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이중구조의 공간에서 펼쳐지는 근원적 모호성
2013봄페스티벌 단상 : 윌리엄 포사이드의 <헤테로토피아>
조성주

 어떤 예술가들의 정신세계나 철학은 특별히 더욱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는 그런 대상들 중 1순위이다. 혁신과 실험을 멈추지 않는 21세기 예술의 최전방에 선 거장 포사이드가 드러내는 신체의 운영방식과 공연 형식의 면면을 살피자면 그가 온갖 종류의 장르적 규범들을 얼마나 거침없이 실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지 발견할 수 있다. 도대체 포사이드의 예술적 욕구는 어떤 사유체계에 근거를 두거나 영향받는 것일까.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를 ‘점령한’ 포사이드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2006년 초연)는 그 실마리를 제공하는 듯 하다(2013.4.10.-14.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본래 의학에서 위치이상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해롭다거나 병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후기구조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였던 미쉘 푸코((Michel Foucault)가 20세기 문학계의 거장이자 소설가, 철학가였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언어가 빚어내는 부조리한 텍스트 공간에 대해 ‘헤테로토피아’ 라고 이름 붙이면서 이 특별한 용어의 철학적 정의는 길고 깊은 굴곡을 지나는 여정에 오르게 되었던 듯하다. 푸코에 따르면, “거기에서는 사물들이 몹시 상이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놓여’ 있고 ‘배치되어’ 있어서, 사물들을 위한 수용 공간을 찾아내거나 이런저런 자리들 아래에서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였고 또한 ‘언어를 은밀히 전복하고, 이것과 저것에 이름 붙이기를 방해하고, 보통명사들을 무효가 되게 하거나 뒤얽히게’ 한다고도 설명한다.¹
 포사이드의 작품 <헤테로토피아>의 공간 운영 방식은 공연예술의 일반적 관습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공연자와 관객을 분리해두는 극장의 기존 객석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이 공연의 장소는 오페라하우스의 본 무대와 뒷무대 위로 한정되어 있다. 300여명의 관객들은 뒷무대 출입구를 통해 입장하도록 안내를 받게 되는데 긴 줄을 따라 들어서면 관객 스스로 어느 쪽으로 갈지 임의로 선택해야 하는 ‘두 개의 공간’을 만나게 된다. 중간에 드리워진 거대한 막에 의해 둘로 나뉘어 구획된 그 ‘공간들’은 온통 모호함으로 충만하다. 한 쪽은 수많은 테이블들의 군집이 곳곳에 틈새들을 남겨둔 채 하나의 거대한 장방형을 이루도록 배치되어있고 무용수들은 테이블들의 위와 아래, 테이블 간에 벌어진 틈새를 ‘또 다른 하위 공간’으로 삼아 시종일관 움직이고 오가며 상호간의 관계와 반응을 이어가는데, 그 모든 행위들은 계속 어긋나기만 할 뿐 서로 제대로 맞아떨어지는 법이 없어 보인다. 몇몇 테이블 위에는 알파벳 문자들이 세워져 놓여있고 무용수들에 의해 수시로 그 배열과 위치가 변형되게 되는데 딱히 어떤 특정한 단어도 조합해내지는 못한 채 이렇게든 저렇게든 읽어보려는 노력을 부질없게 만든다. 한편 거대한 막 너머 반대편에는 업라이트 피아노 한대가 중심을 피하여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다른 일체의 ‘사물이 배제되어 있는 공간’이며 무용수들은 홀로 혹은 두어명씩 특정한 관계도 목적도 구체적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모종의 움직임들을 수행할 뿐이다. 그들의 움직임이란 반대편의 행위자들이 마이크가 내장된 투명한 깔때기 형태의 장치에 대고 마치 언어인체하며 만들어내는 지껄임이나 각종 소리들에 반응하는 것인데, 두 개로 분리된 장소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상황들은 마치 어떤 기호의 발신자와 수신자 같은 양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기호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적어도 그 의미가 발신자와 수신자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인지 조차 확인할 수가 없다.
 <헤테로토피아>의 표면적 톤 앤 매너(tone and manner)는 철저히 ‘모호성’인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그 ‘모호성’은 꽤나 정교한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모호성의 분포나 밀도가 -작품의 후반부를 제외하자면- 꽤나 고르게 조율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다. 관객들이 스스로 선택하여 찾아 들어간 ‘이중구조의 공간’은 어떠한 의미나 지시도 흩어져버리고 어떠한 구체성이나 관계도 흐려져 버려 근본적인 모호성 속에 놓이게 되고 마는 ‘헤테로토피아’인 것이다. 그곳에서 관객들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두 개로 나뉘어진 공간을 임의로 오가며 어느 방향에서든 관람을 할 수 있도록 ‘방치’되는데 한 쪽 공간의 장면들을 본 만큼 건너편 공간의 장면들은 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관객들 개개인에게 있어서 정보는 동일하지도 않으며 파편화되므로 그에 대한 해석 역시 ‘방치’되거나 ‘유예’되어 버리고 만다.
 이 작품에 차용된 ‘미쉘 푸코의 ‘헤테로토피아’’가 지니는 관념성은 ‘포사이드의 <헤테로토피아>’를 통해 관객들의 인식체계조차 혼란에 빠뜨리는 ‘공연’이라는 물성으로 구현되는 듯하다. 사실 포사이드는 공연 프로그램 책자에 소개된 칼럼리스트 노승림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작업하지 않는다. 즉, 어떤 대상이나 주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나의 작업 방식이 아니라는 소리다. 다만 이 작품은 ‘번역 (translation)’이라는 것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듣거나 볼 때 그 실체를 객관적으로 본다기보다는 우리가 이미 가진 지식과 편견, 인상으로 ‘번역’을 해서 인식한다. 바로 그 과정에 관심을 둔 작품이다.”² 하지만 이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포사이드의 <헤테로토피아>’는 다분히 ‘미쉘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를 ‘표현하려고’ 충실히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더 나아가 보자면 어쩌면 혁신과 실험으로 가득 찬 포사이드의 다른 작품들 대부분 역시 ‘헤테로토피아의 우회적 구현’이었던 것은 아닐까.
 포사이드가 <헤테로토피아>를 포함한 많은 작품들을 통해 드러내는 태도는 사회와 예술(특히, 무용공연)의 일반적 규범과 고정관념에 대한 배반이었다. 그의 안무는 클래식발레에서 요구하는 신체 얼라인먼트(alignment)와 동작 구성, 음악적 매너(manner), 관객의 기대 등을 순식간에 전복시키곤 한다. 어떤 동작들의 조합과 진행도 기존 방식을 허용하지 않으며 물질로서의 신체를 낱낱이 해체하고 전에 없던 조합과 수순으로 재구조화하여 동작하게 하는 것이다. 기이하고 불편한 동작들의 연결과 수행을 위해 몸 안에 새로운 길을 개간했어야 할 무용수들의 집중력과 예민함으로 인해 포사이드의 춤은 낯설고 기묘하지만 그 통렬한 전복과 일탈에 매료되어 차마 시선을 떼지 못하게 된다. <헤테로토피아>에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작품은 마무리 부분에서 다소 망가지는 듯한데, 마치 언어나 관습을 교육하고 있는 듯 새소리 내기를 가르치려 드는 코믹한 상황극 장면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설명적이어서 직전까지 작품의 주축을 이루던 빼어난 모호성으로부터 너무 갑작스럽게 상식의 수위로 추락한 듯이 생경하게 느껴진 것이 사실이다.
 이 공연의 주변적인 현실에 대해서도 잠시 초점을 돌려보자면 <헤테로토피아> 내한공연은 5억에 달한다고 알려진 초청경비가 분야내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과다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는데 아마도 무용단 측에 지급된 순수공연료(performance fee)가 그 금액에 달한다는 오해로 인해 더욱 관심을 받게 된 듯도 하다. 총인원 40명이 넘는 규모의 공연단이 국내에서 체류를 하자면 항공료과 숙식비만 대충 계산을 해도 이미 억대를 넘어설 것인데 여기에 국제화물료와 저작권료, 대관료 및 기술 관련 경비와 온갖 진행비 등을 합하면 홍보비를 더하던 제외하던 막상 순수공연료는 상상만큼 높은 금액에 다다를 수가 없을 듯하다. 물론 초청 주최가 성남문화재단이니만큼 대관료 등이 포함된 경비 전액이 현금으로만 발생된 것은 아닐 것이므로 액면가 그대로의 출혈이 있지는 않았겠지만, 특히 300여명으로 한정되었던 관객의 회당 정원를 고려하자면 경제적 측면에서는 상당한 손실이 있었을 것은 분명하겠다. 사실 아방가르드한 현대무용 공연을 초청한다는 것은 마케팅 측면에서는 성공률을 매우 희박하게 만드는 위험요소인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테로토피아>의 공연 현장이 무용계 관객들 못지않게 작품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가진 인문학, 과학,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관객들과 순수일반 관객들로 채워졌었다는 점을 참고하자면 국내 무용 시장이 아직도 넘지 못하고 있는 벽은 관객의 부재가 아니라 작품이 주는 감각적, 지적 만족감의 부족과 소극적인 홍보 채널의 문제라는 것을 새삼 고민하게 된다. <헤테로토피아>는 재력과 의지를 갖춘 성남아트센터와 수년간 컨텐츠와 관객개발에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페스티벌 봄의 소통과 협력이 있었기에 실현될 수 있었던 공연이다. 이 공연의 현실적 영향과 관련해서는 웬만한 상업뮤지컬 한 작품의 홍보비에도 미칠까 말까 한 초청경비 수준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이 시대 관객들의 지적 욕구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것에 강조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빠른 미래에 해외 주요 무대에서 5억 이상의 경비가 들더라도 초청하고자 하는 한국의 무용 작품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여전히 한가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사실상 여러 측면에 있어서 포사이드의 혁신적인 작품들에 대한 총평은 ‘헤테로토피아적’이라고 칭할만한 특징이 다분하다고 본다. 그래서 의아해진다. 포사이드는 구태여 <헤테로토피아>라는 작품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것이다. 왜 ‘헤테로토피아’를 직접적인 제목으로 차용한 것 일까. 그저 극작가의 제안이었을 뿐일까. 혹은 자신과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한 대중의 오해나 분석의 임의성에 실망하여 일종의 해석의 근거를 남겨두려는 욕구이거나 전략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푸코가 보르헤스를 음미했듯 포사이드는 푸코를 음미하면서 시대와 매체와 존재를 가로지르며 내면의 대화를 나누어온 것일까. “이봐, 푸코 선생. 당신의 헤테로토피아란 혹시 이런게 아닌가?”라고. 푸코의 헤테로토피아는 모든 예술가들의 의식 저변에 깔린 욕구이자 충동이며 미망일 수 있겠지만 포사이드에게는 훨씬 더 강렬하고 직접적인 사유의 원천이자 기필코 구현해내고 싶은 개념이었던 것은 아닌지 추정해본다.

 “푸코는 자신의 철학이 우리의 익숙하고 타성적인 진리 체계를 교란하고 시험에 들게 하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의 철학이 무엇보다도 ‘사유할 수 있는 것’의 한계를 가로지르는 낯선 지식, 그리하여 기존의 정당화된 지식체계 자체를 다르게 보도록 이끄는 사유이기를 바랐다. 일정한 해답의 경로를 제시하기보다는, 복잡한 질문의 미로 속으로 유인하는 사유. 근대적 합리성의 세계 전체를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난처하게 만드는 사유. 스스로 현재의 온갖 힘과 제약과 구속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오히려 그에 대한 역사적 성찰을 매대로 새로운 탈주선을 탐색하는 사유. 헤테로토피아가 푸코 철학에서 어떤 일관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사유 공간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닐까? 문학이든, 건축이든, 아니면 역사이든 간에 그것을 통해, 그것을 매개로, 혹은 그것을 우회해 우리가 확보해가(야 하)는 사유의 해방구.”
         -이상길, ‘이토록 낯선 공간들-푸코의 헤테로토피아’에 관하여’, [인문예술잡지 F], 2013, 8호,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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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미쉘 푸코, 『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 11~12쪽.
 이상길, ‘이토록 낯선 공간들-푸코의 헤테로토피아에 관하여’, [인문예술잡지 F], 2013, 8호, 10~11쪽.
² 노승림, 인터뷰, <헤테로토피아> 공연 프로그램 책자, 2013, 12~13쪽.

조성주
독립기획자, 그간 무용가, 기획자, 예술행정가 등의 역할을 수행해온 바 있다. 가장 최근까지의 활동은 LIG아트홀 예술감독/공연사업부장으로서 예술지원을 위한 비영리공연장 운영에 힘써온 것이며, 이후 활동으로는 동시대의 예술현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담아내는 독립기획자로서의 실천이다.

2013.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