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춤의 화환(花環)속에 온 세계를
뜰을 거닐면서(3)
이순열_본 협회 공동대표

 봄을 기다리면서 아직도 한기에 떨고 있는 메마른 대지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 얼어붙은 땅에 이 봄에도 새싹은 돋아오를 것인가? 인간이 이렇듯 매연을 뿜어내고 살충제와 농약을 뿌려대면서 땅을 갈기갈기 할퀴고 있는데도 봄이 오면 새들은 다시 노래하고 개울에는 다시 물이 흐를까? 카아슨*¹이 우려했던 것처럼 봄은 영영 침묵 속으로 얼어붙어버리지는 않을까?
 날씨가 조금 풀리는 듯 하다가 추위가 다시 몰아닥치기를 거듭하더니 어느새 4월이다. 엘리어트가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가장 잔인한 달’이라던 그 4월이다. 언 땅에서 라일락을 자라게 하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무딘 뿌리를 봄비로 설레게 하는 4월이 어찌 잔인하지 않으랴. 추위에 떨면서 봄꿈을 꾸고 있었던 겨울 나그네는 언제나 소용돌이치는 봄이 두렵다. 그래서 ‘망각의 눈으로 뒤덮인 겨울’이 차라리 따스할 수 밖에 없다. 허나 엘리어트의 4월을 낳게 한 초서의 4월*²은 축복으로 가득차 있다.

    4월이 오면,
    감미로운 소나기 뿌려
    가뭄에 메말랐던 대지 흠뻑 적셔주고
    산천초목에 젖줄을 대어 온갖 꽃을 피게 하느니......

 천의 얼굴로 우리를 설레게 하는 4월, 비가 오다가 한풍이 몰아치면서 눈으로 변해가는 궂은 날씨, 봄 냄새를 살짝 풍기다가 겨울로 다시 역행하듯 냉냉한 4월 2일, 국립 오페라단이 공연한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구경했다. 우리집 뜰 한 구석에 마련된 우주무대에 견준다면 보잘 것 없는 무대이기는 하지만...... 「라 보엠」은 크리스마스 이브, 추위에 떨고 허기로 휘청거리면서도 4월을 꿈꾸는*³ 젊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오페라는 모든 것을 얼어 붙게 했던 불만의 겨울*⁴, 그 혹독한 풍경을 따스하고 환한 눈으로 감싸 꽃피운 봄꿈, 겨울에 꿈꾼 4월의 이야기이다.
 19세기의 프랑스에는 샤또브리앙*⁵이 뿌린 로망띠즘의 기운이 팽배해 있었다. 뭔지 모를 불안에 떨면서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기다리고 있는, 시선은 미지의 땅 (Terra incognito)을 갈구하면서도 가슴은 잃어버린 고향으로 기울고 있는 디아스포라(diaspora)들 - 그것이 로망띠즘에 절은 주민들의 표정이었고, 그런 풍토가 환상 교향곡을 낳게 했다.

 “오라, 오라. 소용돌이치는 폭풍이여 어서 오라!”

 그렇게 외쳤던 샤또브리앙처럼, 안에서 들끓는 격정의 격랑 속에서 침몰해 가면서도 도취의 배 (bateau ivre)에 열광하는 에떼로또삐의 디아스포라 - 보헤미안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휘몰았던 방황의 물결은 19세기 말 이탈리아에도 밀어 닥친다. 그리고 거기서 태어난 것이 푸치니와 레온카발로의 오페라 「라 보엠」이다.
 푸치니에게 「라 보엠」의 소재를 제공해주었던 것은 프랑스의 작가 뮈르제*⁶의 단편집 「보헤미안들의 생활풍경」(Scènes de la vie de Bohème. 1861)이었다. 그 작품을 바탕으로 「토스카」, 「마농 레스꼬」등에서도 푸치니와 협력했던 일리까(Luigi Illica)와 지아꼬자(Giuseppe Giacosa)가 공동으로 대본을 써서 1893년 작품이 완성되었고, 1896년 초연의 지휘를 받은 것은 29세의 또스까니니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라 보엠」은 파리의 라틴구*⁷에 살고 있었던 가난하지만 꿈 많은 젊은이들 - 부르디외(Pierre Bourdieu)류로 이야기한다면 경제적인 자산은 없어도 꿈의 자산(Dream Capital)은 누구 못지 않게 풍성한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그런 이방인들을 19세기 사람들은 보헤미언(Bohemian 또는 Bohème)이라 불렀다. 보헤미아라는 말은 원래 켈트족을 가리키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기원전 2세기 경,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인들과 다투다가 패퇴한 켈트의 지족(支族)을 로마인들은 보이에뭄(Boihemum)이라 불렀고, 그들이 지금의 체코 서부에 보헤미아 왕국(Regnum Bohemia)을 세워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해 왔으나, 19세기에 이르러 소멸되어, 그 종족은 유럽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무렵부터 체제에 순응하거나 인습에 얽매이기를 거부하고 모험을 즐기면서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헤미아족이라 불렀고, 마침내는 자유분방한 예술가를 지칭하는 말로 굳어졌다.
 이 오페라는 영어권에서 간혹 보헤미언들(The Bohemians)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되기도 하지만,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라 보엠」이라는 프랑스 이름으로 통하고 있다. 어느 기자가 푸치니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프랑스 소설이 모태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인데 왜 굳이 프랑스식으로 라 보엠인가? 라 트라비아타도 프랑스의 소설에서 싹텄지만, 프랑스식의 ‘동백아가씨’ (La Dame aux Camelias) 대신 이탈리아풍의 새로운 이름을 붙이지 않았는가?” 그 물음에 대한 푸치니의 대답은 이랬다. “프랑스 말의 향기 때문에, 라 보엠이라야만 라 보엠의 향기가 살아나기 때문에.”
 무대를 제대로 음미할 줄도 모르는 무리들이 어쩌다가 로열 박스에 앉아 있기도 하지만, 무대를 참으로 사랑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천정 꽤 높은 층의 싸구려 객석을 차지하게 된다. 그곳을 영어로는 갤러리(gallery)라고 하고 프랑스 말로는 천국(paradis)라 한다. 하늘에 좀 더 가까운 곳이기는 하지만, 싸구려 관람석을 ‘천국’으로 격상시키는 그 재치, 거기서 풍겨나는 것도 프랑스 말의 향기일 것이다. 싸구려 다락방, 그 월세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는 옥탑방에 살고 있는 「라 보엠」의 주인공들, 그들 또한 ‘천국의 아이들’*⁸(Les Enfants du Paradis)이다.
 「라 보엠」을 오페라의 겨울 나그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라 보엠」이 「겨울 나그네」의 격조와 깊이를 지녔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두 작품 모두 얼어붙은 겨울에 그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면서도 그 혹독한 추위 속에 따스한 봄꿈이 있다.
 이 오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아리아는 말할 것도 없이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일 것이다. 그리고 막이 오르면서부터 곳곳에서 뭉글거리는 그 주제 선율은 이 오페라의 열쇠이기도 하다. 미미의 그 찬 손을 녹여주겠다고 훈기를 풍기면서, ‘오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가씨’(O'soave fanciulla)를 노래하는 로돌포의 숨길에 가득차 넘치는 그 서정성의 향기, 얼어붙었던 모든 가슴을 환하게 피어 오르게 하는 그 따스한 훈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왔던가.
 그러나 동토(凍土)의 봄꿈도 조만간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결핵을 앓고 있었던 미미에게는 각각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옥조여온다. 그러자 친구들은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그들이 지녔던 가장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내놓는다. 비록 낡았지만,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막아주던 외투와 결별하면서 콜리네가 부르는 ‘외투의 노래’는 가난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나눔의 정이 물씬거려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그러나 친구들의 그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미미는 마지막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다. 그런 미미에게 로돌포는 ‘여전히 새벽처럼 아름답다’ (Bella come un`aurora)고 말하지만 모든 것은 이미 ‘낙조처럼’ (come un tramonto) 적적하고 서글프다.
 참으로 소중한 것은 언제나 덧없이 사라져간다. 얼어붙은 계절에 녹여주어야 할 싸늘한 손을 찾았으면서도 그 손은 언 땅에서 시들어간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바치고서라도 간직하고 싶었던 꿈이 꺼져간다. 그 절박함 속에서 로돌포는 피를 토하듯이 외친다. 미미 ------ 미미------
 아, 이렇듯 가슴이 갈기갈기 찢길 수가...... 그 공동, 그 텅 빈 심연으로, 우리 모두의 그 무덤 위로 얼어붙은 막은 내린다.
 그러나 구겨진 4월의 계절, 객석 밖으로 발을 옮기면, 보헤미언들의 봄꿈이 새벽 하늘의 오로라처럼 우리들의 가슴을 다시 훈훈하게 녹여줄 것이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허나 극광(極光)으로 빚어진 오로라의 춤이 얼마나 눈부신 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춤추며 날아오르자. 손에 손을 맞잡고, 온 세계를 춤의 화환(花環)으로 엮어가자.

  

   * 1. 봄의 침묵 (Silent Spring 1962년)은 무분별한 살충제의 남용, 극심한 환경오염, 자연의 참담한 난도질 등
      생태계의 교란이 지구를 영원한 침묵과 파멸로 휘몰고 가고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하려는 Rachel Carson의
      역작이었다.

    2. Geoffrey Chaucer의 The Cantebury Tales : Prologue

    3. 여주인공 미미가 시인 로돌포를 처음 만났을 때 부르는 아리아 ‘ 사람들은 나를 미리라고 불러요’(내 이름은 미미)
      에서 미미는 4월의‘첫 키쓰는 저의 것이예요’(il primo bacio dell`aprille mio) 라고 노래한다.

    4. 불만의 겨울 (winter of our discontent) : 셰익스피어의 Richard Ⅲ세 1막 1장
      Now is the winter of our discontent/ Made glorious summer by sun of York.

      Richard Ⅲ세의 이 독백은 너무 널리 회자되어 John Steinbeck은 그 외 마지막 소설 제목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또 겨울이 유난히 추웠던 1979년에 영구의 노동조합이 혹한을 무릅쓰고 벌인 대규모 파업사태를 영국언론은
      ‘Winter of Discontent'라 칭했다.

    5. Rene Chateaubriand (1768-1846) : 프랑스 낭만주의 선구자

    6. 뮈르제 (Henri Murgerㆍ1782ㆍ1861) 가난한 독일계 이민 2세 작가.

    7. 라틴구(Quartier latin) : Ecole Normal Superieur, Schola Cantorum, College de France 등 유서 깊은
      대학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다. 중세에 이곳에서는 주로 라틴어가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구역’ 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보헤미언들은 파리에서 라틴구 이 외에 몽빠르나쓰나 몽마르트에 몰려 있었다.

    8. 2차 세계대전중 독일군의 검열을 받으면서 제작된 Marcel Carne 의 작품. 1999년 프랑스 비평가들은 영화의
      역사를 더듬으면서, 이 작품을 ‘역사상 최고의 영화’로 선정했다.
      삐에로로 등장하는 장 루이 바로의 마임 하나만 보기 위해서라도 이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
      마임이 이렇듯 우리의 가슴을 뒤흔들어 눈물 범벅으로 만들 수 있다니 ......

2012.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