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

대담_ 홍신자 〈거울〉
‘현자의 돌’ 그리고 홍신자의 ‘연금술’

 



이지현: 지난 10월 13-14일 자유소극장에서 시댄스 프로그램 중 하나로 홍신자의 〈거울〉(Mirror) 공연이 있었습니다. 데뷔 45주년을 기념하는 이 공연으로 관객은 오랜만에 홍신자의 신작을 만나는 기쁨을 가졌습니다. 공연이 끝난 후 객석에서는 ‘역시 홍신자!’라는 느낌으로 박수가 길게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이순열 선생님을 모시고 〈거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추운 날씨에 먼 길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순열: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서 반갑습니다.



이지현: 이 작품은 본인의 영적 경험에 대한, 말하자면 어떤 찰나의 느낌을 족자를 펼치듯이 죽 펼쳐놓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경험의 시간화라고 할까요.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 자신인 줄 알고 믿고 집착하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워버렸을 때, 그때 찾아온 몸과 영혼이 깨어나는 그 경험, 그 희열의 순간을 담았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이순열: 공연을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금년에 봤던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 〈거울〉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예술행위 중 하나로 제주도에 있는 ‘빛의 벙커’에서 공연되고 있는 프랑스인인 뮤니에가 기획한 몰입형 미디어 아트인 아미엑스 AMIEX(Art & Music Immersive Experience) 전시입니다. 이 두 가지가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예술현상이었다고 보는데, 이 작품은 ‘빛의 벙커’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빛의 춤’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여 평이 되는 벙커 속에 온통 음악과 빛이 춤추고 있으니까요. 무용가들이 가서 볼만한 공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거울〉이라는 작품은 스스로의 여정, 여정이라는 것이 그냥 갈 수도 있지만 무언가를 찾으려는 여정을 보여줬다고 봅니다. 작가가 의도한 것과 관객의 눈에 비친 것은 통상 다를 수 있죠, 그런데 여정이라는 면에서는 관객이 작가인 홍신자와 같아지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이것은 홍신자의 아나바시스(anabasis: 大長征)이구나 그리이스어 오레이바시아(oreibasia: 디오니소스를 섬기는 여신도들이 떼지어 산을 오르며 춤을 춘 축제)처럼, 춤을 추면서 깊은 세계로 들어가다, 이런 것과 비슷한 것이죠. 홍신자의 여정은 무엇을 향한 대장정인가, 다른 말로 하자면 홍신자의 연금술... 연금술이라는 것은 마그넘 오푸스(magnum opus: 大役事), 즉 큰 작품을 말하는데 연금술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현자의 돌’을 만드는 것이죠. 그것은 금일 수도 있고, 영생불멸의 생명체가 되기도 하지요. 그 ‘현자의 돌’을 만들려고 하는 머나먼 길고긴 여정 그 대역사를 하는구나 했습니다.

이지현: 연금술이라 하면 정신적으로 완전히 다른 상태, 매우 순도 높은 상태가 되는 그런 과정에 대한 은유겠지요. 이 작품 안에서 그런 과정 역시 드러나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순열: 홍신자 선생한테 물어 봤어요. 혹시 연금술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작품을 했냐고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은 그렇지 않았지만 내 얘기를 듣고 보니 본능적으로 무의식 속에서 그것을 찾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연금술에 대해 이 자리에서 자세하게 얘기할 순 없지만 연금술에는 12개의 문과 4개의 과정이 있습니다. 뭔가를 얻으려고 하면 끊임없이 변신을 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니그레도(nigredo: 黑化), 검은색의 카오스의 세계에서 시작해서 알베도(albedo: 白化)를 거쳐서, 치트리니타스(citrinitas: 黃化)를 거쳐서, 마침내 루베도(rubedo: 赤化)를 거쳐서 종착지인 ‘현자의 돌’에 이르게 되는 건데, 〈거울〉은 바하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에서 시작되면서 흰색을 입은 알베이도가 등장하죠. 그 다음에 홍신자가 검은 옷을 입고 그 다음에 검은 옷을 입은 또 한 여인이 나오는데, 색으로 보자면 백, 흑, 흑은 나타났는데 황과 적은 없었어요. 그런데 후반부에서 하늘에서 꽃이 흩날릴 때 저 꽃이 하늘에서 왜 떨어질까 생각했는데 아, 저 꽃이 황과 적이구나 하고 놀랐지요.
그럼 왜 흑은 두 개인가. 연금술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us)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래서 연금술을 헤르메티카(Hermetica)라고도 하지요. 헤르메스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궁극의 불변의 것, 영원한 것, 보통 연금술하면 야금학이라든가 화학적인 얘기를 하지만 우리가 연금술을 얘기하는 것은 정신적인 돌, 철학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지요. 검은 옷을 입은 홍신자는 헤르메스의 페르소나로 보입니다. 또 다른 검은 여인은 연금술의 첫 단계를 시작하는 니그레도, 흑화의 모습으로 연금술이 시작되었음을 상징하구요. 이 검은색에 대해 융은 몰티피치오(mortificio: 죽음), 즉 케이오스로 보는데, 모든 생명과 탄생은 이 검은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탄생하는 거지요.

이지현: 저 역시 검은 여인과 흰 여인 둘의 등장이 흥미로웠습니다. 홍신자 본인은 1인칭 화자의 역할을 했다고 보이구요, 이 두 여인은 그야말로 내면의 상반되는 또 다른 자아로 등장시켜 주인공 자아에 대한 이야기를 풍성하고 안정감 있는 3자 구도를 형성했다고 봅니다. 이 3자 구도 자체가 정반합의 변화와 성장의 구도이기도 하고 3위 일체의 완전함의 구도이기도 하지요. 차를 따르고 마시는 장면으로 작품이 시작되고 끝을 맺는데, 이 부분도 같은 반복인 듯하지만 연금술 이후의 같으나 전혀 달라진, 외양은 같은 듯하나 질은 완전히 달라진 것을 아주 잘 드러내 주어 작품 전체를 에워싸는 탁월한 수미쌍관의 구성이 되었지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연금술의 과정으로 읽히는군요.
 저는 ‘거울’을 좀 더 생각해 보고 싶어요. 우선은 라캉의 ‘거울 단계’가 떠올랐어요. 인간이 주체로서의 자아의식을 형성해 가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세 단계 중 첫단계인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에 인간은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이미지로 상상으로 구성하기 시작합니다. 이전까지 자신이 볼 수 있었던 것은 몸의 부분들이었고, 거울을 본 후에야 자기의 전체 모습, 특히 얼굴을 보게 되고 부분이 아닌 전체로서의 자신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이지요. 심리학자마다 조금 다른데 ‘거울 단계’를 거쳐 상상계를 지날 때 인간은 드디어 하나의 주체로서 자신이 탄생한 기쁨과 희열을 맛보기도 하지만 이전까지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들과 결별해야 하는 아픔과 절망을 겪는다고 한다고 말합니다. 이 단계는 양가적일 뿐 아니라 그렇게 형성된 이미지(이마고)가 진정한 자신이냐 타인이 보는 자신이냐는 갈등스런 문제를 던지기도 합니다. 홍신자 선생이 작품 제목을 거울로 했을 때, 작품 해설에서 보이는 것처럼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자신인 줄 알고 열병을 앓았다는 부분을 보면 거울 속의 자신은 외양일 뿐이며, 그저 남이 보는 이미지일 뿐이고, 어쩌면 보고 싶은 대로 누군가의 기준으로 오염될 수도 있는 그런 영역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거울 속 모습 역시 진정한 내가 아니구나라는 자각, 에고가 진정한 내가 아니구나라는 각성인 것이지요. 거기서 겉이 아닌 자기 안으로의 여정은 시작되고 깨달음의 순간은 바로 그 내면으로의 여정에서 조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희열을 진정으로 즐기면서 웃으면서 춤을 추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순열: 이 작품에서 거울이라는 것은 끝없이 구도하는 세계를 은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궁극을 향한 간절함은 거울을 통해, 거울을 향해 가는 것으로 드러나지요. 그 간절함과 연관된 아도르노의 말이 생각나는군요. 모든 예술, 창작행위는 연금술이다. 아도르노 역시 나하고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발견을 하고 기뻤는데요. 아도르노가 한 말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말은 참으로 고귀한 예술이라는 것은 성공할 때만이 아니라 실패하는 과정, 실패하는 매너, 어떻게 실패하는가를 보여주는 것, 거기를 도달하려고 애를 쓰다가 실패로 끝나도 그것이 바로 예술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도르노의 이 말을 바슐라르가 연금술은 화학에서는 모조리 실패했지만 예술에서는 여태까지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했어요. 우리들이 목표로 했던 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향해서 끊임없이 가고 있는 것, 그 빛을 갈구하는 안간힘, 목마름이 고귀한 예술이 되는 것이지요. 이 작품에서도 그런 간절함이 보입니다. 그리고 꽃이 쏟아지는 장면은 그 간절함에 대한 하늘로부터의 응답이지요.
 모든 것은 카오스에서 시작해서 카오스로 끝난다고 볼 수 있지만, 정적에서 시작해서 정적으로 끝난다고도 볼 수 있어요. 알베도, 백화는 정적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니 홍신자의 또 다른 작품이 생각나는데 목욕에서 시작해서 목욕으로 끝나는 작품이 있었어요. 목욕은 다른 의미로 깨끗하게 만드는 알베도의 과정이지요. 케이오스든 알베도든 그 과정은 지난하고 길고 긴 여정입니다. 아도르노가 추구하는 과정에서의 ‘실패’로 끝난 것도 예술이라고 했는데 내가 볼 때 이 작품 역시 실패한 것으로 보여요.

이지현: 네?! 실패요?

이순열: 곶자왈의 신비라는 것이 있어요. 제주도에 보존되어 있는 숲의 생태계인 곶자왈이 영원한 생명의 신비를 간직했다고 하지요. 이 작품이 처음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으로 시작해서, 사실 시작부터 깜짝 놀랐어요. 그 어두운 축축한 세계를, 그 신비를 드러내고 있어서 감동했지요. 그래서 바흐로 시작해서 바흐로 끝나겠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헌데 끝날 때 첼로가 나오긴 나왔는데 바흐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진 저 낮은 세계로 굴러 떨어졌어요. 그것이 또 이 작품을 빛나게 해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들은 결국은 이렇게 갈구해도 도달할 수 없고, 망가질 수밖에 없구나...

이지현: .... 삶의 비극성이네요. 저는 이 공연에서 홍신자씨 춤을 보면서 참 솔직하게 춤을 춘다는 것을 느꼈어요. 욕망, 고뇌, 희열 이런 것들이 가식 없이 아주 명료하게 드러나 날 것 그대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바로 이 솔직함으로 흘러갔더니 바로 포장하지 않은 삶의 정수에 도달했나 보다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순열: 나는 헤르메스의 페르소나로서의 홍신자의 춤을 볼 때 2차 세계대전 중에 케테 콜비츠의 그림에서 고통받는 사람의 모습 같은 것들이 보입니다. 전쟁 중의 어두운 세계, 고독함이 홍신자의 기나긴 여정에 배여 있더군요. 거울을 통해 뭔가 얻고자 하는 것, 하늘에서의 꽃이라는 응답, 우리 현실의 삶과 피안의 세계, 지금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의 전환(transformation)보다는 transmutation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은데, 끝없는 metamorphosis에 대한 갈구가 작품 속에 겹겹이 쌓여있습니다. 아주 진한 고통이 배여 있는 모습으로. 또 그와는 역으로 홍신자 무용단이 ‘웃는돌’인데 왜 웃는 돌인가가 궁금했어요. 이 작품을 보면서 현묘한 돌(occultum lapidem), 연금술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마지막 단계인 그 상태가 바로 ‘웃는돌’이더군요. 그래서 웃었습니다.

이지현: 질문을 던지고 지난한 길을 떠난 자가 웃는 돌을 만난 거군요.

2018. 12.
사진제공_이지현, 공연사진제공_홍신자/사단법인 웃는돌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