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국무용제전 ‘소극장 부문 경연’
한국춤의 동시대성을 추동하는 젊은 춤꾼들
최찬열_춤비평가

지난 4월 열렸던 제37회 한국무용제전의 대주제는 ‘Ecology 춤, 상생의 관점’이었다. 이는 오늘의 춤이 지속 가능한 지구와 서로 공존하면서 살아가는 인류의 삶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타진하면서, 아울러 춤의 사회적 가치를 제고하는 일이리라. 여기에 부합하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과 동덕여자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코튼홀 소극장에서 각각 열린 두 경연에 참여한 다수의 안무가는 환경과 생태계 문제에 관한 다양한 주제를 담은 작품을 선보였다. 그러나 대극장 부문 경연에 참여한 중견 춤꾼들이 인류가 직면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과 달리. 소극장 부문 경연에 참여한 젊은 춤꾼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 주제에 접근하고 있었다. 기실 춤추는 몸은 세계와 가장 가깝게 접해 있고, 그중에서도 젊은 춤꾼들의 몸은 다른 그 어떤 몸보다 한층 더 민감하고 예민하게 세계를 수신할 것이다. 이런 몸을 가진 젊은 춤꾼들은 당면한 현실적 이슈를 자기 나름대로 포착하고 소화해 동시대적 감성이 충만한 몸짓으로 시의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환유의 춤

최유민이 안무한 〈살아남은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2023년 4월 20일, 코튼홀 소극장)는 인류에게 치명적인 환경 파괴가 ‘있었음’을 가정하거나 전제한 공연이다. 곧 환경 파괴로 인해 탈출구 없는 세상에 갇힌 생명체들의 생존 분투기를 독창적인 움직임으로 풀어내고 있는 공연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 감싼 무대 중앙에 여성 춤꾼 한 명이 서서히 모습을 보인다. 그는 뭔가를 호소하듯 계속해서 입을 움직이며 말하지만, 그 말은 발화되지 않는 말이다. 그의 답답한 심정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객석에 전달되지 않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관객이 보기에 무대 오른쪽 앞에 또 한 명의 춤꾼이 등장한다. 그는 그곳에 놓인 의자에 기대 어딘가를 응시하고, 뭔가를 찾듯 무대 바닥을 주시하며, 그 주위를 가볍게 뛰면서 돌다가 무대 중앙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춤꾼 주위를 허리를 깊이 숙인 채 몸통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재차 뛰어 돌다가, 이번에는 다시 무대 왼쪽 뒤쪽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곳들에는 곧, 그가 잠시 머물다 지나간 무대 중앙과 오른쪽 앞, 그리고 왼쪽 뒤에는 낮게 걸려 있는 전등불 같은 조명 빛이 어스름하게 내리비치고 있다. 이어서 다른 춤꾼 한 명이 등장해 의자에 앉고, 무대 왼쪽으로도 한 명의 춤꾼 더 등장한다. 그들은 모두 길고 검은 원피스형 의상을 입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그들은 어떤 험난한 일을 당하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이들처럼, 춤추기보다는 멀리 바라보고, 뭔가를 갈구하듯 힘없이 한 손을 들어 올리며 하늘을 쳐다보고, 또 짙은 어둠을 헤치고 어딘가로 가고 싶은 듯 두 팔을 젓는 등의 퍼포먼스를 펼친다.



최유민 〈살아남은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



그들이 살아온 구구절절한 삶을 환기하는 듯한 담담하면서도 애잔한 구음 소리가 들려오고, 춤꾼들은 의자 주위에 모인다. 그 순간 환한 조명 빛이 무대를 잠시 밝힌다. 희망의 불빛처럼 보인다. 몹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뚫고 살아 나갈 수 있는 비상구를 발견한 이처럼, 그들은 활기차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다가 엉거주춤 일어나서 재빠르게 주변을 살피고, 두 팔을 앞뒤로 휘저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리저리 살피면서 그로테스크한 동작으로 조심조심 움직이는 그들의 모양새가 마치 촉수를 예민하게 더듬거리며 살금살금 걸음 질 치는 짐승의 몸짓처럼 보인다. 연이어 무대 양옆에서도 강한 조명 빛이 들어오고, 또 무대 여기저기에 강한 불빛이 비친다. 생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빛줄기는 보였다가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희망의 길처럼 보인다. 다른 삶으로 나아가는 통로, 혹은 탈출구를 따라 걷다가 뒤로 돌아서고, 다시 주변을 살피고, 팔을 휘저으며 앞으로 향하기를 반복하다가, 온몸을 뒤척이며 기어가고, 두 팔을 어깨높이로 올린 채 앞뒤로 젖히며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는 등, 희망의 빛줄기를 따라 느리면서도 진지하게 걸어가는 그들의 독특하고 감각적인 움직임이 퍽 인상적인 대목이다. 그러다 뒤로 돌아서며 가던 길을 멈추고, 지쳐 포기한 사람처럼 눕고, 무대 여기저기로 바쁘게 움직이며 방황하다가 부질없이 의자를 손에 들고서 흔들거리거나 발에 걸어 이동하기도 한다. 품었던 생각이나 기대, 희망 등을 아주 버리고 더 이상 그 무엇도 바라고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최유민 〈살아남은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



많아진 빛줄기가 복잡한 길처럼 얽혀들면서 춤꾼들이 어느 길을 따라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들 중 일부는 뒷걸음질 치거나 잔걸음으로 신중하게 길을 찾다가 허공을 쳐다보며 퇴장하고, 두 명의 춤꾼만 무대에 남는다. 둘은 무대 중앙을 세로로 가르는 가늘고 긴 조명 빛을 사이에 두고 손으로 턱을 바친 채 상념에 빠진 듯 엎드려 누워 객석을 응시한다. 그리고 우산으로 조명 빛을 차단하고 가리는 남성 춤꾼 한 명과 두 명의 춤꾼이 다시 그들 뒤에 등장한다. 곧이어 무대 중앙 바닥에는 제법 큰 둥근 조명이 한동안 일렁이다가 사라진다. 빛을 쫓아 다른 삶으로 향하던 그들의 꿈이 허망하게 사라지는 듯한 다소 몽환적이고 우울한 장면이다. 남성 춤꾼 한 명이 거기에서 한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입을 크게 벌리고 절규하듯 몸통을 비틀고, 나머지 춤꾼들은 무대 왼쪽 뒤에 모여 불빛을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거나 의자에 앉아 사지를 꿈틀거린다. 무대 중앙의 남성 춤꾼이 거기로 다가가 두 손으로 의자를 들자, 대각선 방향으로 가늘고 긴 조명 길이 생긴다. 다시 생긴 희망의 길을 따라 그들이 걸음을 옮기자, 무대 세 곳을 구획하고 나누던 세 개의 조명이 깜빡깜빡 불을 밝히다가 사라지고, 급기야 무대에는 의자 하나만 남겨진다.





최유민 〈살아남은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



최유민의 이번 공연은 환경 파괴가 야기한 디스토피아에서 새 희망을 찾는 생명체들의 절규를 감각적인 몸짓으로 그리고 있다. 비록 공연이 환경 문제에 관한 거대서사나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는 것도 아니고, 또 이것에 관한 묵직한 콘셉트를 구체적으로 장면화하는 것도 아니지만, 공연에서 몸짓이나 퍼포먼스는 희망, 탈출구, 꿈, 나아감 등 무언가를 찾고, 욕구하고, 헤쳐 나가는 진취적 키워드를 연상시킴으로써 심각한 환경 파괴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요컨대 〈살아남은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적이면서도 규정적인 몸짓으로 환경 파괴에 관한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대신에, 환경 파괴가 ‘있었음’을 정서적으로 환기하는 환유적 춤과 퍼포먼스를 통해 이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촉구하는 공연이다.


감응의 춤

송윤주는 〈알〉(4월 22일)에서 자전적인 성장 스토리를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 풍기는 흡인력 있는 춤으로 풀어내고 있다. 알 속에 편안하게 있다가 그것을 깨고서 나오고, 홀로 방황하다 자기 길을 찾아 굳세게 나아가는 흔한 이야기 구조로 진행되는 공연이지만, 이 공연이 결코 진부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트렌디한 감각을 품고 있는 송윤주의 한국적 몸짓이 불러일으키는 감응이 남달라서 일 것이다. 알을 나타내는 돗자리를 이용해 꾸민 첫 장면이 강렬하다. 무대 중앙에 길고 넓게 깔린 돗자리에 조명 빛이 서서히 들어오면, 그 밑에서 꿈틀거리던 한 명의 춤꾼이 팔과 몸통을 먼저 돗자리 밖으로 쑥 내밀더니 곧바로 거기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선다. 검은 의상을 입고 있는 그는 객석을 향해 서서 용트림하듯 두 팔을 위로 휘저으며 몸통을 비튼 후, 돗자리 밑에 누워 있는 다른 춤꾼을 온몸으로 한 번 짓누른 다음 돗자리를 끌고 무대 뒤로 사라진다. 끌려가는 돗자리 끝자락에는 여성 춤꾼 한 명이 상체를 반쯤 내민 채 두 팔을 살래살래 젓는 모습이 보인다. 검은 의상을 입은 남성 춤꾼이 그곳에서 빠져나오려는 그를 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송윤주 〈알〉



무대가 암전되었다가 다시 밝아지면 무대 중앙에는 돗자리가 깔려있고 그 위에는 흰 의상을 입은 여성 춤꾼이 누워 있다. 그는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돗자리/알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협소한 반경의 돗자리는 알 속과 같이 그를 제한하고 있고, 그런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요동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가장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는 남성 춤꾼이 돗자리로 그를 덮거나 감싸며 가두려 한다. 벗어나려는 이와 가두려는 자의 힘겨루기가 팽팽하게 전개되고, 대항하며 맞부딪치는 두 힘의 파장으로 돗자리가 갖가지 형상으로 변형된다. 벽처럼 우뚝 서 나가려는 이를 가로막고, 텐트나 집처럼 그를 가둬버리고, 또 긴 치마처럼 그의 허리를 감싼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그것을 물리치고 엎드려 누운 채 기어서 돗자리/알을 벗어나는데, 그가 빠져나온 뒷자리에 둥글게 말려 남겨진 돗자리가 마치 동물이나 새의 긴 꼬리처럼 보인다. 요모조모로 다채롭게 변형되는 돗자리가 풍기는 아련한 한국적 정서와 은은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장면이다.



  

송윤주 〈알〉



이윽고 그곳을 빠져나온 그는 두 발을 굳게 딛고 두 팔을 날개처럼 펼치며 일어나 조심스럽게 주변을 탐색한다. 그러다 무대가 컴컴해지면서, 그는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엄습한 듯, 혹은 지금 막 홀로 된 삶을 지탱하기에는 힘에 부친 듯 두 손으로 자기 몸 여기저기를 더듬으며 뒷걸음질로 무대 왼쪽 앞 벽면까지 가, 그곳에 등을 붙여 선다. 하지만 그는 어려운 현실을 견뎌내고, 극복하기 위해 다짐한 사람처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사설이 얹힌 중간 빠르기의 심방곡이 애잔하게 흘러나오고,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서 있던 그가 두 팔을 크게 벌리며 서서히 걷는다. 그 순간 무대를 좌우로 가로지르는 길 조명이 길게 깔리고, 그 길을 따라 춤꾼은 느리게 이동한다. 누워서 기다가, 쪼그려 앉은 채 종종걸음으로 걷다가, 일어나 허리를 숙인 채 걷는 등, 힘들게 무대 오른쪽 끝부분에 와 앉은 그는 두 손으로 양 뺨을 짝짝 친다. 지난한 과정을 겪는 가운데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찾아온 것일까, 그는 일어나 잽싸고 날렵한 춤을 추기 시작한다. 난관을 뚫고 나아가는 사람처럼, 또 훨훨 날아오르려는 새처럼 활달하면서도 생생한 춤이다.



송윤주 〈알〉



춤을 추던 그가 일순간 무대 뒤쪽에 쓰러지자, 무대 중앙에 둥글고 파란 조명 빛이 떨어진다. 잠시 그것을 응시하던 그가 일어나 등을 보인 채 우뚝 서서 두 팔 벌려 높이 쳐드는 순간, 빠른 비트의 음악과 함께 구음이 흘러나오고, 그와 동시에 무대 위 사방에서 큰 기둥 4개가 서서히 내려온다. 흰색과 초록색, 파란색과 빨간색 기둥은 춤추는 이 주위 사방(四方)에 내려앉아 세워지고, 춤꾼은 그것들 사이에서 격렬하면서도 생기 있는 춤을 이어간다. 먼 비상을 준비하는 새의 날갯짓처럼 한 팔 한 팔 번갈아 퍼떡이다가 두 팔을 동시에 반복적으로 쫙 펼치며 높이 솟아오르는 새의 형상을 빼어나게 묘사하는 생동감 넘치는 춤이다. 기풍 당당하게 자기 세상을 펼쳐나가고자 하는 호쾌한 기백과 굳센 의지를 힘차고 왕성하게 드러내는 자유와 해방의 춤이다. 색깔이 칠해진 둥근 4개의 기둥이 자아내는 형(形)과 색(色)의 시각적 이미지와 빼어난 춤이 조화롭게 어울려 보는 이들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끄는 대목이다.



송윤주 〈알〉



춤 공연에서 스토리텔링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수는 있지만 궁극적 요소는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송윤주는 이를 과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공연 내내 부드러우면서도 역동적이고 섬세하면서도 절도 있는 춤으로 관객들의 감성을 파고든다. 옹골차서 짙은 정서적 감응력을 지닌 그의 춤이 예사롭지 않다. 한국적 몸짓에 현대성과 동시대성을 입힌 송윤주의 춤이 돋보인 〈알〉은 메시지가 명징하면서도 젊은 감각이 살아 넘치는 공연이다.


은유의 춤

보연이 안무한 〈균형을 위한 변주〉(4월 22일)는 자연과 문명, 탄생과 죽음, 질서와 무질서가 반복 교차하는 와중에 형성되는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애쓰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춤 만든 이가 보기에 이는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우리의 삶을 바로 세우는 일이며, 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동물 등이 상생하는 조화로운 삶이다. 요컨대 보연은 이번 공연에서 긴 나무 작대기를 든 춤꾼들의 정갈하면서도 간결한 몸짓으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며 한데 섞여 어우러지는 화목한 삶을 이루자고 제안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삶이 자연과 환경을 지나치게 무시하며 사는 불균형한 삶이라는 말일 것이다.

첫 장면이 인상적이다. 각각 여러 개의 긴 나무 작대기를 든 두 명의 춤꾼이 무대 중앙에 서 있다. 혼란스럽게 얽히고설켜 쭉쭉 비집고 나온 작대기들 사이에 갇힌 춤꾼들이 덫에 걸린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다르게는 무질서한 자연과 한데 어울린 인간의 모습 같기도 하다. 두 춤꾼이 드러나지 않게 가만히 몸통을 흔들거리고 있는 사이에 다른 춤꾼 한 명이 무대 오른쪽 앞으로 짐승처럼 옆으로 기면서 등장해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는 나무 작대기 하나를 빼내 들고서 바닥에 짚고, 그것을 지렛대 삼아 빙빙 돌다가 무대 바닥에 놓는다. 하나의 선이 무대 바닥에 새겨진다. 그리고 또 하나를 빼내 그것과 붙여 놓는다. 선이 면을 형성하면서 무질서는 질서가 잡혀간다. 그리고 그도 놓인 작대기 옆에 눕는다. 그러자 이번에는 작대기를 든 두 명의 춤꾼이 서서히 움직이며 작대기로 삼각형과 사각형 모양을 완성한다. 작대기들이 이어져 어느새 무대 바닥에는 기하학적 공간이 형성된다.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겨나듯, 자연에서 문명이 형성되는 형국을 압축해 보여주는 간결하면서도 의미심장한 퍼포먼스이다.





보연 〈균형을 위한 변주〉



그러다 세 명의 춤꾼은 작대기를 들고 이리저리 견주어 보고 살피고 움직여 보다 이를 연결해 허공에 삼각형을 새기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그리고 이 삼각형을 바닥에 질서 있게 놓인 작대기와 연결해 세운다. 이차원 평면과 삼차원 공간이 연결되며 입체 공간이 생겨난다. 인류가 건설한 질서가 잘 잡힌 문명 세계를 나타내는 메타포일 것이다. 이어서 그들은 작대기로 무대 바닥에 두 개의 정사각형을 만들어 붙여 놓고, 두 개의 틀 안에서 각각 나뉘어 춤을 춘다. 첫 장면과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그들이 비뚤어지거나 기울지 않아 반반하게 틀 잡힌 문명 속에 갇힌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한 상황에 부닥친 답답함과 갑갑함을 토로하듯, 그들은 다른 사각형으로 넘어가 춤을 춰보기도 하고, 한동안 다소 거칠게 춤추지만, 급기야는 작대기를 들고 허물어 정사각형 밖으로 튀어나온다. 작대기를 요리조리 연결하고 해체하는 춤과 퍼포먼스로 어떤 경우에는 혼란스러운 자연을, 또 다른 경우에는 반듯한 문명을 지시하는 은유적 표현법이 두드러져 보이는 공연이다.





보연 〈균형을 위한 변주〉



무질서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질서 잡힌 문명사회를 건설해 보지만, 이도 저도 다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이 취할 삶의 방식 혹은 질서는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마치 그것을 탐색하고 모색하는 사람들처럼 작대기를 이렇게 저렇게 붙여서 세워보고, 겹쳐서 놓기도 하지만 뾰족한 방법은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깊은 상념에 빠진 이들처럼 무대 중앙 뒤에 모인 그들은 두 발을 들고 누운 이의 발 위에 작대기 하나를 올려놓고 저울이나 시소처럼 이쪽저쪽으로 기울여 보지만, 해답을 찾지 못한다. 곧바로 둘은 퇴장하고 한 명의 춤꾼만 무대 중앙에 남는다. 그 순간 무대 천장에서 긴 추가 무대 바닥까지 내려와 크게 원을 그리며 빙빙 돌기 시작하고, 그 안에 남은 춤꾼이 작대기로 바닥을 뒤척이며 해법을 찾기 위해 고민에 빠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그들이 찾고자 한 질서는 완전하게 평평한 균형을 이룬 질서도 아니고 또 자연이나 문명, 둘 중 어느 하나로 치중한 질서도 아닐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 도달하리라 믿지만, 심히 미심쩍은 완전한 균형 상태가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조금조금 바꾸고 변화시키며 차차 균형에 이르는 ‘불완전한 완전’ 상태, 곧 자연과 문명, 질서와 무질서 사이의 기우뚱한 균형일 것이다. 보연의 이번 공연 〈균형을 위한 변주〉는 이런 질서와 균형을 통해 황폐해진 자연 상태를 회복하고, 우주의 온갖 생명들이 한층 더 조화롭게 살자는 문명 비판적인 관점을 내보인 공연인 셈이다.



보연 〈균형을 위한 변주〉



올해 한국무용제전 소극장 부문 경연에 참여한 몇몇 젊은 안무가들, 특히 최유민, 송윤주, 보연과 차분하면서도 안정적인 공연 〈木, 숨〉을 안무한 윤효인 등은 대극장 경연대회에 참가한 다수의 중견 안무가와 달리 기존의 한국춤 창작 관행을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으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감각을 담은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였다. 비록 파격적인 실험으로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경향을 보인 것은 아닐지라도, 그들은 관습적으로 계승되고 파급되며 공시적 차원으로 펴져 나가는 기존 취향에 충격을 가하면서 나름대로 변형을 꾀하고 있었다. 기실 젊은 춤꾼은 기존의 창작 관행을 단순하게 반복하거나 답습하는 자가 아니다. 외려 그들은 기존의 춤이 가진 결핍성을 포착하고 진단해 새로운 춤적 주체화의 유형을 제시하고 입증하는 자이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춤적 가치와 새로운 몸짓 감각을 창안하는 전복의 춤꾼이고, 언제나 기성의 춤, 주류 춤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발칙하고 재기발랄한 춤꾼이다. 그래서 동시대 젊은 한국춤 안무가들은 기존의 한국춤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곧 새롭게 생성하고 변형되면서 변화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그것에 깊이 각인돼 쉬이 변하지 않는 고착된 관행과 구태를 타파하는 춤적 소수화를 실천하는 자일 것이다.

최찬열

한국춤과 현대춤, 전통춤과 탈춤을 추었고, 인류학과 미학을 전공했다. 춤과 공연예술, 미학과 관련된 과목을 강의하다가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며, 춤문화연구소에서 미학과 춤 역사를 강의한다.​​​

2023. 6.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