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에세이_ 뜰을 거닐면서(16)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5월에
이순열_춤비평가

4월이 오면 가뭄에 메말랐던 3월의 대지를 감미로운 소나기로 적셔주고
산천초목에 젖줄을 대어 온갖 꽃을 피게 하느니...
(When that April with its showers sweet.
The drought of March has pierced to the root.
And bathed every vein in such liquor of which virtue engendered is the flower.)

 초서(Geoffrey Chaucer)는 「캔터베리 이야기」의 프롤로그에서 4월을 그렇게 노래한다. 그러나 우리의 봄은 갖가지 위협과 불확실성으로 위축되어 왔고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되고 말았다. ‘언 땅에서 라이락을 키우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는’ 4월의 갈등을 겪고서야, 더러는 머뭇거리고 주춤거리기도 하는 불안의 계곡을 가까스로 넘어 5월에 이르러서야 봄은 만개한다.

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5월에
모든 봉오리가 싹터 오르고
모든 새들이 노래하는 5월에
내 가슴에서도 사랑이 샘솟아 오르네
(I'm wanderschönen Monat Mai.
Als alle Knospen sprangen.
Als alle Vögel sangen.
Da ist in meinen Herzen.
Die Liebe aufgegangen.)

 바야흐로 계절의 축제, 그 5월이다. 카슨(Raechel Carsen)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봄의 침묵’이 언제 우리를 엄습할지 모르거늘 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5월에 어느 가슴인들 꽃피지 않고, 어느 가슴인들 춤추지 않으랴. 춤 없는 축제가 어디 있고, 축제로 통하지 않은 춤이 어디 있으랴.
 “내 기억이 옳을 양이면, 내 생애는 온통 축제였다. 온갖 가슴이 활짝 꽃피고, 온갖 술들이 철철 넘쳐 흐르는.”
(Jadis, si je me souviens bien, ma vie etait un festin où s'ouvraient tous les cours, où coulaient tous les vins.)

 아르뛰르 랭보는 「지옥의 한 철」 첫 머리에서 그렇게 노래한다. 그러나 일년 내내 5월이 아니듯이 우리의 생애가 시종 축제로만 출렁거릴 수는 없다. 그러기에 축제는 더욱 소중하다. 우리는 꿈속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의 삶에서 꿈이 배제되어버린다면 그지없이 삭막할 것이다. 축제 또한 꿈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때로 일상성의 틀, 그 문지방을 넘어 날아 오르는 이방지대, 에떼로 공간(Heterotopia)이다.
 제임스 조이스가 그의 고향 더블린이라는 자궁에서 노상 탈출을 꿈꾸었듯이 우리도 일상성이라는 폐쇄된 공간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 그리고 그 꿈으로 날아오르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야말로 축제이다.
 죽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렇다고 살아있다고 할 수도 없는 숨 쉬는 시체로 살아가기 - 그것이 일상성이라는 틀에 갇혀 쳇바퀴 굴리기에 저려있는 우리 삶의 양식이다.
 그 의사 시체의 맥박이 다시 힘차게 꿈틀거리게 하는 것이 축제이다.
 노발리스는 말한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성스러운 사원이 있을 뿐이고 그것은 바로 인간의 육체라고. 그 육체가 맥박치고 춤을 추기 시작할 때 그 성스러운 신전의 모든 문은 열리고 축제의 종은 울린다.

 터너(Victor Turner)에게 있어 축제란 ‘모든 위계, 모든 서열, 규범, 제약, 금기라는 사슬에 묶여있는 노옥에서 그 문지방을 넘어 자유, 평등, 해방, 사랑, 동질성으로 녹아드는 커뮤니타스의 풍선을 쏘아 올리는 의식이다.
 비흐찐(Mikhail Bahktin)에게 있어 축제란 대화와 소통을 위한 의식이다. 그 대화 속에서 ‘너’와 ‘나’는 각자의 고립된 개별성의 영역을 박차고 뛰어나와 상호 소통과 조정의 광장으로 투사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콕스(Harvey Cox)는 억압되고 간과되었던 감정표현이 사회적으로 허용된 기회가 축제라고 이야기한다.
 축제란 질서와 무질서, 일상성과 비 일상성이 교차되면서 뒤집히기도 하고 억압과 규제로부터의 해방감을 만끽하면서 평소에는 입어볼 수도 없는 옷을 입거나 아예 옷을 훌렁 벗어던진다 해도 용인이 되는 이방지대, 이방계절이다.

 그러나 아무리 축제가 규제로부터의 해방과 일상성으로부터의 일탈, 해방감의 탐닉이라 한들, 우주의 종말을 향한 질주일 수는 없다. 액셀러레이터만 있고 브레이크는 없다면 어떻게 될까. 무엇이든 지나치면 파국이 입을 벌린다.
 아무리 눈부시게 막이 열린다 해도 그 막은 언젠가는 닫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막이 닫히면 무엇이 남는가? 록크 축제(Rock am Ring/ Rock im Park)처럼 배설물과 쓰레기 더미인가? 일탈과 배설의 카타르시를 통해 축제 이전의 삶 보다 한 차원 높은 더욱 승화된 세계로 날아오르는 것이야말로 축제가 우리를 유혹하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축제는 한 지역의 색깔이고 향기이다. 그 지역 특유의 문화누룩으로 빚어지는 술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문화를 발효시켜 창조해가는 무대, 양조장이기도 하다.
 “아- 나는 안개 낀 빠리만을 사랑하느니.” (Je n'aime Paris que dans la brume.) - 그들은 삐노 느와르, 삐노 뫼니에, 샤르도네, 까베르네 쏘비뇽, 메를로, 게부르츠트라미너, 슈넝 블랑, 쎄미용, 리슬링 등 갖가지 포도를 아롱디쓰망 별로 발효시켜 왔다.
 무슨 포도를 어떻게 발효시키고 숙성시킬 것인가에 따라 그 고장의 문화, 그 고장의 향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고장마다 고유의 향기와 체취로 자신의 색깔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너 나 할 것 없이 축제의 불꽃을 달구어 문화의 향기를 산출하기위해서는 빠뜨릴 수 없는 원진료(Prima materia)가 하나 있다. 그것은 융화(concordia harmonia)라는 누룩이다.

 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계절 5월에 그 아름다운 술을 빚어내기 위해 가슴과 가슴 사이의 벽을 허물고 서로 손을 맞잡고 얼싸안는 일이야말로 모든 축제의 꿈이다. 그 꿈을 위해 쉴러와 함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를 드높게 노래하자.

온 세상 사람들이여, 서로 껴안으라.
그리고 이 키스를 온 세상에.
(Seid umschlungen, Millionen
Diesen Kuβ der ganzen Welt!) 

2014. 05.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