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알.에이(R.A)컴퍼니 〈격(隔)〉
고유한 춤세계 탄생의 뚜렷한 징후
이지현_춤비평가

“반복되는 몸의 언어는 스스로 의미를 남긴다.”(리플렛)

오랜만이다. 공연을 보고 이런 체험을 한 것은. 처음엔 그냥 빠져들었고, 관람 후엔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몸의 언어가 스스로 의미를 남기는 경험’에 대한 기억이 깨어났다. 그래 맞아 이런 게 있었지... 그리고 그 여운은 길게 흘러갔다.(위보라 안무,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2023.12.8.-9.)


1. 처음엔 그냥 빠져 들었고

리플렛을 자세히 보지 않고 공연을 보기 시작했다. 리플렛은 얇았고 개인적 언어로 가득 차 있는 듯 했다. 집에 가서 꼼꼼히 읽어야지 하면서 덮었던 거 같다.

무대는 전반적으로 어두웠지만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조용히 걷는 사람들. 무대 곳곳에 놓인 무언가(다양한 크기의 돌덩이)를 들어 옮긴다. 그리고 그들이 옮겨 놓는 곳에 조명이 확장되고 공간은 점점 드러나나 아직도 ‘미지의 곳’이다.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은 무대 전면 좌우에 놓인 2단과 3단의 스캐폴더(일명 아시바)가 있고 돌더미들이 그 주변에 놓여있다. 그리고 하수 쪽에 꽤 높은 사다리가 걸쳐있다.



알.에이컴퍼니 〈격〉 ⓒ위보라



첫 움직임은 한 남자(이현섭)가 앉은 자세에서 골반을 시작점으로 하여 몸을 펼쳐 일어나고 다시 앉기를 반복하는 동작이다. 그리고 이어 백스테이지 쪽에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작품에서 깊은 공간감을 주고 동적 언어가 복합되는 장치인 전경과 후경, 즉 앞의 춤과 뒤의 춤 혹은 솔로와 군무가 대위법적(contrapuntal)으로 전개된다.

그들이 하나의 덩어리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은 상수 위쪽을 향해 다가가고 응시하고 물러서기를 반복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서로의 어깨를 터치하거나 감싸면서 그들이 관계를 시작했음이 인지된다. 그리고 상수 위쪽을 향하는 장면은 때때로 반복된다.

다른 한 남자(전중근)가 상수에서 하수로 무대를 전면에서 가로지른다. 조명은 하수 쪽에서 몸의 상체만을 길처럼 비추는데 그가 헤치며 지나가는 것은 누군가의 들어올린 다리, 누군가의 팔의 연결이다. 나머지 5명의 출연자들이 진행방향을 향하여 계속 몸으로 숲길을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알.에이컴퍼니 〈격〉 ⓒ위보라



본격적으로 춤으로 빠져든 장면은 아마 본격적으로 솔로와 듀엣(주정현의 솔로에 이어 김민송-전중근/ 이채은-이현섭)이 시작되는 장면이었던 거 같다. 이 작품은 22년 모다페에서 위보라와 이용우의 듀엣 〈봄의 제전 ver. 2 _레볼루시옹〉에서 발전된 작품으로 그 듀엣이 발전되었다. 깔끔한 라인의 리프팅이 주를 이루는 듀엣은 평이한 듯 하나 시선을 잡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이 본격적인 춤을 단단히 받쳐주는 것은 쥴리앵 르프뢰(Julien Lepreux)의 음악이다. 쉽게 격렬해지지 않으면서 매우 에너제틱하고 잔잔한 듯 하나 묵직하고 긴장감있게 춤과 호흡한다. 춤은 그것에 힘입지만 그것에 따라가거나 그것을 쉽게 활용하지 않는다. 그 긴장감은 온전히 춤으로 돌아온다.



알.에이컴퍼니 〈격〉 ⓒ위보라



여기까지 오면 앉은 자세를 고쳐 앉고 눈이 크게 떠지게 된다. 그리고 춤은 이제 스스로 흘러가는데 무용수들의 팔과 다리는 공간 속에서 더 부각되고 공간을 조각하기 시작한다. 그때 또 하나의 감각을 자극하는 건 오디오비쥬얼(황세준)이다. 무대 뒷막에 30-40센티 정도의 파란 선 하나가 생겨나고 점점 넓어지면서 음파를 시각화 하고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색과 빛.

상수의 뒤와 하수의 앞에 트랩이 설치되어 있고, 무대 뚜껑을 열면 그 안에서 빛이 나온다. 그리고 한 여자(이채은)가 그 안에 들어가 작은 무대용 덧마루와 돌을 꺼내 전달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옮겨 주변에 쌓아 놓는다. 춤은 어느덧 느리고 엄숙한 제의의 행위로 바뀌어 있다. 그리고 이때 음악은 사라졌다.



알.에이컴퍼니 〈격〉 ⓒ위보라



상자와 돌의 운반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2인무가 시작되었을 때 그들 사이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깨어지거나 다시 그 둘의 몸 사이에 끼워지는 것은 얼음이다. 얼음을 사이에 둔, 그리고 깨어진 얼음 조각의 파편과 상처에 대한 연상.. 깨어지고 녹아버리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어떤 물질 하나로 관계를 상징해내는 섬뜩함이 여태 쌓아 올린 춤들 위에 선연한 의미를 남긴다.





알.에이컴퍼니 〈격〉 ⓒ위보라



그리고 다시 오디오비쥬얼의 구름인 듯 연기인 듯한 이미지가 무대를 덮고, 그 영상에서 나온 듯 어렴풋이 한 여자(이홍)의 모습이 보인다. 하수 쪽에서 시작된 솔로는 오른팔을 돌리며 매우 느리게 진행되다가 점차 빨라지고 몸의 웨이브와 다리의 웨이브로 확장된다. 다리의 넓은 스탠스, 낮은 상체의 위치 그리고 빨라지고 다시 정지에서 시작하는 속도의 격차로 인해 크라이막스로 향해갈 때 그 끝은 정지이다. 어렴풋이 한 여자가 왼팔을 들어 올린 정지 동작에 합세하고, 조명이 우리의 눈을 같은 포즈를 하고 있는 다른 무용수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정확히 그런 느낌이었다. 분명 이홍의 솔로였는데, 갑자기 확장된 어떤 공간이 드러나고 존재가 드러나는 확장이 감각적으로는 상당히 회화적이었다.



알.에이컴퍼니 〈격〉 ⓒ위보라



춤은 원으로, 횡대로 바뀌고, 조명은 어둠에서 밝음으로, 밝음에서 진한 파란색으로, 다시 무대 전체가 보이는 조명으로 바뀌었을 때 이 모든 장치와 돌덩이가 놓여 진 그곳이 드러난다. 그것도 잠시, 점차 격렬해지는 군무와 솔로의 대위법으로 무대가 채워지고 에너지를 높여 가다가 어느 순간 음악은 사라지고 무용수들과 비주얼만이 남은 채, 예의 상수 위쪽을 바라보는, 다가가려다 후퇴하는 ‘경외의 몸짓’이 반복되며 약 20분 정도의 장면이 막을 내린다.



알.에이컴퍼니 〈격〉 ⓒ위보라




2. 몸의 언어가 스스로 의미를 남기는 경험

우리가 일상의 파도에 휩쓸려 살다가 때때로 ‘초심’을 기억하는 게 삶의 자세를 다시 고쳐 앉게 만들듯이, 춤의 초심이라 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를 넘어선’ 어떤 세계를 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떠올려 보게 된다. 특히 언어가 춤 안으로 들어온 지도 오래고 춤을 언어의 해독법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도 적지 않은 요즈음의 경향에 마취된 상태에서 ‘언어 밖의 춤’을 떠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춤을 언어로 묘사하고 기록하는 글쓰기 작업을 주로 하는 나로서는 어떨 때는 글로 춤을 이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도전심도 자주 갖는다. 구조가 단순하거나 표현하려는 덩어리가 입체성이 떨어질 때, 춤의 깊이가 얇을 때 그 일은 더 만만해지기도 한다. 그러다 위보라의 〈격〉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했던 건 나의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비단 나뿐 아니라 우리의 춤들이 선택하는 다분히 시대적 경향과 그 표현 방식을 보는 관객들은 이 작품을 통해 내면에 가까이 들어와 있는 어떤 묵직한 느낌, 쉽게 사라지지 않는 무엇인가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글로 치환되지 않는, 글로의 가역성을 거부하는 ‘춤이 생성한 의미’의 완고함을 느꼈다.

안무가 위보라와의 인터뷰(줌미팅/23. 12. 23.)를 통하여 내 경험의 이유라면 이유일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금의 수많은 안무가 인터뷰에서 익숙해진 ‘무용수들과의 대화를 통해 작품을 풀어나가고 움직임을 찾아 나가는’ 방법은 하나도 신기하지 않다. 그런데 위보라 안무가와 얘기를 나누면서 그 방법의 본질이 무엇이고, 그것이 작품의 완성과 결과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춤수련 기간을 가졌고, 대학(한예종 무용원 실기과) 재학 중부터 전문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2012년 피에르 리갈의 〈Theatre of Operations〉(LG아트센터 제작)에 참여하면서 투어 공연을 했고, 2015년 프랑스로 건너가 그와의 활동을 이어간 경력 즉, 무용수로서의 충실한 기반이 몸의 언어와 춤의 영역을 대극장 무대 안에 단단하게 구축하는 힘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두 번 째는 〈격〉의 레퍼런스가 되고 있는 〈봄의 제전〉(1913)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봄의 제전에서 나타난 ‘탄생’ ‘희생’ ‘소멸’을 ‘삶이라는 핵심 키워드로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들의 협업 과정을 통해 창작”되었고, 봄의 제전의 1부 대지에의 찬양과 2부 희생제의의 장면을 분석하고 그로부터 장면을 구성하는 기반하되 축약하고 발췌하는 방식으로 바탕은 〈봄의 제전〉에 두고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방법을 택하였다.

세 번 째는 음악, 무대 디자인(이태양), 오디오비쥬얼, 조명 디자인(김병구)와의 협업의 방식이다. 이 춤의 부대에 필수적인 장르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긴밀하다. 긴밀하면 긴밀할수록 그 관계에서 오는 위험성과 불확실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하고 싶어도 실패의 아픔과 두려움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격〉에서는 오디오비쥬얼이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인식시켜주는 것처럼 이 장르들은 서로 동조(同調)한다. 그래서 춤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고, 무대 위에서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다른 말로 하면 각자를 드러내면서 협력할 줄 아는 수평적 관계로 보인다.


3. 그리고 그 여운

무엇보다 무대를 동적 에너지로, 인간의 숨결로, 탄생과 희생의 주체로서의 격정적 내면을 드러낸 것은 무용수들이었다. 새로운 얼굴의 이현섭과 이홍의 솔로는 본 적이 없는 춤으로 시선을 끌었고 속도 속에서 자유롭고, 에너지를 생성하는데 주저함이 없이 살아있었다. 듀엣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춤이 줄 수 있는 날렵함과 깔끔함, 두 몸이 만들어 내는 평범하지만 다른 질적인 느낌으로 춤을 보는 맛을 주었다.

안무로 분석될 수 있는 작품이었다면 더 정교함과 복잡합이 필요했을 것이나 이 작품은 퍼포머들의 현존감(presence)도 부각시키는 퍼포먼스성까지 갖춤으로써 다양한 춤움직임과 행위성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풍요로움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 어울리는 것인지 생각할 만큼 어려운 제목, 자칫 모호함과 추상성이 지나쳐 관객이 길을 잃을 가능성이 높은 점, 삶이라는 주제가 예술가로서는 욕심을 내볼만하지만 그만큼 장기적으로 씨름해야 할 대상이라고 했을 때, 탄생, 희생, 소멸, 집단, 제의의 〈봄의 제전〉이 몹시 자의적으로 ‘삶’으로 뭉뚱그려진 점은 안무가가 앞으로 고민해야할 지점으로 보인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

2024. 1.
사진제공_위보라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