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책을 읽지 마시오.Ⅰ
뜰을 거닐면서(9)
이순열_본 협회 공동대표

Tabla Rasa

 연일 눈이 내린데다 한파가 몰아닥쳐 우리 집 뜰에도, 앞산에도 온 천지를 뒤덮은 눈이 수북이 쌓여있다. 눈은 tabla rasa, 모든 것이 지워진 백지처럼 언제나 황홀하다. 그러나 조만간 그 눈은 녹고 말 것이다.
 백지는 아름답다. 그렇다 해서 어찌 영원히 백지인 채 남아있기를 바라랴. 백지는 모든 가능성의 무덤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 거기서 꽃필 수 있는 광휘의 비상(飛翔) 때문에 아름답다. 그래서 눈이 녹기 전, 나는 그 위에 무엇인가를 그리고 싶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를 그린답시고 껍죽거리다가 그것을 헛되이 망가뜨리고 더럽힐까봐 언제나 두렵다. 그렇게 망설이기만 하다가 아무것도 그려 보지도 못한 채 하염없이 눈이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할 때가 언제나 슬프다.
 책을 읽어야 할까? 책을 읽어 저 눈을, 저 백지를 채워보려 해야할까?
 근래에 책을 한 권 내고 나서 내 마음은 노상 편치 않다. 쓸모없는 허접쓰레기로 백지를 메운 것은 아니었을까....... 아름답게 남아 있어야 할 백지를 더럽힌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차마 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기가 두렵다.

"꿀꺽 삼켜 버려도 좋을 책이 있는가 하면 그저 맛만 보고 집어 치워야 할 책도 있다. 허나 꼭 꼭 씹어 잘 소화해야 할 책은 아주 드물다."
(Some books are to be swallowed, others to be tasted: but few books are to be chewed and digested.)

 베이컨(Francis Bacon)이 쓴 《학문에 관하여》(Of Studies) 첫 머리에 나오는 이 짧은 글속에는 독서에 관한, 학문에 관한 정수가 담겨있다. 사람들은 곧 잘 맛만 보아도 될 책을 꼭 꼭 씹고 있는가 하면, 꼭 꼭 씹어야 할 책은 꿀꺽 삼켜버리기 일쑤이다. 어쨌든 꼭 꼭 씹어서 소화해야 할 책이 드물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게는 깊은 내상(內傷), 내 백지를 한 번도 제대로 채워보지 못했다는 트라우마가 있다. 책을 읽고 싶어도 읽을 수 없이 수많은 세월을 보냈던 슬픈 나날의 방황이 있었다. 베토벤의 귓병도 이렇듯 심했으랴 싶었던 그 지긋 지긋한 콧병, 통증이 너무 심해 홀로 울부짖다가 산속을 헤매면서야 가까스로 형극을 견뎌냈지만, 그 여진(餘震)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찌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있었겠는가.
 내사 그런 치명적인 장애 때문이라는 구실을 뻔뻔스럽게 내세우고 있지만, 그런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데도 요즘 학생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원 세상에 이 지경으로까지 텅 비어 있을 수 가 있을까 싶을 만큼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흠이라고 말할 것은 아니다. 원래 인간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무지자이다. 공자인들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러나 무지에도 급이 있다.
 어렸을 때 바둑을 조금 배운 적이 있었다. 얼마 후, 내 우물속의 주변에서는 대적할만한 사람이 없어 내가 제법 고수려니 우쭐거리고 있었다. 10여년이 흐른 다음 기원에 가면 상대할 사람이 있겠거니 하고 그 무렵 명동에 있었던 한국 기원을 찾았다. 다른 사람이 두는 것을 기웃거리고 있었더니 그곳의 고수인듯한 분이 내게 몇 급쯤 되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대답했다. ‘급’ 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니까. 그랬더니 급을 정해줄테니까 한번 두어보자면서 아홉점을 깔으라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옛날에 상대방에게 아홉점을 깔게 하기는 했을망정, 내가 아홉점을 깔아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무례한 사람이 있나 싶었지만, 두어 보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몰라뵈었습니다.”고 사죄라도 하겠지 싶어 아홉점을 깔고 두었다. 그런데 웬걸, 두는 족족 내 돌은 전멸이었다. 창피한 일이기는 하지만 ‘몇 급쯤 될까요?’ 라고 물었더니 18급이란다. 18급이면 어느 정도냐고 다시 물었더니 ‘최하급’ 이라는 것이다. 기가 막혔다. 18급은 면해야겠다고 기를 쓰고 나서야 가까스로 18급은 면하게 되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분은 아마로서 상대자가 별로 없을만한 강자이셨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 기량이야 아직 멀었지. 프로들이 두는 걸 보면 별거 아닌 것 같고 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두어보면 쉽지 않더군.”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덧붙이시곤 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9단이 없지만, 일본에는 9단이 많지. 그런데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해서 입신(入神)이라 불리는 9단 조차도 졸국(拙局)과 실수 투성이거든. 기성(棋聖)이라고 우러러 받들만한 분은 오직 오청원(吳晴源) 선생 한 분 뿐이야. 바둑을 제법 잘 두는 사람이야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나오겠지만, 솟을수록 겸허한 그분의 경지에 이를 사람이 나올 수 있을 것인지......”
 잠깐이나마 내가 스승으로 모셨던 그 분이 우려했던 대로 우리나라에는 지금 9단이 득실거리지만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우러러 볼 분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手不釋卷

 바둑을 두는 사람 가운데 18급에 만족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런데 학생중에는 배움의 18급에 머물고도 유유자적하다. 우리 인간이 너나 할것없이 모두 무지무식하다면 무지가 부끄러운 일이 아닐수도 있다. 그렇다해도 학생의 본분이 배우는 것일진대 배우려고 하는, 알려고 하는 학구열이 없다는 것은 가탄할 일이다. 하기사 이런 비극적인 상황은 우리에게만 국한된 일은 아닌 듯하다. 일본의 엘리뜨들이 모이는 배움터라는 동경대 학생들이 너무 무지무식하다고 생각한 다찌바나다까시(立花隆)는 《동경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라는 책을 쓰기 위해 무려 3천명의 동대생들을 만나 실태를 파악해 보려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거듭 놀라움에 휘몰린 그는 인터뷰를 하고 헤어질 때마다 으레 “홍오 오미나사이” (책을 읽으시오)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책을 읽기 시작한 학생들이 얼마나 되었을까?
 오래 전 일이지만, 우리 무용계나 음악계를 주름 잡고 있는 몇몇 분에게 주제넘게 책도 좀 읽어 보시도록 권한 적이 있었다.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은, 학생들이 그렇듯 텅텅 비어있는 까닭은 선생탓 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내게 돌아온 대답은 거의 한결 같았다.
 “그러고 싶지요. 그렇지만 실기 연마하랴,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랴, 공연 준비하랴, 렛슨하랴, 언제 시간이 나겠어요.”

 손권이 여몽에게 책을 읽도록 권했을 때도, 비슷한 대답을 들었다. 여몽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군사일도 바쁘거늘 어찌 한가로이 책이나 읽고 있을 겨를이 있사오리까. (蒙辭以軍中多務)
 그 말을 듣고 손권은 ‘경이 아무리 일이 많고 바쁘다한들 나만큼이야 바쁘겠는가.’라고 다그치자 그제서야 부끄럽게 생각한 여몽은 전쟁 중에도 수시로 배워 익히고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以後蒙時習而手不釋卷)한다.
 손권이야 그 자신이 독서광이었으니 여몽을 다그칠 수 있었겠지만, 스스로도 책을 별로 읽지 않을 주제에 내 어찌 너무 바쁘신분들꼐 더 이상 다그칠 수 있었겠는가.
 한참 후 노숙(魯肅)이 여몽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을 때 노숙이 했던 말은 학생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지만, 고명하신 선생님들껜 감히 그 말을 뻥긋도 하지 못했다.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노숙과 여몽 사이의 대화는 이런 것이었다.
 “지금 그대의 능력과 재간을 보니, 다시는 이전의 오나라 여몽이 아니구료.” (卿今者才略 非復吳下阿蒙)
 그 말을 듣자 여몽이 이르기를 “선비가 몇일 동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면, 상대방이 눈을 부비면서 놀랄만큼 달라져 있어야 마땅하지 않으리까.” (蒙曰:士別三日,即更刮目相對)
 여몽은 그래도 그의 백지를 제대로 메꾸어간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나의 백지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눈으로 가득한 뜰을 한쪽을 거닐면서 나는 생각에 잠긴다.

2012.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