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춤이라는 단 하나의 화살로 춤의 과녁을 꿰뚫으려 하지 말아라.
뜰을 거닐면서(5)
이순열_본 협회 공동대표

 봄에서 여름으로 철이 바뀌면서 봄꽃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집 조그만 뜰에는 이제 여기 저기 여름 구절초가 지천으로 하얗게 너울거린다. 그래도 그 사이 사이에 꿀꽃, 초롱꽃, 금계국, 한련화, 자주 달개비 등이 섞이고, 봄꽃의 여운도 여전히 내 눈에서 어른거린다. 그래서 구절초의 물결치는 하얀 춤이 더욱 돋보인다. 아무리 조촐한 뜰이라지만, 구절초 밖에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단조로울까. 우리 얼굴에서 눈, 코, 입, 귀 등이 하나로 통일되어 버린다면 참 볼품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 오직 춤이 있을 뿐, 다른 꽃은 모조리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기막힌 춤꾼이고, 춤 식구라 한들 다양한 세계와 무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춤 관련 세미나 같은데 가보면 오직 춤 타령, 온통 춤 이야기뿐이다. 그 서슬 퍼런 일편단심이 기특하고 갸륵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기 그지없다. 우리의 주제가 춤이거늘 어쩌란 말인가? 그렇게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춤은 춤이다.’고 우길 것이다. 그러나 벌들은 ‘꿀은 꿀이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꿀은 ‘모든 것’이다. 좋은 꿀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서라면 벌들은 그 연약한 날개로 아무리 먼 곳이라도 찾아간다.
 
 두 점 사이의 가장 먼 거리는 직선(The longest distance between two points is the straight line.)이라고 예부터 일컬어져 왔다. 그렇다면 춤에서 춤으로 직선을 고수하면서 골목길의 배경을 모조리 놓쳐 버린다면 우리의 주제인 춤은 오히려 그 모습이 왜소해지거나 흐려져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코울리지¹ 는 건망증이 심해서 강연하기로 약속된 날짜를 까맣게 잊기 일 수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대해 강연하기로 되어 있었던 어느 날도 그 건망증 소동이 또 벌어지고 말았다. 청중이 모여 기다리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도 코울리지는 나타날 조짐이 보이지 않아 주최 측에서 이 곳 저 곳으로 그를 찾으러 보냈다. 템즈 강가에서 산책하고 있는 그를 모셔와서 오랜 기다림 끝에 강연은 시작되었고, 청중은 기다린 보람이 있어 코울리지의 명강의를 듣게 되나 보다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한참 진척되었는데도 그날의 주제인「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청중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코울리지선생께서 여기 오기 전에는 오늘 강연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더니, 이제는 오늘 강연의 주제를 잊어버린 모양이지.” 그러자 청중석에 있었던 찰즈 램² 이 주변 사람들에게 속삭이듯이 이야기했다.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 중이야.” 코울리지는 횡설수설,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방황하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그 모든 우회로는「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향해 있었다.
 코울리지의 강연에 대해 찰스 램은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얼핏 듣기에는 아무런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화살들이 어쩌면 그렇듯 여러 방향에서 한결같이 과녁을 향해 날라와 그 한복판에 꽂힐 수 있는지, 그의 운궁술은 참으로 놀라왔다. 가히 신궁(神弓)의 경지였다.”
 한 때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거리의 약장수가 약을 팔 때면 약을 끄집어들고는 그 첫 마디가 으레 “이 약으로 말 할 것 같으면 영등포에 자리잡은...”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약장수 조차도 약을 내밀기 전에 간단한 마술을 부린다든가 북을 치면서 깽깽이를 켠다든가 하는 재주로 우회로를 택한다. 그런데 적지 않은 강단을 더럽히고 있는 이른바 명강의, 명강연 중에는 그 우회로의 은근함조차 생략하고 곧 바로 ‘이 약으로 말할 것 같으면’이라는 최하급 약장수의 패턴을 취하기 일수이다.
 춤의 진수에 이르려면 우리는 수많은 우회로에서 방황하고 그 마력에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림에, 건축에, 시에, 음악에 그리고 또 보들레르³ 에게 귀를 기울여 보자. 그는 「취하다」는 산문시에서 이렇게 읊조린다.

 

끊임없이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이 그곳에 있다. 우리의 어깨를 망가뜨리고, 우리를 땅바닥으로 깔아뭉개는 시간의 짓누름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쉬지 않고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무엇으로 취한단 말인가? 술로, 시로, 덕으로, 구름으로, 종소리로, 꽃으로, 향기로, 흐르는 개울로... 무엇이든 좋으니 그저 취하라......


 내가 춤식구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춤이라는 단 하나의 화살로 춤의 과녁을 꿰뚫으려 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취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은데도 화살 하나 만을 달랑 거머 쥔 채 춤이라는 단칸방에 갇혀 버린다면 우리는 망망대해의 외딴 섬으로 표류할 수밖에 없다.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For Whom The Bell Tolls)를 얼핏 듣기에는 제법 그럴듯하게 들려도 그 제목이 터무니없는 오역이라는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스페인이 독재자에게 짓밟히면서 내전으로 휘몰렸을 때, 먼 이역 땅의 청년들이 그 해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그 어느 것도, 그 아무도 혼자 외따로 떨어져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너의 굴욕이 나의 굴욕이고,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며 너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라는 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그래서 한 나라가 악랄한 독재자의 독수(毒手)에 할퀴고 독아(毒牙)에 깨물리고 있을 때 그들을 해방시키려고 이국 청년들은 목숨을 내던진다.
 제목과 함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 개념도 헤밍웨이는 존 돈(John Donne.1572-1631)의 글(Devotion upon Emergent Occasions 중 Meditation XVll)에서 따왔다. 그 글의 내용은 이렇다.

어느 누구도 저 홀로 온전한 섬 일 수는 없으니, 무릇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이니라. 단 한줌의 흙이 바다에 씻겨 내려간다 해도 유럽은 그 만큼 작아질 것이며, 바다에 면한 곶(岬)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다 해도 그렇고, 네 벗들의 땅이나 네 땅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니라. 누가 죽어도 내 생명 또한 줄어들기 마련이니, 그것은 나도 인류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가 죽었다고 조종(弔鐘)이 울리는지 알려 하지 말아라. 그 종은 바로 네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니까.
No man is an island, intire of it selfe, every man is a peece of the continent, a part of the maine : if a clod be washed away by the sea. Europe is the lesse, as well as if a Mannor of thy friends or thine owne were : any man's death dianinishes me, because I am involved in Mankinde ; And therefore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⁴

 존 돈의 글 흐름에서도 분명히 들어나 있듯이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아니라 ‘누구 때문에 종은 울리나’ 또는 ‘누가 죽었다고 울리는 종인가’이다. 모든 땅이 그리고 바다가 서로 맥이 통하고 너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듯이 모든 예술은 서로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배우고 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않는가’라고 공자는 이야기 한다. ‘나날이 그림 하나를 감상하고, 시 한편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춤도 추고 보낼 수 있으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괴테는 그러게 이야기한다.
 메디치 가문의 딸들 - 카테리나와 마리아가 프랑스에 발레를 이식했다고 흔히 (특히 무용계에서는)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 된 생각이다. 메디치의 딸들은 발레와 함께 피렌체의 요리를, 미술을, 음악을, 건축을, 시를 그리고 단테를 , 페르라르카를 , 부르넬레스키를, 도나텔로를, 미켈란젤로를, 보티첼리를, 라파엘을, 다 빈치를 춤 속에 함께 녹여 그 모든 것을 프랑스에 이식했고, 춤 하나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 프랑스의 대변혁, 새로운 변신을 초래한 씨가 되었다. 디아길레프 또한 발레 뤼스(Ballet russes)만으로 프랑스를 정복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바구니 속에는 러시아의 음악, 러시아의 미술, 러시아의 문화가 충만해 있었다.
 ‘한 우물을 판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한 우물 속에도 갖가지 광물질이 함께 녹아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내 춤에는 춤 이외의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함이 전부라고 우기지 말아라.
 안드레아 팔라디오, 가우디, 프랑크 게리, 렘 콜하스, 렌조 피아노, 올레 스히렌, 올레 불, 코렐리, 스트라이히, 에리크 싸티, 모딜리 아니, 키리코, 세잔느, 칸딘스키, 렘브란트, 루벤스, 아르보 페르트 따위는 내 신성한 춤 우물에는 얼씬도 할 수 없다고 대못을 박아서는 안된다.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이 쏟아져 내리도록 가슴을 활짝 열어 놓자. 그리하여 온갖 예술을 불러 모아 손에 손을 맞잡고 출렁대는 대원무, 온 우주를 춤으로 엮는 강강술래로 드높게 날아오르자.


 

註1. Samuel Taylor Coleridge(1772-1834) : 영국의 시인, 비평가, 철학자. 호반 시인(Lake Poets)중 한 사람.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Kubla Khan 등의 시를 남겼고, 철학적이고 명상적인 自傳 biographia Literaria는 19세기 이후 영국의 지식층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Shakespeare 연구가로도 명망이 높았다.
註2. Charles Lamb(1775-1834) : 영국의 수필가. Essays of Elia, Tales from Shakespeare 등의 저서를 남겼다.
註3. 너무나 널리 회자되는 Baudelaire의 「취하라」(Enivrez­vous)하는 산문시는 Il faut etre toujours ivre. Tout est la!'로 시작된다.
註4. 이 글은 원해 산문으로 쓰였으나 근래에는 시의 형태로 행을 바꾸고 철자도 근대식으로 고처 애 송되고 널리 읽히고 있다. 가령 intire→entire, peece→piece, maine→main, selfe→self, lesse→less, owne→own 등이다. 그리고 원문에서 never send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를 시에서 흔히 쓰는 식(I don't know→I know not)으로 send not to know로 고쳐져 쓰이고 있다.

2012. 0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