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보경댄스프로덕션 〈각시〉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한국 춤의 독특한 한 전형을 구축하고 있는 정보경댄스프로덕션의 춤판
최찬열_춤비평가

한국춤 씬의 선두에서 한국춤의 동시대성과 로컬리티를 일구고 있는 정보경이 근래 20여 분 안팎이 소요되는 두 개의 인상적인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MODAFE 2022(제41회 국제현대무용제)에 초청된 〈각시〉(6월 13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와 춘천공연예술제 무대에 오른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8월 12일, 춘천몸짓극장)가 그것이다. 작년 제42회 서울무용제에서 초연된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는 올해 춘천공연예술제 무대에 다시 올랐고, 2016년에 초연된 10분 분량의 〈각시〉는 춤꾼 두 명을 더 보강하고 분량을 늘려 모다페에서 다른 버전으로 공연되었다. 〈각시〉는 〈하회별신굿탈놀이〉 첫째 마당에 등장하는 각시탈의 생김새가 함축한 의미를 모티브로 해 만든 작품이다. 각시 혹은 새색시는 갓 결혼한 젊은 여자를 일컫는 말인데, 하회 마을의 탈놀이에 등장하는 각시탈은 입은 작고, 봉긋한 두 볼에 연지를 찍었으며, 아래로 살포시 내리 깐 실눈에, 조신하고 차분한 모습을 띠고 있는 우리네 아낙 형상이다. 정보경은 이런 모습을 한 각시탈에서 한국 여성의 삶을 보고, 이를 춤과 퍼포먼스로 장면화한 〈각시〉 버전 2를 올해 모다페에서 선보인 것이다.


한국춤의 동시대성과 로컬리티

무대 바닥에 사각형을 이룬 채 놓여 있는 4개의 청사초롱이 하나둘 차례로 불을 밝히면, 대극장 넓은 무대는 마치 보통 사람들이 살림하며 사는 집의 안방이나 대청, 혹은 마당처럼 아담하고 아늑해 보인다. 조용하고 한적해 보이는 무대 중앙에 조명 빛이 밝아지면, 두 여성이 등과 머리를 맞대고 한 몸처럼 짝 달라붙은 채 서 있다. 그러다 둘은 동시에 상체를 서서히 앞으로 내밀며 무대 양옆,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이때 서로 얽혀있던 두 여성의 길게 땋은 머리채가 풀어지면서 둘은 멀어진다. 두 몸체를 하나로 잇고 있던 인연의 끈이 끊어지며 둘이 떨어지는 이 장면은 마치 자궁에서 나온 아이가 탯줄을 끊고 나오는 출생의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무대의 오른쪽과 왼쪽 공간에 각각 떨어져 서 있던 둘이 각자 무대 가장자리를 돌아서 중앙에 와 나란히 서면, 이들은 어느 틈에 벌써 성장해 혼례를 치를 나이가 되어 있다. 긴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매듭에 해당하는 탄생과 결혼이라는 통과의례의 순간을 간략한 미장센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느낌이 강한 도입부 장면이다.




정보경댄스프로덕션 〈각시〉 ⓒ김정한




“아니 ~ 아니 노지는 못 하리라.” 구슬픈 창부타령을 배경음악으로 삼아, 양 볼에 붉은 연지로 둥근 점을 찍은 두 여성 춤꾼은 나란히 서서 객석을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인 채 절을 하고, 다른 보조 춤꾼 둘이 하얀 부채를 그들의 머리 위에서 펴들며 부채 너머로 살며시 내다본다. 두 손으로 얼굴을 살짝 가렸다가 생긋이 웃으며 얼굴을 살포시 내미는 모습이 마치 새색시의 두근두근하는 심정을 묘사하는 듯하다. 그러다 두 춤꾼은 혀를 쏙 내놓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입을 쩍 벌리며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각시탈 형상을 재현하기도 한다. 또한 서로 장난을 치듯 툭 치고, 밀치며 쓰러지기도 하는데, 이는 혼례의 긴장감과 설렘, 그리고 부끄러움 등을 놀이와 퍼포먼스로 구현하는 장면이리라. 이러한 심정은 춤으로도 펼쳐지는데 춤은 한층 밝고 경쾌하다.




정보경댄스프로덕션 〈각시〉 ⓒ김정한




창부타령이 빠르게 변주하면 춤꾼들의 춤도 이에 조응한다. 2인무와 4인무가 주를 이룬 춤은 안고, 어르고, 흥청망청 놀다, 농밀하게 사랑을 나누고 진득하니 한데 섞여 어우러진다.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춤꾼들은 아이를 낳는 해학적인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잘 알다시피 청사초롱의 붉음과 푸름은 각각 양(陽)과 음(陰) 뜻하며 두 색의 조화는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 붉음과 푸름의 어울림, 곧 음양의 화합을 부추기듯 청사초롱의 불이 유난히 밝아지면, 춤은 더욱더 즐겁고 유쾌하게 펼쳐진다. 넘실넘실 출렁이는 어깨 짓과 능청능청 활달한 걸음사위에 현대적인 감각의 동작이 가미된 춤은 한국적 정서를 듬뿍 머금고 있으면서도 서투르거나 어색한 데가 없이 말끔하고 미끈하게 가다듬어져 있다. 전통춤 사위와 현대춤 동작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특별하게 다른 질감을 뽐내는 춤은 한국춤의 동시대성과 로컬리티를 그 어떤 춤보다도 모범적으로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정보경의 춤은 동시대 한국 춤의 독특한 한 전형으로 봐도 거리낄 것이 없이 괜찮아 보인다. 그녀는 한국춤의 동시대성과 로컬리티를 누구보다 맨 앞에 서서 구축하고 있는 보기 드문 춤꾼인 셈이다.








정보경댄스프로덕션 〈각시〉 ⓒ옥상훈




그러다 불현듯 죽음이 찾아온다. 삶의 기쁨이 절정에 달한 것일까, 4인무가 신나게 펼쳐지는 와중에 정보경은 무대 왼쪽 뒤편에서 나머지 춤꾼들이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그 순간 무대 뒤편으로 좁은 길이 나고, 길 양쪽으로 길게 청사초롱의 불이 밝혀진다. 그 길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길이리라, 정보경은 그 길로 접어들어 지난 온 삶을 반추하듯 한 번, 두 번 뒤돌아보며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삶을 살아감은 또한 사라짐인 것이다. 춤 만든 이는 탄생과 죽음, 결혼과 출산, 그리고 이별과 죽음 등 여성의 굽이진 삶의 길 마디마디 중요한 순간들을 간략하게 소묘하며, 여성적 삶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등을 현대적이고 세련된 몸짓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를테면 정보경의 〈각시〉는 하회별신굿탈놀이의 각시탈 이미지에서 유추한 여성의 한세상을 짧은 춤 한판에 오밀조밀 재미있게 담아, 이를 색다른 몸짓과 퍼포먼스 그리고 놀이로 잘 형상화한 소담한 공연이었다.


춤의 은유와 환유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에서 그르메는 공연에서 정보경이 맡은 인물인 ‘나’ 안의 다른 나 혹은 타자이다. 그렇다면 나와 그르메는 하나이면서 둘이다. 하나일 때 그르메는 따듯하고 애틋한 추억 속의 나이고, 둘일 때 그르메는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나의 아버지일 것이다. 공연은 시종일관 나와 내 안의 다른 나 혹은 타자의 2인무로 진행된다.




정보경댄스프로덕션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정보경댄스프로덕션




조명이 들어오면 곰의 모습을 한 동물 탈을 쓴 건장한 남성 춤꾼이 무대 중앙 전면에서 서성이고 있다. 그르메는 ‘깊고 검은 연못’을 응시하고 있다. 자신의 거울상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대 뒤쪽 중앙에는 나 혹은 소녀가 누워있다. 그런데 둘의 관계가 묘하다. 하는 행위로 보아 주체가 분명하지 않다는 말이다. 곧 보통의 경우, 나인 주체가 거울이나 맑은 연못 물에 일렁이는 자기 안의 다른 나 혹은 타자를 대면하는데, 이 공연에서는 거꾸로 동물 탈을 쓴 타자 혹은 다른 내가 검은 연못 물에서 자기 모습을 찾으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역발상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도입부이다. 어쨌든 하나이며 둘인 소녀와 그르메는 서로 돌보고 보살피고, 그러다 삐치고 갈등한다.

“해가 밝아 오면 소녀는 잠에서 깨어나고, 그르메는 바닥으로 녹아들어 소녀의 그림자가 된다.” 그르메는 소녀의 그림자이자 분신이다. 그런데 그림자는 너무 밝거나 지나치게 어두우면 사라진다. 둘의 온전한 만남은 밝음과 어둠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하늘-막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젖혀지고, 그곳에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올 때, 둘의 기쁜 만남은 성사되고, 어둠도 아니고 빛도 아닌 사이-밝기에서 둘은 손을 맞잡고 정답게 블루스를 춘다. 이들의 춤은 하늘-막에 크고 분명하게 실루엣으로 비친다. 현실의 나와 나의 그림자가 화합하듯, 무대 위 현실적 차원의 춤과 하늘-막에 비친 잠재적 차원의 춤은 서로 공명하며 한층 더 따뜻하고 화목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정보경댄스프로덕션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정보경댄스프로덕션




공연은 점증적으로 의미를 쌓아가며 진행되고, 관객들은 정교한 미장센으로 구축되는 의미와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면서 점점 더 공연에 빠져든다. 두 춤꾼의 빼어난 춤도 몰입도를 끌어올리는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그렇지만 스토리텔링이나 의미가 전면에 나설 때 춤은 이것들을 부각하기 위한 보조역할을 할 뿐이다. 이 점이 못마땅한 것일까. 뜻하지 않게 갑자기, 남성 춤꾼이 쓰고 있던 탈을 벗으면서 힘들어 못 하겠다고 소리친다. 그동안 쌓인 의미 구조가 일시에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른바 서사극의 소외효과 연출법을 활용해 관객의 감정이입을 단번에 차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춤꾼은, ‘이것이 진짜 춤이야’라고 외치듯, 역동적인 춤을 춘다. 정보경은 길게 땋은 머리채를 잡고 돌리는 등 도발적이면서도 요염한 춤으로 관객들의 감흥을 최고로 끌어올린다. 의미나 스토리텔링보다 춤의 감응적 힘이 전경화되는 장면이다. 춤은 의미가 있는 춤에서 의미를 배제한 춤으로, 혹은 재현의 춤에서 감응의 춤으로 오가며, 둘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는 춤이 은유와 환유 사이에서 진동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곧 이번 공연에서 춤은 의미를 장면화하며 동화 같은 허구의 세계를 잘 재현하면서도, 동시에 춤 자체가 가진 물질적 힘으로 관객의 미세지각을 파고든다.






정보경댄스프로덕션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 ⓒ정보경댄스프로덕션




한바탕 격정적인 춤이 끝나면, 공연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나와 그르메는 무대 중앙 앞쪽과 뒤쪽에 일렬로 서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민다. 하지만 현실에서 둘은 너무 떨어져 있어 손을 맞잡지 못한다. 그러나 하늘-막에 비친 실루엣에서는 둘은 손을 잡고 있다. 현실적 차원에서 둘은 떨어져 있지만, 잠재적 차원에서 둘은 손을 맞잡고 있다. 그리고 앞뒤로 서 있던 둘이 서서히 자리를 맞바꾸면 실루엣으로 비친 둘의 크기도 서서히 바뀐다. 현실적 차원과 잠재적 차원 사이에 비대칭 혹은 불일치가 발생하면서, 나와 그르메 사이의 유대감도, 또한 그들의 존재감도 변화하는 듯하다.

정보경은 스테레오타입의 안무가는 아니다. 그녀는 콘셉트나 의미에 부합하는 춤동작을 짜는 능력이 출중하고, 이를 미장센으로 구축하는 실력이 남다른 안무가이다. 동시에 그녀는 춤이 가진 감응적 힘을 최대로 구사하며 개념 너머 혹은 의미 너머를 드러내는 파격과 일탈의 춤을 출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한 안무가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그녀는 춤 보는 이들을 의미 너머로 데려갈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몸적 역능을 갖춘 안무가이다. 근래 공연된 정보경의 작품 〈각시〉와 〈친애하는 나의 그르메〉는 이런 정보경의 재능이 미진함 없이 흡족하게 발휘된 공연이었다.

최찬열
인류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여러 대학과 대학원에서 춤과 공연예술, 미학과 관련된 과목을 강의했다.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
2022. 9.
사진제공_정보경댄스프로덕션, 김정한, 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