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연수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
색다른 스토리의 색다른 추진력
김채현_춤비평가

춘천공연예술제에서 공연된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8. 9. 춘천인형극장 대극장)에서 색다른 것을 만나게 되는데, 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그려낸 공연작이다.

춤꾼들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 춤이라 하겠지만 그렇게 가까운 춤을 갖기 전에 춤을 배우는 일이 먼저인 것이 상례다. 배움에서만 춤이 나오는 건 아닐지라도 통상적으로는 그렇다. 이렇게 보자면, 춤꾼들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춤이로되 춤꾼들에게 춤보다 춤 배우기가 먼저 가까웠다는 말이 성립할 것이다. 춤을 익히고 나면 춤 배우던 시절을 잊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더라도, 춤을 배워 익혔다는 사실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절대 다수의 춤꾼들이 이런저런 유형의 춤을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며 익힌다. 그래서 절대 다수의 춤꾼들은 춤을 배워 익힌 체험이 있고, 그것을 잊을 춤꾼이 얼마나 될까. 이와는 대조적으로, 춤을 배우고 익힌 체험 그리고 춤을 가르친 체험을 무대화한 경우는 없다기보다 아주 희소하다. 10년 전, 2012년 여름에 있은 김용걸의 〈Work 2〉에 발레 무용수들이 바(barre)들이 널린 스튜디오에서 발레를 익히거나 준비 연습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여기서 더 결정적으로는 발레의 새로운 틀을 익히도록 춤선생이 지도하는 순간이 작품의 매우 중요한 일부로 등장한다.(어떤 춤의 기본 과정을 무대에 그대로 올리는 공연들이 간혹 있었는데, 그런 공연은 춤 수련 기본 과정을 제자들이 곧이곧대로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므로 여기서 말하는 춤을 가르치고 익히는 체험 사례와는 무관하다.)

예술을 익히고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소재로 한 것들을 우리는 봐서 알고 있다. 문학에서 작가들의 작품 수련기는 흔하다. 가까운 예로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가 등단하게 된 연유, 무명 시절에 재즈 카페를 근 7년 동안 육체노동하듯 경영하며 겪은 고생담(자영업자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작가로서의 생활상을 여러 가지 자전으로 소개해서 독자가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더 잘 알고 있을지 모를 정도이다.(그래서 혹시 그의 새 자전이 나온다면 그닥 신선한 감이 들까 싶다.) 문학 분야를 벗어나면 그런 경우가 확실히 떨어질 테지만, 각 장르 예술 수련을 담은 작품 아닌 평전들은 흔하다. 아무튼 춤에서 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다룬 공연작이 국내에선 희소하고, 해외에선 모르긴 해도 공연작 아닌 다큐가 상당수 있을 것이다. 서연수의 안무작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가 색다르다고 짚어보는 이유는 이러하다.




서연수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 ⓒ김채현




〈걷다...〉 무대는 어느 남성(강요찬)이 알미늄 철제 사다리를 들고 들어와 무대 상수에다 배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작품 흐름에서 그는 춤선생(dance master)으로 밝혀지며, 〈걷다...〉는 춤선생이 춤을 가르치고 말하자면 제자들을 끝까지 보살피고 배려하는 면면들로 엮어내었다. 수십 명의 제자가 끝까지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춤선생의 실력은 물론 인품도 상당한 것으로 믿어진다. 제자들도 나름 열성을 다해 심지어 저돌적으로 분투하는 모습들을 보여서 스승과 한마음인 것을 읽게 된다.




서연수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 ⓒ김채현




사다리에 오른 선생은 홀로 고독하게 풍경(風磬)을 울리고 검정 셔츠와 바지를 걸친 젊은이들이 하얀 버선을 신고 무대 왼쪽에서 느리게 걸어가 오른쪽으로 퇴장한다. 전자 기타의 금속성 고음이 한 소절 분량으로 끝없이 반복된다. 바지에다 버선발 차림이 어색해 보이지만 그들은 진지하며 스승의 지도를 잘도 따르는 모습들이다. 엄지발가락 앞에 뒤꿈치를 사뿐사뿐 느리게 바꿔 놓으면서 한 발 한 발 디뎌가는 그들은 한국무용 전공자들일 것이다. 버선을 신지 않고 드레스 입은 사람도 두어 명 있고 드물게는 뛰어가서 퇴장한다. 사다리에서 내려온 춤선생은 멈춰선 드레스 차림의 한 사람의 머리와 팔 부위의 자세를 바로 잡아주거나 물뿌리개로 그 주변에 (물 없이) 물을 뿌리고 그 바닥의 흙을 다지는 연기도 수행한다. 춤선생이 흙을 다지고 나면 앞의 그 제자는 점차 꿈틀대다가 쪼그린 자세로 몸을 낮춘다.






서연수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 ⓒ김채현




이런 과정이 진행된 후 무대 왼쪽 공중에 수십 개의 풍경이 매달리고 그 아래로 무용수가 달려와서 쓰러졌다 일어나서 몸을 이리저리 일렁이자 풍경과 부딪치며 풍경소리가 난다. 풍경들 속에서 그는 제자의 자세를 손보아 교정하며 제자를 들쳐 매고 멀리 데려다 놓는다. 그러면 다른 무용수가 풍경들 아래로 뛰쳐와서 쓰러진다. 이어 버선발의 그 집단이 풍경 주변으로 모여들며 춤선생이 풍경을 규칙적으로 두들기면 모두들 함께 움직이며 풍경소리의 빠르게 변하는 높낮이에 맞춰 움직임도 급해진다. 여기서 공중에 매달린 풍경들은 아마도 제자들을 상징할 것 같고 춤선생의 손에 들린 풍경은 춤을 가르치는 이의 소도구에 해당할 것이다. 집단 모두가 풍경을 잡아 소리를 내고 어느 누구는 신들린 듯 춤을 추어내며 그 중 두 사람은 춤 기운이 오르는지 서로 몸을 포개어 같은 동작을 해내기도 한다. 앞서 버선발로 무대 좌에서 우로 이동할 적과 비교하여 춤 분위기가 더 고조된 것은 이 집단의 춤 수련과 그들 상호 관계가 더 깊어진 것을 암시할 것이다.

목탁소리를 배경으로 버선발의 사람들이 팔 놀리기와 양손을 골반 위에 맞춘 자세를 거쳐 바닥에 누워 여러 자세를 취한 후에 양발을 들어올려 버선발을 아래위로 놀리기를 반복한다. 그러기를 멈추고 모두들 버선발 바닥을 위로 향한 자세를 유지하자 나뭇가지 묶음을 든 춤선생이 나뭇가지를 발바닥에 꽂는 일종의 의식이 진행된다. 성장과 희망을 염원하는 장면으로 해석된다.






서연수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 ⓒ김채현




이어서 그들 모두는 검정 코트를 입고 입장하여 집단으로 당당하게 행군하는 움직임을 보인다. 약 7분간 진행되는 이 부분에서 춤선생은 보이지 않으며 코트 차림새로 보아 스승을 떠나 사회로 진출한 제자들을 묘사한 듯하다. 그들이 막판에 함성을 지르고 퇴장하자 바이올린의 격한 음향과 집단의 허밍이 뒤섞인 소리가 울리고 공중에서 푸른 종이 조각 더미가 엄청 쏟아진다. 간편복 차림의 제자 집단이 뛰쳐 들어와서 종이 조각을 헤집고 날리며 춤의 난장을 벌일 동안 사다리에서 스승이 종이조각들을 계속 뿌린 후 제자들이 사다리로 올라가 팔들을 휘저으며 무성하게 뻗은 나뭇가지들 같은 형상을 연출한다. 제자들이 나뭇가지를 언젠가는 거목으로 만들 것이다. 끝으로 춤선생 홀로 나뭇가지 묶음을 응시한다.




서연수 〈걷다, 바라보다 그리고 서다〉 ⓒ김채현




안무자 서연수는 프로그램북에서 밝히길 이 공연에서 “한국춤의 뿌리인 전통춤이 현재에 이르도록 어디까지 진화했는지”를 담아내려고 하였다. 〈걷다...〉에서 버선발의 모습이 작품의 전반부를 주도하다가 후반부의 코트 차림부터는 보이지 않는다. 이 대조적인 장면은 한국무용 부문에서의 세대 교체를 웅변하는 의미를 띤다. 코트 차림의 제자들은 사회, 즉 무용계 현장에 진출한 사람들로 해석되었고, 이 부분에서 보이는 당당한 행군, 양팔 쳐들기, 상체를 좌우로 격하게 기울이기, 양팔을 떨쳐올리기 등속의 집단 움직임들이 지금 무용계에서 낯설지 않아도, 그렇다고 흔한 것도 아니다. 그런 등속의 움직임이 흔해지도록 촉진하는 내러티브들이 더 나와야 할 것 아닌가 한다.

〈걷다...〉의 전반부에서 한국무용의 기본을 더 세밀하게 활용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크며, 후반부에서는 진행이 추진력은 있으나 구성은 단선적이어서 깊이 있는 전개를 등한시한 느낌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걷다...〉에서도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이분법은 소멸하고 있고 그래서 한국형 컨템퍼러리의 진폭도 확대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코트 차림 부분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그들의 당당한 행군은 주체성의 발로일 것이 분명하고 생머리를 마구마구 긁적이고 생머리를 휘돌리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수용될 것이고, 페미니즘의 실천과 밀접해 보인다. 막판에 종이 조각 더미가 쏟아지는 그 아래에서 한 사람(서연수)이 그대로 선 채 그 더미를 흠뻑 뒤집어쓰는 자세 또한 어떤 면에서는 새 탄생을 위한 저돌적 멍때림일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

2022. 9.
사진제공_김채현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