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노이엔 제에서 차 한잔을 -브란덴부르크 이야기
뜰을 거닐면서(11)
이순열

 “이 지상에 빠리가 없다면?”
 어느 기자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에게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이랬다.
 “하나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Faut-en batir un.)


    빠리, 그건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네가 원하기만 한다면, 바로 너의 것이지.
    내가 네게 그걸 주겠어.
    (Paris qui n'est à personne
    Est à toi si tu le vent
    Mon ami je te le donne)


 빠리가 없다면 네게 줄 것이 없어진다. 그런데 베를린이 없다면? 그것도 하나 만들어 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을 생각하다가 ‘베를린이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떠오를까?
 베를린이 이 지상에 없다면? 히틀러에게 누군가 그렇게 물었다면 그는 대답했을 것이다.
 “상관 없다. 어차피 허물고 다시 지어야 할테니까.”
 독일, 또는 베를린을 표상하는 것으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것이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인데도, 봄을 기다리는 그 브란덴부르크 성문 주변은 세계의 성문 중 가장 스산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홀로코스트(Holocaust∙Mahnmal) 망령들의 묘석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짓누르면서 을씨년스럽게 누워있고, 길 건너 편에는 티어가르텐(Tiergarten) 숲의 나무들이 앙상한 뼈대만 남은 채 황량하게 도열해 있다. 그리고 그 옆 6월17일 거리(옛날의 샤를로텐부르크 거리)는 이를 데 없이 적적하다. 건너 편의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거리가 겨우 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고는 있지만...
 그래도 브란덴부르크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그곳은 베를린 분단의 상징적 존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광객들에게 어느 쪽이 동베를린이었을 것 같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서쪽을 가리킨다. 집도 없이 휑한 곳에 나무들만 늘어서 있는 곳이 응당 동쪽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 문을 위 아래로 좀 더 살펴 본다면 어느 쪽이 동쪽인지는 자명해진다.

 

 



 베를린의 성문 18개 가운데 하나인 브란덴부르크 성문은 30년 전쟁이 끝난 후 프레드리히 빌헨름 Ⅱ세의 지시로 축조되었다.(1788-1791) 랑가우스(Carl Gotthard Langhaus)가 아크로폴리스의 프로퓰라이아(Propylaea)를 본따 만든 이 성문의 꼭대기에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휘몰아가는 4두마차(Quadriga)가 늠늠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승리의 마차가 기울어가는 서쪽을 향하고 있을 리는 만무하니, 그 말머리가 향하고 있는 곳(Unter den Linden Strasse)이 말할 것도 없이 동쪽이다. 그렇거늘, 브란덴부르크를 찾은 관광객들은 대부분 동서도 분간하지 못한 채 그 앞에서 사진 몇 장 찍고는 돌아서기 일쑤이다.
 보고도 보지 않은 채 지나가버린 사람들에게 브란덴부르크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 기고만장하게 날아오르는 브란덴부르크의 빅토리아 여신을 처음 품에 안은 것은 프러시아군이 제대로 퍼레이드 한 번 뽐내 보기도 전 베를린을 함락시킨 나폴레옹이었다.(1806년) 그리고 빅토리아 여신 앞의 그 퍼레이드가 너무 달콤했던지, 그는 빅토리아 여신과 quadriga를 질질 끌고 빠리로 돌아왔다.(그것은 1814년에야 반환되었다).. 그 때의 수모를 프러시아가 되갚은 것은 한참 후인 1870년, 프러시아군이 빠리를 점령했을 때였다. 그래서 그 때 프러시아군의 개선문 행진은 더욱 요란하고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그리고 히틀러의 나치군은 1940년 6월23일 또 다시 개선문과 샹젤리제를 처참하게 짓밟았다. 물론 그 이전 나치는 브란덴부르크의 문 다섯 개 모두를 나치의 붉은 깃발로 뒤덮고 전세계를 멸망의 수렁으로 휘모는 광란의 퍼레이드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그 때부터 브란덴부르크는 갖가지 영광과 비극의 말없는 목격자가 되어왔다.
 빠리의 개선문을 보고 온 뒤부터 브란덴부르크는 히틀러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것은 계륵과도 같았다. 이 계륵 대신 히틀러가 모시기로 한 것은 ‘승리의 탑’(Siegessaule∙Victoria Column)이었다. 원래 제국의회(Reichstag) 앞 광장에 세워졌던 것을, 더욱 그럴듯한 현재의 자리로 히틀러가 옮겨 놓은 이 탑은 1864년 덴마크∙프러시아 전쟁의 승전기념일 탑으로 설계되었다. 그런데 그 탑이 세워지는 동안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1866년) 및 프랑스(1870-1)와의 전쟁에서도 잇달아 승리하게 되었고, 1873년 이 탑이 완성될 무렵, 여름에는 예정에 없었던 빅토리아 여신상(높이8.3미터)이 꼭대기에 추가로 설치되었다. 이 새로운 빅토리아 여신상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던 히틀러는 이 여신상을 모시기에 더욱 어울리는 자리(샤를로텐부르크 대로의 그로쎄 슈테른∙Grosse Stern로터리)로 옮기면서 탑 전체의 높이도 16미터를 더 높여 총68미터의 위용을 뽑내도록했다. 히틀러의 새로운 ‘세계수도 계획안’은 전승탑(Sigessaule)의 이전과 함께 무르익어갔다. 베를린을 독일의 수도가 아니라 세계의 수고로 격상시킬 게르마니아 프로젝트, ‘세계의 수도’ 계획안(Welthauptstadt Germania) 에서 남북으로 뻗는 도시의 새로운 축은 브란덴부르크를 살짝 비켜나 있었다.

 

 



 폭 120미터의 넓이로 장장 5km에 걸쳐 뻗게 될 새 도시의 기간도로는 “광휘의 거리”(Prachtallee)라는 눈부신 이름으로 빛날 것이며, 모든 차량통행은 지하로 잠입, 지상은 축제와 퍼레이드용으로만 활용된다.
 북단(北端)에 있는 왕의 광장(Konigplatz)는 350,000 평방미터 초대광장으로 탈바꿈하여 그 주변은 판테온을 능가하는 웅장한 건물들이 삼립(森立)하게 된다. 그리고 플라자 북쪽에는 교황청 베드로 성당의 16배(높이 290m, 직경 250m)에 이르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초대형 돔이 위용을 뽐내는 국민회관(Volkshalle)가 들어서게 된다. 이 영광의 거리에 새로운 개선문이 치솟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브란덴부르크 성문과 빠리의 개선문을 장난감처럼 보이게 할 규모였다. 이 새 도시에 대해 히틀러는 ‘이제 베를린과 견주어 이야기될만한 도시는 에짚트, 바빌로니아, 그리고 로마밖에는 없다. 그들은 과거의 역사 속으로 이미 사라저 버렸고 미래에 남을 단 하나의 영광스러운 도시로는 오직 베를린, 게르마니아가 있을 뿐이다“고 우쭐거렸다.
 히틀러의 아이디어와 건축가 슈페르(Albert Speer)의 설계로 이 신도시 ‘게르마니아’(Germania)의 계획안이 발표되자 독일의 신문에서는 “모든 예상과 기대를 아득히 뛰어넘는 눈부신 내일의 청사진”(Der Angriff), “이 돌더미에서 영광스러운 천년제국이 위용을 자랑하면서 솟아오르리라”(Volkischer)등 열광하는가 하면 뉴욕 타임즈도 “우리 시대의 가장 야심찬 계획”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이 청사진의 설계자 슈페르의 아버지는 그 계획안을 보자 “모두가 미쳐버렸군, 미쳤어”라고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한다. 히틀러가 미치광이자 악귀였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래도 그 악귀는 꿈이 있었던 미치광이었다.
 브란덴부르크 성문은 멀찌감치 흐르는 슈프레(Spree)강을 바라 보면서 수없이 많은 상처를 안은 채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꿈에 젖어 여전히 봄을 기다리고 있다.

 

 



 한 쪽에 북적거리는 운터 덴 린덴 거리를 끼고 있는데도 브란덴부르크 성문이 여전히 고독해 보이는 까닭은 그 등 뒤에 티어가르텐 숲이 쓸쓸하게 펼쳐져 있는 탓일 것이다. 인적이 드문, 겨울철의 정적속에 잠들어있는 그 숲은 꿈꾸는 사람들의 사냥터이다. 구석구석 깊이 헤맬수록 언 가지마다 꿈이 서려, 고독한 산책자에게 그들의 꿈이야기를 도란도란 전해주려 한다. 브란덴부르크 성문은 아직도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샤를로텐부르크 대로와 그 이름의 주인공 샤를로테 여왕의 이야기,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성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아들론 켐핀스키 호텔의 설립자 아들론 Lorenz Adlon이 브란덴부르크 성문에서 어떻게 비명횡사 했는지 등등...) 나는 이따금 내 방안에서도 그곳을 한참 헤매다가 곧잘 시간가는 것도 잊기 일쑤이다. 그러다가 지치면 한쪽 구석에 자리잡은 카페 암 노이엔 제(Cafe am Neuen See)에서 마시는 차 한잔이 얼마나 따듯한가. 그곳에서 나는 바흐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게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들려줄 것이다.

 

 

 

2013.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