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다슬파운데이션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
춤으로서의 무보, 이 예정된 실패1)
한석진_무용학자

정다슬파운데이션은 2023년 전시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12. 29 – 31., 문래예술공장 M30)에서 북한의 자모표기법을 소개하고 춤을 기록, 보존하는 것을 넘어 창작 과정에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서 그것의 가능성을 개진한다. 안무가 정다슬은 안무를 책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연구진과 참여무용가들과 함께 자모표기법을 연구했으며, 자모표기법으로 기록된 인민배우 홍정화의 안무작 〈사관장과 전사들〉(1981)을 재연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말한다.2)

북한의 자모표기법은 한글의 자모 결합으로 글자를 기록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춤동작을 기록하는 방법이자 주체사상을 담아낸 춤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1970년대 북한은 주체사상을 강화하기 위한 문화예술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춤 역시 인민 대중을 혁명적으로 교양시키는 강력한 프로파간다 수단으로써 활용되었다. 사상예술성이 높은 춤의 발전과 더불어 이를 과학적으로 기록하고 보급하는 도구가 필요하다고 본 김정일 위원장의 요구에 따라 무용표기법에 대한 연구 개발이 진행되었다. 1987년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무용표기법〉이 발간되었고, 1990년에는 자모표기법 체계를 상세하게 설명한 리경희와 박춘재의 〈무용보읽기〉가 출판되었다.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 프로그램북은 자모표기법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무용표기법〉에서 가져온 인용문, 자모표기법에서 사용되는 ‘기호’ 및 ‘무용 보표’, 그리고 이 무보법을 개발하게 된 원래의 목적과 현재적 가치를 설명한다. 춤 동작, 동선, 구도까지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그리고 쉽게 기록할 수 있는 자모표기법의 실효성을 입증하기 위해 안무가는 북한 인민배우 홍정화의 안무작 〈사관장과 전사들〉을 기록한 무보집을 읽고 이를 재연한다.

전시 공간에는 춤 복원 과정에서 수집한 단행본 〈무용표기법〉(1987) 및 무보집 〈(무용소품집) 사관장과 전사들〉(1994)을 포함한 아카이빙 자료로 채워져 있다. 남한에서 시청가능한 〈사관장과 전사들〉의 공연 영상물이 부재하기에, 북한의 당대 춤 경향을 파악할 수 있는 유튜브에서 수집한 북한춤 영상 편집물, 안무가의 이념과 예술 세계를 보여주는 홍정화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상 편집본이 전시되었다. 더불어 자모표기법의 기호와 체계를 설명해주는 글과 영상, 그리고 이를 학습하여 무보집 〈사관장과 전사들〉을 읽고 복원하는 리허설 과정을 기록 영상으로 보여준다.



정다슬파운데이션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 ⓒ정다슬파운데이션, 조현우



리허설 영상에서 등장하는 세명의 무용수들은 번갈아가면서 전시장으로 입장하여 탁자 위에 놓여진 무보집을 읽는다. 이 무보집은 그들이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흔적이 남겨져 있는 물리적 증거이기도 하다. 매시간 30분이 되면 세명의 무용수는 탁자에 모두 모이고 재연 공연이 시작된다. 공연은 무보를 읽는 과정에서 춤의 어떤 요소를 포착하여 담아냈는지를 세 단계에 걸쳐 보여준다. 첫 단계에서 무용수들은 삼각형 구도로 마주보고 앉아서 카운트를 세면서 동일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을 넘긴다. 두 번째 단계에서 무용수들은 무보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공간을 가로질러 이동하면서 팔, 다리, 몸통을 움직인다. 함께 카운트를 세지만 개별적으로 자신이 맡은 무용수의 춤 동작, 위치 및 방향, 동선을 무보집을 보면서 읽어낸다.





정다슬파운데이션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 정다슬파운데이션, 조현우



마지막 단계에서 무용수들은 무보집을 내려놓고 벽에 걸려 있는 검정 모자를 쓴다. 전시 가벽 두 개를 이동시키자 무보집에 나와있던 작품의 무대 배경인 항구 풍경이 펼쳐진다. 음악이 울려퍼지고 무용수들은 이전과 달리 서로 간의 관계를 형성하면서 춤을 진행한다. 개별 동작을 수행하기도 통일된 동작을 함께 수행하기도 하는데, 음악의 멜로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을 무표정으로 일관한 채 리듬감이나 에너지의 강약 없이 단조롭게 움직임이 흘러간다. 어떠한 인물 성격이 부여되거나 서사를 읽을 수 없는 이 연쇄적 움직임은 마치 동요에 맞춰 춤추는 마리오네트의 율동을 연상시킨다.





정다슬파운데이션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 정다슬파운데이션, 조현우



이 공연은 무보집에 담겨진 네 편의 소품 중 한 편인 〈사관장과 전사들〉을 원래의 일곱 명이 아닌 세 명의 여성 군무로 재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진, 동영상, 안무노트, 프로그램북 등과 같은 아카이빙 자료는 공연에서 파생되어 나온 흔적이자 물질적 증거로서 기능하면서 재연된 공연에 원본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에서는 전시된 ‘객관적’ 자료와 일치하지 않는 단서를 재연 공연에서 노출시킴으로써 무보를 통한 원본의 재연 가능성을 둘러싼 허구적 믿음을 폭로한다. 공연은 시작에서부터 완벽한 복원을 의도적으로 포기한다. 무보집의 표지로 사용된 〈사관장과 전사들〉 공연 실황 사진과 여성 무용수 그림 속의 해군 제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퍼포머가 등장한다. 크롭 탑 또는 백리스 탑, 검정 베레모, 가죽 바지 등은 북한 그리고 해군이라는 등장인물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한다.

전시 내용에 따르면, 무용가 홍정화는 주체적 무용예술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받아 인민배우 칭호를 1982년에 수여받았다. 군인들의 전투 및 정치 훈련과 삶을 반영한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사관장과 전사들〉은 그러한 작품 중 하나였다. 홍정화의 다큐멘터리 영상, 〈조국의 진달래〉와 〈혁명의 승리가 보인다〉를 포함한 북한 춤 편집본에는 각각 여군의 군무가 등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기교적이고 통일된 움직임, 과장된 감정 표현 등이 〈사관장과 전사들〉에서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3) 하지만 재연 공연 속 무용수들의 움직임에는 한국춤 특유의 호흡과 팔사위 사용이 눈에 띄지 않으며, 얼굴 표정을 통한 감정 표현도 거의 부재하다. 오히려 춤보다는 체조 동작과 유사한, 특정한 움직임 스타일, 테크닉, 캐릭터, 서사, 정서가 모두 제거된 움직임을 수행한다. 다시 말하자면 재연된 〈사관장과 전사들〉은 완벽하게 탈맥락화된 상태로 체현된다. 춤 움직임을 둘러싼 정치적, 미학적 맥락을 읽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움직임 그 자체가 얼마나 정확하게 실행되었는지 역시 무보법을 읽을 수 없는 관객은 알 수 없다.4)

춤 재연의 정확성과 원본성의 획득은 이 공연에서 달성해야 하는 목표로서 적극적으로 표명되지만 사실상 정다슬파운데이션의 자모표기법 선전은 애초부터 너무 명백한 허구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한다. 춤을 완벽하게 기록하고 재생산해내는 무보법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은 오랜 시간 의심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춤의 원본을 담아내지 못하는 무보법의 한계를 넘어 원본성 개념이 도전받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동시대 춤 담론에서 볼 때 책에 춤을 온전히 담아내려는 정다슬 안무가의 야심찬 시도는 이미 예정된 실패를 전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오히려 무보를 통한 재연은 원본의 재생산 가능성이 아닌 불가능성을 재확인하려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 전시는 무보에 담긴 저자의 유령을 만나기 위해 유아론적 사회주의자적 주체를 발생시키지만 이 주체화가 결국 실패함을 보여준다. 자모표기법에 담겨진 작품의 흔적을 무용수의 체화된 경험과 기억을 통해 해석하고 실어나르는 과정에서 과거의 공연에서 현전했고 자모표기법을 통해 담아내려고 했던 사회주의적 주체는 자기무화된다. 이로써 무용수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아감벤이 말한 ‘목적없는 수단’, 즉 역사를 재현하거나 명증하려는 목적에서 벗어난 잠재성을 지닌 몸짓이 된다.

정다슬 안무가는 춤의 저자성, 원본성, 지식의 객관성을 의심하고 이를 해체하는 실험을 해왔다는 점에서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은 안무가의 지속적 탐색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다. 2022년작 《정다슬파운데이션 회고전: 기연 1951-1988》은 ‘만들어진’ 아카이빙 자료를 통한 재연이었다면 2023년작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에서는 ‘현존하는’ 객관적 자료를 통한 재연이라는 차이를 지닌다. 자모표기법을 통한 춤 원본의 재생산이라는 허구를 실재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무보의 불완전성과 원본의 허구성을 안무가 특유의 위트와 함께 유희적으로 폭로한다. 허구와 실재 간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안무가의 능수능란함에 누군가는 ‘불신의 자발적 유예’를 작동시킬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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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은 『2023년 서울무용센터 1기 하반기 입주예술가 작업 아카이빙』에 실린 정다슬의 〈『무용보읽기』 추기〉(2023. 11. 26, 서강대 메리홀)의 비평문을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은 〈『무용보읽기』 추기〉의 퍼포먼스 전시 버전이자 최종 결과물이다.
2) 정다슬(2023). 《무용보읽기: 사관장과 전사들》 프로그램북. pp.3-4.
3) 〈사관장과 전사들〉이 안무된 1981년은 북한에서 주체사상과 민족적 성격을 강화한 혁명적 춤작품이 다양하게 창작되는 시기였다. 1970년대에 비교하면 고도의 기교적 동작은 감소했으나, 발레적 움직임 기법을 바탕으로 민속무용의 내용적 다양성을 접목시켰던 시기로 알려져 있다. 김채원(2010), 북한 이데올로기와 춤의 관계, 우리춤과 과학기술, 12, p.136.
4) 아이러니하게도 음악만은 무보집 속 악보를 통해 정확하게 연주되고 있는지 관객이 확인할 수 있으나, 공연에서 사용된 음악은 원곡이 아닌 편곡된 버전이었다.

한석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에서 무용이론 전공 예술사 과정 후 영국 서리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이론과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2024. 2.
사진제공_정다슬파운데이션, 조현우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