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렐조카쥬 〈백조의 호수〉
관객을 미혹시키기엔 한참 부족한 마법
방희망_춤비평가

앙쥴랭 프렐조카쥬의 최신작(2020) 〈백조의 호수〉가 LG아트센터 무대에 올랐다(6월 22~25일, 필자 24일 관람). 그의 스토리 발레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백설 공주〉가 2014년 내한한 바가 있기에, 필자와 같이 당시의 달콤 쌉싸름한 감동을 기억하고 있는 팬들은 이번 작품에 대한 기대치도 상당히 높았으리라 본다.

〈백설 공주〉는 자칫 무거울 수 있는 말러의 교향곡들에 숨어 있는 위트까지 잘 찾아내, 살아 펄떡이는 육신의 현란한 이미지로 변환시킨 재기가 훌륭했다. 생모의 출산과 죽음- 새엄마의 욕망- 백설 공주의 사랑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서사는 작품 전체를 추동하는 난쟁이 일꾼들과 왕자의 건강한 에너지와 교차되면서, 염세적이나 그 누구보다 생의 강렬한 욕구로 들끓었던 작곡가의 음악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물론 하이힐을 신은 채 출산하는 생모라든가, 짙은 분장의 새 왕비와 대조되게끔 베이비 페이스로 발탁된 백설 공주의 외모는 장 폴 고티에의 의상과 더불어 안무가가 그리는 여성상이 가볍고 패셔너블한 쪽에 치우쳐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자연스럽고 다면적인 욕구를 담아낸 발레 작품은 흔치 않기에 반가웠다. 또한 말러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를 마냥 신파조로 소비하지 않은 안무가의 세심한 감각이 좋았다. 게다가 왕자가 고답적인 외모와 배경을 가진 주인공이 아니라 유머와 따뜻한 애정을 건네며 외로운 백설 공주를 포용하고 견인해주는 인간적인 면모를 지녔기에 이 작품에 열광했던 것이다.

〈백조의 호수〉를 관람하면서 음악을 분위기에 맞게 조탁해내는 안무가의 솜씨는 여전하다고 느꼈다. 배경을 현대로 옮겨온 것에 어울리게끔, 차이코프스키의 익숙한 음악은 상당히 빠른 템포로 전개된다. 필자는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백조의 호수〉를 들을 때면-연주회용 버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과연 여기에 어떻게 맞춰 춤을 추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번에 사용된 버전의 음악은 그에 필적하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빠르다. 템포도 그렇지만 음울한 복선을 깔고 있는 음악이 무겁게 나아가려는 무렵 무조의 전자 음악으로 변주되는 구간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런 음악의 진행 과정을 경험하면 안무가가 기존 〈백조의 호수〉에서 애상적으로 흐르는 분위기를 최대한 탈피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여기엔 운명에 대한 깊은 고뇌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리하여 속도감 있는 음악은 지크프리트 일가의 파티 장면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들이 배경에 쓰인 주가 지표의 움직임만큼이나 즉물적인 욕망을 표출하는 현대인들로 보이게끔 돕는다.



앙쥴랭 프렐조카쥬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studio AL



백조 장면의 생동감 있는 템포도 어느 정도의 주체성을 대변하려고 한다. 사실 관객이 그저 달밤을 감상하고 있다가 로트바르트 무리에 의해 갑자기 백조로 변해버린 오데트를 보고 시놉시스 설명대로 ‘환경 문제에 관심 많은 젊은 여성’이라 연결하기엔 무리가 많다. 〈백설 공주〉에서 출산과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는 생모의 전사(前史)는 한낱 동화에다 삶과 죽음을 동시에 엮어내는 강렬한 복선 역할을 담당하는 데 비해 〈백조의 호수〉의 첫 장면은 여성의 옷을 벗겨 백조로 변신시키는 자극적인 눈요기만 될 뿐 어떤 주제 의식을 천명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허점을 그나마 보완해주는 것이 연출과 춤의 변화다.



앙쥴랭 프렐조카쥬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studio AL



오데트를 16인의 백조 군무를 함께 하다 톡 튀어나오게 연출한 것이나, 오데트 배리에이션을 백조들의 군무로 바꾼 것, 백조들의 팔 움직임이 짧게 툭툭 끊듯 튕겨지며 고아한 데 머물지 않고 생동감 있게 처리된 점 등은 무척 신선했다. 주역의 존재를 아예 없앨 수는 없지만 평등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시선에 맞게 군무에 보다 풍부한 표정을 부여한 것인데, 형식적인 면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이들이 로트바르트에게 끌려오기 전에는 발랄한 여성들이었다는 설정을 일견 수긍하게 만든다.



앙쥴랭 프렐조카쥬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studio AL



안무가는 1장에서 도시의 마천루 풍경, 2장에선 호숫가에 시추선의 탑이 올라가는 장면을 연속적으로 제시하며 이것이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각인시켜왔다. 빠른 음악 때문에라도 감상적인 기분에 젖지 않고 현대인의 시선을 유지하며 지켜보던 관객에게는 당연한 수순으로 두 주인공도 현대성을 획득했는지가 주요한 관심사가 된다. 그런데 오데트와 지크프리트의 파드되에서부터 고전의 형식을 답습하면서 〈백조의 호수〉를 현대로 가져오려는 노력은 힘을 잃기 시작한다. ‘개발을 방해할 것 같아’ 백조로 만들어버렸다 하기엔 오데트의 신념이나 움직임이 이렇다 할 것이 없고, 파티에서 힙한 복장으로 한껏 흐드러진 춤을 추며 자유분방한 반항아임을 뽐냈던 지크프리트는 아버지에 굴복하기에도 모자라 애인도 못 알아보는 바보 멍청이로 전락하고 만다.



앙쥴랭 프렐조카쥬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studio AL



고전에서는 백조의 아름다움에 인간이 비련의 운명을 투사하길 원했기 때문에 남이 조종하는 대로 끌려다니는 수동적인 백조로만 그려도 괜찮았다. 저주를 풀 방법도 영원한 사랑을 약속받는 것 하나면 되었다. 순수한 마음 그 자체가 중요했기 때문에 행복하거나 비극적인 결말 모두 상관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랑이 성립되려면 기득권층의 개발 이익을 물리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유약한 부잣집 도련님이 혼자 해결하기엔 애초에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다!

안무가가 구도에 복잡함이 더해져야 그만큼 지크프리트의 실패가 설득력 있다고 여겼는지 폭군 같은 아버지와 눈치 보느라 행복하지 않은 어머니의 역할을 새로 부여했지만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이, 가족 안에서 극복하지 못해 실패한 것처럼 끌고 나간 것은 너무나 균형감이 맞지 않았다. 욕심 많은 기업가가 하필이면 마법을 부리는 재주까지 있어 자기에게 반대하는 여성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백조로 만들어버린다면 이것은 집단 실종 문제로 취급되어 수사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나.



앙쥴랭 프렐조카쥬 〈백조의 호수〉 ⓒLG아트센터/studio AL



작품의 응집력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장면은 3장의 의자 군무였다고 생각한다. 의자에 붙박인 채 선보이는 군무는 현란한 볼거리여서가 아니라 기득권층이 자신이 가진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는 힘을 과시하는 장면으로 읽혀서 대단히 위압적이고 상징적이었다. 그런 만큼 이 장면 바로 뒤에 비록 규모를 축소하긴 했지만 해오던 대로 디베르티스망을 넣고 오딜에게 유혹당하는 장면을 넣은 것은 패착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관객이 기대하는 중요한 춤들, 안정적인 흥행 코드들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기껏 사회적 이슈를 끌고 와 대결 구도를 만들어 놓고 결국은 고전에 의지해 순진한 도련님이 속아서 절대악에 참패하게 되었다는 식의 결말은 퇴행해도 한참 퇴행한 것이 아닐까?

현대에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판타지가 가능하다면 적어도 백조 떼들이 몰려와 시위하다 장렬히 전사하는 판타지도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마법의 스펠은 한 글자만 틀려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관객을 움직이는 마법을 걸려면 그만큼 철저해야 하는 법. 공연은 지반을 뚫고 나오는 시커먼 원유에 몸뚱이가 파묻혀 떨며 죽어가는 백조 떼를 처절하게 묘사하고 그걸 끌어안고 울부짖는 지크프리트의 모습으로 막을 내리는데, 예술계에서 수박 겉핥기라도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칭찬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프렐조카쥬의 신작 〈백조의 호수〉는 허점이 많은 이야기 구조를, 고전과 창작 사이에 적당히 발을 걸치며 감춰보려다 빛을 잃은 작품이 되었다.

한편 내용과 상관없이 이번 공연의 MR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는 것을 기록해둔다. 필자는 바이올린의 고음이 내는 쇳소리를 상당히 경계하는 편인데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으며, 4장의 서두에 관악기들이 포효하듯 터져 나오는 음향은 아주 생생하게 다가왔다. MR에서 악기들의 선율과 소리가 한 올 한 올 잡힐 듯 선명한 경험은 흔치 않다. 원래 사용한 음원의 질이 좋았거나 시그니처 홀의 출력하는 스피커가 좋았거나 둘 다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국내 공연에서도 이처럼 MR 반주를 사용하고도 만족스럽게 관람하는 경우가 많아지길 바란다. 반면에 마룻바닥은 지연 입장하는 관객의 발소리나 물건 떨어뜨리는 소리를 여과 없이 확대해 관람에 방해가 되게 하는 측면도 있었다.

방희망

2013년 제1회 한국춤비평가협회 춤비평신인상을 통해 춤비평가로 등단했다. 현장 비평가로 다양한 춤 공연에 대한 비평작업을 하고 있으며, 한국춤비평가협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3. 7.
사진제공_LG아트센터, studio AL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