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울시무용단 〈엘리자베스 기덕〉
그림 소재들을 다잡을 캐릭터, 형상화 요구돼
김채현_춤비평가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훨씬 더 전 구한말 이래 한반도 조선을 여행한 서양 사람들의 기행문이나 사진 자료는 더러 알려져왔었다. 정치사회적으로 혼돈이 끊이지 않던 당대 조선에서 어느 부문에서든 기록마저 부실했던 터여서 이방인들의 그런 자료들은 이즈음에도 주목을 끌기 마련이다. 엘리자베스 키스(E. Keith, 한국명 기덕)라는 영국 여성 화가가 삼일운동이 한창이던 시기에 조선을 방문하여 받은 인상들을 수채와 목판으로 담은 그림은 기행문, 사진과는 유다른 기록물로서 가치가 크다. 서울시무용단의 〈엘리자베스 기덕(奇德)〉(11월 2~5일, 세종문화회관 엠극장)은 키스의 그림들을 소재로 삼아 조선을 향한 화가의 애정어린 시선과 마음을 짚어내었다. 그 당대 이방인들이 조선에서 느낌 직한 관심과 정서를 춤화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의 기억 구하기 작업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어서, 이모저모 상념에 젖게 하는 공연이다.



서울시무용단 〈엘리자베스 기덕〉 ⓒ세종문화회관



춤 공연 〈엘리자베스 기덕〉은 전체 일곱 장으로 구성되고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덧붙여졌다. 각 장들마다 키스의 그림들에 담긴 정경을 무대화하면서 독립된 에피소드를 제시한다. 예컨대 제1장에서는 훈장을 따르는 아이들, 엄마 손잡고 나들이 나온 어린애들, 일하는 일상의 여인들, 곰방대 들고 장기(將棋) 두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는 남정네들의 모습이 이어진 것으로 기억된다. 다른 장들에서는 신랑이 보이지 않는 혼례 잔치와 신부의 모습,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해서 용수를 쓰고 끌려가는 사형수들, 한맺혔을 혼령을 불러들이는 무당굿, 사연을 품고 사람들이 찾은 금강산의 정경, 어둠 속을 헤집고 등장하는 연등놀이 등의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무대에 재현되는 것은 그림 이미지들에 담긴 에피소드들이다.



서울시무용단 〈엘리자베스 기덕〉 ⓒ세종문화회관



〈엘리자베스 기덕〉에서 우리는 삼일운동이 번져가던 그 시기 민중들의 다양한 동태들을 접하게 된다. 그러한 동태들을 그려내는 장과 장 사이에서 인과성은 일부분희미하게 짐작되고 대체로 뚜렷하지 않는다. 키스의 그림첩을 넘기며 음미하듯이 무대 위 이미지들의 전개에 따라 관객이 당대를 떠올리고 감지하는 식의 전개가 뼈대를 이룬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 이미지들은 시종일관 키스의 시선에 충실하며 때때로 키스의 소회(所懷)가 강하게 곁들여진다. 키스의 소회는 당대 조선의 상황에 대해 키스가 (영국의 언니에게 보냈다 하는) 편지에서 피력한 문구들과 무채색 조의 디지털 이미지로 구현되었다. 이와 아울러 양장 차림을 한 키스는 프롤로그에서는 파도가 휘몰아치는 절벽을 바라보고 에필로그에서는 조선 민중들이 신발을 가지런히 널려둔 휑한 무대에서 키스가 퇴장하면서 공연이 암전된다. 이처럼 〈엘리자베스 기덕〉은 키스의 시선과 의중을 충실히 쫓고 반영하였다.



서울시무용단 〈엘리자베스 기덕〉 ⓒ세종문화회관



무대 바닥에서부터 정면 벽까지 대형 두루마리 족자를 닮은 장치가 드리워지고 거기에 그림과 여러 이미지들이 투사되어 입체감이 조성되었다. 공연 소개에 따르면 키스의 그림 24점이 소재로 활용되었다. 키스가 남긴 그림들은 시각적으로 풍부한 편이어서 이번 무대에서 그림을 만나는 즐거움이 뚜렷하였다. 이에 비하여, 무대에 등장하는 그림들 사이에 유기적인 연결점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이들 그림은 조선 민중을 그린 키스의 그림들이라는 아주 느슨한 의미망을 갖는다. 다시 말해 〈엘리자베스 기덕〉의 전체 7장에서는 이미지화된 당대의 정경들이 단편적으로 나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때문에 무대 위에 구현된 이미지들이 전달하려 한 것이 정작 무엇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서울시무용단 〈엘리자베스 기덕〉 ⓒ세종문화회관



키스의 그림도 그러하지만 공연물 〈엘리자베스 기덕〉은 복고풍(레트로)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근대를 회상하기를 의도하였을까. 혹은 이 공연은 어느 이방인 화가의 시선을 통해 당대 조선, 조선 민중의 역경과 시련과 정경을 표현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공연에서는 이들 면면이 짤막하게 감지되는 한편으로 장면 장면들의 나열로 인하여 키스 그림들의 평이한 재현이라는 인상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서울시무용단 〈엘리자베스 기덕〉 ⓒ세종문화회관



이 공연에서 그러한 그림들을 다잡아 엮을 것은, 전체 공연의 구성으로 미루어 보아, 키스라는 인물이다. 장과 장 사이에,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자주 등장하는 키스의 편지 문구와 무채색 이미지(한지 위의 색조 번짐이나 나염 효과로 이루어진 도형들) 같은 요소들을 통해 키스의 앞서 언급된 애정어린 시선, 즉 조선에 대해 눈뜨고 조선인들의 의연한 기상에 놀라워하고 조선의 시련을 자신의 일처럼 직시하고 공감하는 휴머니스트적 마인드가 표현된다. 이밖에 키스의 시선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도 엿보이며 또 키스는 공연 중간중간에서 당대 조선을 관찰하고 주로 편지 문구로 증언하는 역할자의 모습을 보인다. 이 같은 전반적 흐름 속에서 무대 위에 엘리자베스 키스는 있으나 조선에 공감하는 어떤 관찰자에 머물러 그 캐릭터는 미약하였으며 키스의 행동(액션) 또한 그러하였다. 말하자면 키스의 감정선이 편지 문구, 나염 이미지, 재현된 그림 장면으로 대변됨으로써 공연의 밀도는 낮은 편이었다. 또한 키스와 조선(민중)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로 서로 간에 거리감이 느껴진다. 이로 인하여 〈엘리자베스 기덕〉에서는 키스의 조선 그림 그리고 엘리자베스 키스라는 인물이라는 두 요소 가운데 전자가 도드라져 보인다.



서울시무용단 〈엘리자베스 기덕〉 ⓒ세종문화회관



키스는 자신의 이름을 기덕(奇德)으로 개명할 만큼 조선에 열렬했다고 하며 그림의 낙관(落款)이 이를 말해준다. 그렇지만 〈엘리자베스 기덕〉에서 키스의 캐릭터를 떠받칠 움직임 또는 액션이 미미했던 탓에 약한 의미망 속에서 키스 그림들마저 단편적으로 수용될 뿐이다. 바로 이 점에서 공연작 〈엘리자베스 기덕〉의 정경들은 그림 스틸 컷들을 비유컨대 마치 무대 위의 연속 영상이나 애니메이션으로 개작한 것처럼 다가온다. 일곱 개의 장에서 장마다 다른 이미지와 에피소드에 따라 움직임과 무대 구도 그리고 의상과 음향 역시 차별화되는 열의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단편적 형상화라는 기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키스의 시선(과 역할) 그리고 키스의 그림, 양쪽 사이의 조화 내지 균형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서울시무용단 〈엘리자베스 기덕〉 ⓒ세종문화회관



부수적으로, 이번 공연에서 떠오른 생각을 추가 제시하면서, 대안을 기대한다. 먼저, 일반적으로 공연 환경이 호전되고 신소재 기술이 진화함으로써 저비용으로도 용이한 때문인지 몰라도 최근에 올수록 공연 무대들이 화려해지는 경향이 짙어진다. 칙칙한 무대보다는 명쾌한 무대를 선호하는 본능적 감성과 시대 감각을 존중해야 하더라도 신중하게 고려할 점은 있을 듯하다. 일례로 이번 무대에서 의상의 색감과 광채가 100년 전 20세기 전반기 조선의 실상과 얼마나 부합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는 당대 조선 민중의 정경-실생활의 정경을 여실하게 전달할 감성을 구현하는 과제와 직결될 것이다. 둘째, 이번 공연에는 키스의 편지 문구를 중심으로 여러 문자 메시지와 낭송이 삽입되었고 영문(英文)도 곁들여졌다. 메시지의 문자들은 또렷하지도 시원스럽지도 않았고 영문은 우선 불편하였다. 불편하지도 않고 거부감이 없는 명쾌한 전달 방식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김채현

춤인문학습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명예교수. <춤웹진> 편집장.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고 춤·예술 분야 비평 수백 편과 저서 『춤과 삶의 문화』 『춤, 새로 말한다 새로 만든다』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1)을 비롯 다수의 논문, 공저, 『춤』 등의 역서 20여권을 발간했다. <국립무용단 60년사>(2022년 간행, 국립무용단)의 편집장으로서 편집을 총괄 진행하고 필진으로 참여하였다. 지난 30년간 한국의 예술춤과 국내외 축제 현장을 작가주의 시각으로 직접 촬영한 비디오 기록물 수천 편을 소장하고 있으며 한국저작권위원회, 국립극장 자료관, 국립도서관 등에 영상 복제본, 팸플릿 등 일부 자료를 기증한 바 있다.​​​​​​​​​​​​​​

2023. 12.
사진제공_세종문화회관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