의 안구움직임, 얼굴움직임, 팔다리 EMG, 목소리 주파수 대역을 분석하여 연기력을 평가하는 액팅 코치 ‘액코’를 관객에게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연기력을 평가한다고 하지만 정확한 평가가 가능한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드러내면서 로봇은 연기력을 계량적으로 측정하여 데이터화하여 평가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로봇의 등장으로 탈신화화된 배우의 연기론은 ‘포스트액터(post-actor)’의 등장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무대 위 배우가 기계적 도움으로 신체적 제약을 넘어설 수 있을 때 연기자에게 요구되는 신체적, 인지적, 정서적 능력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모셥 캡쳐로 만들어진 영화 〈아바타〉 속 나비족이나 〈반지의 제왕〉의 골룸과 같은 캐릭터 혹은 완전히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된 가상 캐릭터에게 요구되는 진짜 연기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 주체가 도구로서 기술을 활용했던 수준을 넘어 인체의 물리적 한계를 기계를 통해 극복하는 트랜스휴먼 혹은 기계의 신체 개입 여부를 떠나 인간 주체성이 기술에 의해 구성되는 포스트휴먼까지의 진화 과정을 통해 인간은 탈경계적인, 탈인간중심주의적 방식으로 정의된다.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는 이러한 포스트휴머니즘적 시각을 배우에게 적용한다. 완벽한 연기라는 피상적이고 비현실적 목표, 배우에게 요구되는 인격 수양과 진실한 경험이라는 구태의연한 관습, 마음을 다하는 연기라는 허구적 관념을 타파하고 낡은 휴머니스트 개념을 벗어던지고 포스트액터가 될 것을 외친다.  

 작품에 등장하는 로봇들은 한독미디어대학원대학교 확장미디어스튜디오와의 협업을 통해 공연 내용에 맞는 맞춤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앞서 소개된 매맞은 로봇 ‘매봇’, 액팅 코치 ‘액코’  뿐만 아니라 연기의 진정성을 판별하는 ‘진정이’ 로봇, 무대와 객석을 돌아다니면서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영상을 투사하는 작은 로봇 등이 등장한다. 이들은 작품 속에서 어떤 인물이나 행동을 재현하지 않는다. 설정된 프로그램에 따라 반응을 생성해내는 식이다. 심지어 액코의 경우는 공연 이전에 관객이 경험하게끔 하지만 무대 위에서는 배우의 연기를 평가하는 기능을 실제로 수행하지 않는다. 공연에서는 액코는 사실상 실행되지 않기에 부재한 상태이며, 직접 실행해본 관객으로 하여금 이전 경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거나 상상하게끔 하여 존재할 뿐이다. 또한 포스트액터를 제시할 때도 실제 포스트액터가 무대 위 실존하는 방식이 아닌 영상과 이미지를 통한 매개된 현존을 보여준다. 공연 속 로봇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이 연기를 하지도 않으며 아우라적 현존감을 발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로봇은 실제 그 자체로 존재하거나 부재로서 현존함으로써 배우의 재현적 현존감이라는 절대적 관념을 깨뜨린다.

 로봇의 실제적 현존과 부재를 통한 현존을 오고 가면서 연극의 신성화, 연기의 진정성 문제를 폭로하는 작품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는 인간중심주의적 태도뿐만 아니라 기술결정론자 태도 역시 견제하고 있다. 대신에 인간의 감정이 비물질적 작용이 아니라 신경 전달 물질의 반응에 따른 것이라는 유물론자적 태도와 기계와 인간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고 기계를 인간 신체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포스트휴머니즘적 태도 등을 보여줌으로써 결국은 로봇을 통해 인간, 신체, 연극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답하고 있다. 

 


Ⅴ. 결론

 본 연구는 디지털 퍼포먼스에서 로봇이 현존하는 양상을 살펴보고 작품 속 인간과 기계의 존재론적 관계에 대한 기계철학적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서 먼저 공연자로서 로봇의 존재를 분석하는 유용한 이론적 토대로서 데카르트의 인체기계론부터 라메트리의 인간기계론을 거쳐 키틀러의 매체론와 헤일즈의 포스트휴먼론을 포함한 전통과 현대철학에서의 기계 담론을 살펴보았다. 서구 철학에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는 인간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인체기계론, 인간기계론, 기계인간론, 정보기계론과 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됨을 확인하였다. 

 더불어 퍼포먼스 연구 관점에서 공연의 현존을 둘러싼 18세기와 현재까지의 미학적 담론을 살펴보았다. 18-19세기를 거쳐 배우의 연기를 중심으로 한 재현적이고 환영적 현존에서부터 20세기 초 비재현적이고 아우라적 현존으로 이어지고 20세기 중반 이래로 실제적 또는 수행적 현존으로 확장되었다. 21세기에 이르러 현존은 공연자와 관객 사이의 직접성, 현재성을 기반으로 한 절대적 현존 개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시공간적 차이와 다양한 맥락 속에서 등장하는 타자성과 다중성을 지닌 해체적 현존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된 현존은 물질적, 감각적 측면의 현상학적 경험과 기표로서 의미화 작용을 통한 해석의 상호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된다고 본다.

 앞서 논의된 인간과 기계의 존재론에 대한 철학적 접근과 현존에 대한 퍼포먼스 연구 이론을 바탕으로 황이의 〈황이와 쿠카〉, 히라타 오리자의 〈일하는 나〉, 열혈청년예술단의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를 분석하였다. 그 결과 〈황이와 쿠카〉에서 로봇은 인간과 감정을 교감하고 이성적 사고가 가능한 개체로서 재현되면서 기계도 감정과 이성적 사고를 소유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동시에 기계에 의해 인간 주체가 지배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동반자이자 정복자로서 로봇의 잠재력과 위험을 동시에 드러낸다. 〈일하는 나〉속 로봇 역시 쿠카와 유사하게 마치 의식과 감정을 가진 존재처럼 인지하게 만드는 환영을 만들어낸다. 작품 속 로봇들은 생산과 재생산 노동에 있어서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있으며, 감정적 교류에 있어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면서 인간과 로봇을 본질적으로 차이를 두지 않는 물리주의 일원론적 입장을 취한다. 〈불안하다 ver.04 - 로봇을 이겨라〉에서의 로봇은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감정과 의식을 가진 존재로서 재현되지 않으며 어떤 인물이나 행동을 연기하지도 않는다. 다양한 종류의 로봇은 입력된 프로그램을 실행하면서 그 자체로 실존하거나 관객의 기억 또는 매개된 방식으로 존재한다. 실제 그 자체와 부재를 통해 해체적 방식으로 현존하는 로봇은 연기하는 배우와 병치되어 진정성 있는 연기와 배우의 재현적 현존이라는 허구적 관념을 폭로한다. 세 작품은 로봇이 존재하는 방식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단순히 인간과 기계의 대립적 구조를 재현하는 것을 벗어나서 이성과 감성을 지닌 우월한 존재로서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타파하고 인간과 동등한 개체로서의 로봇의 가능성과 새로운 인간 개념의 재구성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급진적 변화를 목도하면서 공연예술학계 전반에서 예술현장 및 예술교육 현장의 변화 양상을 진단하고 전망하는 다양한 담론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연구자가 다양한 학술적 담론의 장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점은 인공지능, 로봇, 가상/증강 현실과 같은 변화하는 기술을 수용할 때 예술가와 학자가 드러내는 태도가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에서 머무르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가상적, 기계적 존재와 마주하는 시선에 있어서 인류의 존재론적 위치를 침범하고 신체가 기계로 대체될 것이며 비윤리적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드러내면서 경계하는 태도가 지배적이었다. 공연(학)계의 경우, 신체가 기계화되면서 공연예술이 존재할 곳이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기계화된 사회에서 결국 인간의 본질로 회귀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가장 인간적인 예술로서 공연예술은 살아남게 될 것이라는 안도감과 동시에 결국 기계는 고도로 발전된 형태의 유기체인 신체를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려이든 안도이든 이러한 공연(학)계 반응은 인간이 기계보다 우월하거나 우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본 연구는 기계를 수용하는 태도에 있어서 인간과 기계의 위계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신체에 대해 재질문하고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재규정하는 방향으로 확장시키는 로봇 퍼포먼스 작품을 분석함으로써 국내 로봇 퍼포먼스 담론의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자 했다. 작품사례에서 드러나는 기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태도는 공연계 현장에서의 기계, 로봇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본다. 공연예술가의 기계에 대한 인식론적 변화는 작품에서의 기계의 존재론적 위치, 공연자로서의 가능성, 기계가 현존하는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미학적 태도, 접근을 가능케 할 것이다. 

 

─────────────────────────

1) 이동욱, 이호길, 김홍섭, 박현섭(2009), 연극공연을 위한 휴머노이드 로봇의 HRI 기술, 『한국지능시스쳄학회 학술발표 논문집』19(2), pp.101-103; 

   안호석, 이동욱, 최동운, 이덕연, 허만홍, 이호길(2012), 공연 로봇을 위한 로봇의 동작 구성 프로그램, 『제어로봇시스템학회 국내학술대회 논문집』4, pp.101-103; 

   서현곤, 김지환(2014), 모션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한 로봇공연시스템 개발, 『한국정보학회논문지』 19(12), pp.21-29; 

   최태용, 도현민, 박동일, 박찬훈, 경진호, 김두형(2016), 산업용 양팔로봇을 이용한 공연예술 구현 사례,『로봇학회 논문지』11(4), pp.293-299; 

   황희수(2016), 공공장소에서 공연을 위한 휴머노이드 로봇 공연 시스템,『한국산학기술학회논문지』17(3), pp.190-196. 

2) 오창근(2015), 기계와 로봇을 위한 안무의 유형과 방법, 『우리춤과 과학기술』28, pp.9-24.

3) 이유선(2010), 로봇 테크놀로지를 활용한 무용공연의 발전가능성 탐구,『대한무용학회논문집』64, pp.153-168.

4) 김선혁(2009), 『발레리나를 꿈꾼 로봇: 로봇과 퍼포먼스』(파주: 살림).

5) 주현식(2017),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의 퍼포먼스 - 배우로서 로봇에 대하여,『드라마연구』52, pp.89-120. 

6) Steve Dixon(2007), Digital Performance: A History of New Media in Theatre, Dance, Performance Art, and Installation(London, England and Cambridge, Mass: The MIT Press); 

Machines in Australian Dance Theatre’s Devolution, Brolga, An Australian Journal About Dance 3(1), pp.8-17;  

   Jennifer Parker-Starbuck(2013), Animal Ontologies and Media Representations: Robotics, Puppets, and the Real of War Horse, Theatre Journal 65(3), pp.373-393; 

   Jonathan Bollen(2009), Maybe We’re Not Human: Translating Actions and Affects Between Humans and Eric C. Mullis(2015), Performing with Robots: Embodiment, Context and Vulnerability Relations, International Journal of Performance Arts and Digital Media 11(1), pp.42-53.

7) Steve Dixon, 2007, pp.285-287;  

   Yuji Sone(2008), Realism of the Unreal: the Japanese Robot and the Performance of Representation, Visual Communication 7(3), pp.345-362.

8) 르네 데카르트(1982), 『방법서설/성찰/정념론/철학의 원리』, 김형효(역)(서울: 삼성출판사), p.95.

9) 진중권(2015), 기계 속의 유령: 인간기계론의 역사, 『제5회 기술미학포럼 〈인간, 기계〉 발제자료』, pp.1-7.

10) John Locke(1824),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Vol.1.(New York: Valentine Seaman), p.156.

11) David Hume(1826), The Philosophical Works: David Hume(London: Black and Tait), p.232.

12) Carl Schmitt(2008), The Leviathan in the State Theory of Thomas Hobbes(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34.

13) Stuart Jeffries(2011. 10. 21), Friedrich Kittler obituary, The Guardian, 〈https://www.theguardian.com/books/2011/oct/21/friedrich-kittler, 2020. 01. 16〉.

14) Friedrich Kittler(1999), Gramophone, Film, Typewriter, Geoffrey Winthrop-Young & Michael Wutz(trans.)(Standford: Standford University Press), p.146.

15) Katherine Hayles(1999), How We Became Posthuman: Virtual Bodies in Cybernetics, Literature, and Informatics(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288.

16) 김방옥(2015), 연극에서의 현존,『한국연극학』57, p.6.

17) Cormac Power(2006), Presence in Play: A Critique of Theories of Presence in the Theatre, Unpublished Ph.D. Thesis(University of Glasgow), p.3.

18) Ibid., p.18.

19) Ibid., p.55.

20) Ibid., p.96.

21) Erika Fischer-Lichte(2004), The Transformative Power of Performance(London: Routledge), pp.38-137.

22) Philip Auslander(1999), Liveness: Performance in a Mediatized Culture,(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3) Gabriella Giannachi & Nick Kaye(2011), Performing presence: Between the Live and the Stimulated(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4) Cormac Power(2006), pp.16-17.

25) 『황이와 쿠카』(팜플렛), 2017 셀스테이지 기획공연(서울: 한국콘텐츠진흥원), p.6.

26) 앞의 글, p.6.

27) Yenlin Cheng(2017. 12. 12), My Dance Partner Is Not A Human,   Common Wealth Magazine, 〈https://english.cw.com.tw/article/article.action ?id=1759, 2020, 01, 02〉.

28) 히라타 오리자(2017), 로봇연극의 개념과 의의, 『한국예술연구』16, p.79.

29) 앞의 글, p.81.

30) 앞의 글, p.81.

31) 일본의 주식회사 소프트뱅크가 개발하여 2015년 2월부터 판매된 인공지능 로봇 페퍼는 사람의 표정이나 목소리 상태를 분석해 감정을 추정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고객 접대용 로봇으로 사용되고 있다. 

32) 앞의 글, p.93.

33) 앞의 글, p.93.

 

※지면 관계상 '참고문헌' 및 'Abstract'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용예술학 제81집, 2021
바로가기

 

2022. 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