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책을 읽지 마시오. II
뜰을 거닐면서(10)
이순열 _ 춤비평

 ‘손에서 책을 떼어 놓지 않다.’(手不釋卷) — 여몽이 별안간 달라진 모습으로 노숙을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은 지난 번 이야기 했던 것처럼 그 수불석권의 마력 때문이었다. 수불석권의 표본 같은 존재라면, 우선 새뮤얼 존슨이 떠오른다. 그가 편찬한 영어사전 (1755)은 온 세계를 통틀어 사전의 역사상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룩한 가장 눈부신 업적으로 칭송받아 왔다. 그 사전의 수많은 예문은 모두 그가 읽고 체크해두었던 책에서 뽐은 것이라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영문학과 영어의 모든 성과가 존슨의 사전에 담겨 있고, 그것은 오직 수불석권의 땀에서 영근 귀중한 열매였다. 어린 시절 읽었던 그의 이야기 한 토막은 생각이 날 때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존슨은 하루 종일 아버지가 경영하던 서점 한 구석에서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점원도 없었던 영세서점이어서, 아버지는 주문이 있을 때면 배달도 몸소 해야 하는 처지였으나 나이가 들면서 그 일도 버거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병든 아버지가 배달해야 할 책을 꾸려놓고 들어보다가 힘에 겨워 내려놓고는 아들을 불렀다. “새뮤얼”
 그러나 새뮤얼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여전히 책에만 빠져있다. 아버지는 기침을 콜록거리면서 다시 부른다. “새뮤얼, 새뮤얼......”그래도 아들은 여전히 못들은 척 더더욱 힘을 주어 책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몸으로 허리를 구부정거리고 쩔뚝거리면서 책묶음을 힘겹게 들고 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기침소리가 비에 젖어 들려오면서 새뮤얼의 가슴은 메어지는 듯 했고 그의 책은 방울방울 떨어지는 그 빗방울로 얼룩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오랜 후에도 비가 내릴 때면 언제나 아버지의 힘겨운 기침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그의 귓전에 울려왔고 그의 책은 또 다시 눈물로 얼룩져갔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왜 내 가슴을 이리도 아리게 하는 것일까…….
 물에 빠져는 일 못지않게 책에 빠지는 일도 위험한 일이기는 하다. 그리고 책에 빠졌다가 존슨처럼 평생 회환에 젖어 눈물로 책을 적셔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욕탕을 즐기는 사람일지라도 책맛에 감전된 사람이라면 서탕(書湯)의 활홀함을 잊지 못할 것이다.
 미술사의 영역을 학문으로 정립한 비조로 일컬어지는 빙켈만(Johan Joachin Winckelmann ․ 1717-1768)은 서른한 살 때 뷔나우(Heinrich von Bunau)백작의 비서직이라는 일자리를 얻었다. 그것은 4만2천여 권의 장서가 있는 백작의 개인 도서관, 서탕에서 마음껏 서욕(書浴)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리고 그는 그때를 자기 생애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이라고 말한다.
 보석, 우표, 도자기, 나비 등등에서 수녀수집에 이르기까지 수집의 종류는 다양하기 그지없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황홀한 것은 아마도 책수집일 것이다. 그러나 책은 꼭 수집해서 소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은 아니고, 어디엔가 책이 쌓여있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넋을 앗아가기에 충분하다.
 황송하게도 나도 그런 체험을 몇 번 한 적이 있었다. 중3 시절 서울에서 6.25를 맞고 고향 구례로 내려가서 빈둥거리는데 구석구석을 뒤져 봐도 서점은 없었다. 이 집 저 집으로 책사냥을 다녀 봤지만 그 때는 책이 아주 귀한 시절이어서 낡은 일본 책이나 잡지가 겨우 몇 권씩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라도 읽어보자고 초등학교 때 잠깐 배우다가 잊어버린 일본말을 배우기 시작했고, 얼마 후 그럭저럭 읽을 만해지자 미리 눈도장을 찍어 두었던 책들을 동냥해서 읽기 시작했다. 책이 있다는 집은 아무데나 찾아갔다.
 단 한권의 책을 빌리기 위해 일면식도 없는 낯선 사람의 집 문을 두들기고 다니는 꼴을 보고는 누군가 내게 귀뜸해주었다. 산동의 어느 초등학교 서 교장 선생님 댁에 책이 많다고.
 산동이 라는 곳은 지금은 봄에 산수유 꽃이 피는 철이면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떼 지어 몰려가는 곳이지만, 지금과는 교통사정이 영 딴판이었던 그 시절에는 아득히 먼 두메산골이었다. 허나 가도 가도 모래뿐인 사막에서 목이 탈 때, 오아시스가 있는 곳의 소식을 들었다면, 그곳이 아무리 먼들, 어찌 머뭇거리랴. 점심때도 한참 지난 터라 당일로 다녀오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는 곧장 서 교장 댁으로 향했다.
 어렸을 적, 바흐가 라인켄의 오르간을 듣기 위해 뤼네부르크에서 함부르크까지 2백 마일이나 되는 머나 먼 길을 걸어서 왕복했던 그 즐거운 여행에 비길 바는 못 되지만 산골을 헤매면서 몇 십리 길을 책을 찾아 나섰다. 오래 전 날이 저물었는데도 때로는 알르망드로, 때로는 사라방드로 가슴속으로 춤을 추면서 가까스로 서 교장 선생님댁을 찾았을 때는 깜깜한 밤중이었다.
 그러나 그 서재에 안내되었을 때, 산골의 먼 길을 헤매면서 찾아왔던 고단함은 단숨에 사라자고 말았다. 설령 해적들이 숨겨놓은 보물섬으로 표류하여 눈앞에 뜻하지 않은 광경이 펼쳐졌다. 한들 그때처럼 눈이 부셨을까? 나쓰메 소세끼와 페트라르카, 랭보와 보들레르를 나는 거기서 처음 만났다. 서 교장께서는 내게 그 서재를 마음껏 이용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그 무렵 내 콧병은 날로 악화되어 고통은 더욱 심해져 겨우 몇 권을 읽었을 뿐 나머지 책은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코의 통증을 잊으려고 산속을 한없이 방황하고 있었을 때도, 읽지 않았을 뿐, 손에 책은 언제나 쥐어져 있었다. 겉 그림만으로 이야기 한다면 내 모습은 언제나 ‘수불석권’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지 않고도 책벌레로 통했다. 그리고 중학생인데도 일본어는 말할 것도 없고 영어에도 통달했다는 소문이 우리 고장 구석구석에 퍼졌다.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은 또 있었다. 그 무렵 내게는 셰익스피어 전집원서 한 권이 있었다. 수업시간에도 머리가 터질 듯한 통증은 멈추지 않았고, 수업내용은 단 한마디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국어시간, 수학시간 가릴 것 없이 셰익스피어를 펼쳐 놓고 있었다. 단 한 줄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읽었다 한들 무슨 말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셰익스피어를 술술 읽어내는 외계인으로 통했다. 참 부끄러운, 그리고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천국이 있다면, 도서관이야말로 바로 그곳이다.’ — 이것은 호르헤 보르헤스의 말이다. 그 천국의 주민 가운데 누구보다도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이 새뮤얼 존슨이다. 세상에는 잘못 알려진 일도 많지만, 제대로 알려진 일인들 적을 리 없다. 존슨이 엄청난 독서광이라는 것은 임금님(GeorgeⅢ세)께도 잘 알려져 있었고, 왕께서는 그가 퀸즈 하우스 도서관에 자주 들른다는 소식에 접하자, 존슨을 만나러 그곳으로 행차한 적이 있었다. ‘경이 책을 무척 많이 읽는다고 들었노라’고 왕이 말하자, 존슨은 당돌하게도 그렇지 않다도 말하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소인은 책을 읽기보다 사색하는 시간이 더 많은 줄로 아옵니다.”
 (I thought more then I read.)

 이 얼마나 기특한 말인가. 머리라는 것이 책이나 쑤셔 넣는 창고는 아니다. 그래서 ‘배우고 그것을 때로 익히니…….’ 로 시작하는 논어의 첫 구절이 음미할 만하다. 돈키호테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때로 익힌다’(時習)는데 묘미가 있다. 게다가 이어지는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니…….’ 에서는 학습의 긴장에서 풍류의 이완으로 전환하는 멋이 넘친다.
 책에만 빠져있으면 돈키호테처럼 안도색기(鞍圖索驥)의 수렁에 빠지기 십상이다. 천리마는 드물지 않지만, 그것을 가려낼 줄 아는 백락은 드물다. (千里馬 常有而 伯樂不常有) — 그런 말이 생겨날 만큼 백락은 말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상마경(相馬經)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의 아들은 그 책을 달달 외우고 나서 말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들은 개구리를 보고 이제야 명마를 얻었다고 기뻐 날뛰면서 아버지께 아뢰었다. “발굽만 조금 미심쩍기는 하오나, 불쑥한 이마하며 툭 튀어나온 눈이 상마경에 적힌 명마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러자 기가 막힌 백락은 “네가 찾아낸 명마는 겨우 껑충거리기는 하겠지만, 수레를 끌 수도 천리를 달릴 수도 없겠구나” 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한다.
 맹목적으로 책에 매달려 남의 생각을 쑤셔 넣으려고 한다면, 스스로의 생각을 옥죄어 자동인형이 되어가는 첩경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다. 나는 장애 때문에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지만, 장애가 없다한들, 여몽의 흉내를 내어 수불석권에만 매달릴 일은 아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생기고,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수많은 세월 산속을 헤매면서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얻을 것은 아니었을까 자위하고는 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책을 읽지 말아라. 그리고 좀 더 방황하고 좀 더 사색하라. 그러나 그래도 책을 읽고 싶다면 채근담(菜根譚)의 다음 한 구절을 마음에 새겨둘 일이다.

 “책을 제대로 읽으려면 그 진수에 감전되어 소스라쳐 하늘 높이 춤추지 않고 견딜 수 없을 만큼 깊게 읽어라.”
 (善讀書者, 要讀到手舞足蹈處)

 이 말은 알렉산더 포우프의 다음 구절과도 통하는 말이다.

    A little learning is a dangerous thing.
    Drink deep or taste not the pierian spring:
    There shallow draughts intoxicate the brain,
    And drinking largely sobers us again.
                - Essay on Criticism

2013. 0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