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허 프로젝트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
다층적 상징과 단순한 이분법으로 도달한 실존적 사유의 한 켜
이지현_춤비평가

허프로젝트의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Where is the rabbit?, 2024.3.2.-3.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의 첫 장면엔 토끼(?)가 등장한다.

사람이 안에 들어가 몸통은 골판지로 된 박스를 두르고 머리 만 토끼와 사슴의 중간 형상을 한 라텍스 동물 마스크를 썼으며, 밑으로는 종아리부터 맨발이 삐죽 나와 있는, 어딘지 부실함을 감추지 않는 동물의 등장이다. 나에게는 매우 큰 갈색 얼굴과 유난히 길게 돌출된 주둥이가 특징적으로 보여 사슴이라고 생각했었다. 특히 토끼라고 보기엔 귀엽지 않았고, 상당히 키가 커 보였는데, 이유는 안에 들어가 있는 출연자(허성임)의 얼굴에 마스크가 씌워진 것이 아니라 얼굴은 박스 안에 있고 손을 머리 위로 들고 거기에 마스크를 씌우고 그 손을 이용해 그 동물의 귀를 쫑긋거리는 가면놀이 액션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 키가 커서 더 토끼처럼 보지 않았나 보다.

어쨌든 동물 가면의 출연은 한때는 유럽의 춤작품에서 상당히 유행하던 소품이었고, 그 유행이 지난 느낌이라 낯설음은 적었지만, 거의 항상 보는 이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다. 이 멀대 같은 부실한 토끼의 등장은 무대를 이내 친근한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안무가가 원했을 초현실적인 시공간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하였다.





허 프로젝트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 ⓒ2023창작산실/옥상훈



이어 나오는 출연자들(하지혜, 조동솔, 조현도, 허성임)의 무대는 매우 어두운 상태에서 무용수들이 들고 있는 손전등의 빛에만 의지한다. 그들이 움직여 나갈 때 실버 스팽글이 주렁주렁 달린 바지와 수트 의상이 언뜻언뜻 보이다가, 그들이 무대 앞에 손전등을 무대 후면을 향해 바닥에 내려놓고 그 빛의 가시권 안으로 들어가 힙을 관객석 쪽으로 향해 바운스 동작의 시퀀스를 시작한다. 이 장면은 꽤 길게 진행되는데 허성임 안무가가 주로 쓰는 단순한 비트에 맞춘 리듬 중심의 동작과 그 변주임에도 극장 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손전등의 빛에만 의지한 느낌이 어떤 이완과 편안함 그리고 집중력을 안겨 준다.



허 프로젝트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 ⓒ2023창작산실/옥상훈



쇼에서나 입는 반짝이는 의상을 입고 다리는 곧게 펴고 매우 넓은 폭으로 다리를 벌린 채 상체는 숙인 상태에서 힙을 관객석으로 향해 단순한 바운스를 하는 장면은 사실 빛이 밝았더라면 단순한 쇼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고,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출연자의 뒷태 만을 봐야 했기에 보기에 불편한 느낌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조합을 깬 것은 조명의 나약함이었고, 그 덕에 관객은 리듬에 감각적으로 노출되기 보다는 안무가가 이끄는 어둠의 세계로 층계를 내려가는 주의력을 얻게 된다.





허 프로젝트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 ⓒ2023창작산실/옥상훈



허성임의 리듬은 이번 작품에선 토끼와 연결된다. 첫 장면에서의 어둠 속의 토끼는 인간 안에 “내재된” 어떤 것이자, 순수 존재에 대한 열망인 동시에 인간이 항상 도망치고 싶어 하는 “검은 욕망과 두려움”이기도 하며, 자칫 모순적으로 보이는 그 모든 걸 품고 그 자체로 혼란스러운 길을 가고 있는 혹은 길을 잃은 것과 진배없는 우리의 모습이다. 귀엽지 않은, 탐스럽지 않은 섬뜩하고 기이한 동물 토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다층적이고 모순적인 의미의 충돌들을 느끼는 것 또한 이 작품이 열어주는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어진 스팽글 의상을 입고 엎드려 진행되는 길게 이어지는 바운스 동작은 출연자로 보이기 보다는 한참을 보고 있으면 뒤집어 놓은 브이처럼 보여 은색 막대기나 도구처럼 보이는 착시를 일으키는데, 그저 단순한 박자에 맞춰 사는 ‘사물화된 인간’들로 보이는 동시에 빛나 보이나 어두컴컴한 모순적인 노동과 액션의 현대인들로 은유 되기에 어려움이 없다. 단순 동작을 반복할 때 보통은 혼미해지고, 황홀경을 경험하기도 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흐트러지는 트랜스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밝지 않은 빛이 만든 집중력으로 단순 리듬의 반복으로 생긴 혼미함은 신체가 사물 이미지가 되는 성공적 전환에 도달했고, 이 작품의 튼튼한 기초공사가 되었다.





허 프로젝트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 ⓒ2023창작산실/옥상훈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의 사실상 주인공은 앞의 트랜스 장면에 이어 나오는 이 작품의 co-creater인 그레이스 엘렌 바키이고 그녀가 만드는 야릇한 무대이다. 그녀는 매우 가늘고 긴 몸을 가졌고 그것만으로도 앞에 출연자들과 매우 대조적으로 감각된다. 그래서 더 마르고 길어 보이는 그녀는 어설픈 몸짓으로 동작을 하며 노래(I want to have)를 부른다.

I want to eat a bloody steak – 나는 피가 나는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
Because I don’t like a carrot cake – 왜냐하면 당근 케익이 싫어
I need a friend, I’m so alone – 나는 친구가 있었음 좋겠어 너무 외로워
I’m waiting at the telephone – 나는 너의 전화를 기다려
I want the sun, there’s only rain – 해가 있으면 좋겠는데 비만 내려
I waiting forever for the train – 나는 영원히 기차를 기다리고 있어
I want the trees to grow so old – 나는 늙어가는 나무가 있기를 바래
So they can protect me from the cold – 그래서 나를 추위에서 보호할 수 있게
All my dreams are made of fear – 나의 꿈들은 모두 두려움이야
Please come and make them disappear – 제발 와서 이 꿈들을 없애줘


이 노래는 노래처럼 불려지지 않는 동시에 역시 희미하거나 특별하지 않은 조명에서 그리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공연 와중에는 이 영어 노래가 잘 들리지 않고 느낌만 다가온다. 안무자의 설정에 의하면 이 존재는 앞 장면에서의 토끼라는 대부분의 혼미한 사람들과 시공간을 전혀 나눌 수 없는 어떤 ‘외로운 존재’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 토끼들이 등장하지만 이 두 존재는 결코 서로 소통하거나 연결성을 갖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몸의 이질성, 인종적 이질성이 강력하게 작용하였고, 움직이는 방식에 있어서도 정확하게 노동하듯이 바운스하는 집단과 그런 정확함에 대한 의지를 가지지 않은 동작을 하는 그레이스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움직임의 대조는 매우 단순한 원리이지만 연출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은 것인데 누구나 직관적으로 느낄 만큼 잘 연출되었다. 보기 불편할 정도로 계속 겉도는 어떤 존재, 그러나 그것의 의도는 그렇게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상태.





허 프로젝트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 ⓒ2023창작산실/옥상훈



이렇게 쌓여져 가는 작품의 구조를 정서적 강하게 휘몰아 가는 역할은 Husk Husk가 만든 ‘Where is the rabbit?’이란 곡과 Maarten Seghers의 ‘All is loneliness’가 나오면서부터이다. 무대 위의 두 존재의 불통과 대조가 진행되는 내내 이 곡은 반복적으로 강하게 그레이스의 내면을 대변 해주고 이 작품의 정서적 주제로 관객을 데려가 준다. 허성임 작품에서의 중요한 방식인 정서적으로 쭈뼛거리지 않고 시원하게 몰아가주는 리더쉽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그래서 허성임의 작품들은 단순한 구조 속에서 리듬으로 정서적인 역동성을 만들고, 그것을 극한으로 몰아가 해방감과 맞닿게 하는데,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에서는 그 핵심적인 방식에 초현실적 방식을 더해 내면의 층계를 내려가 인간의 보다 깊은 곳을 들여다 보려는 시도를 하여 색다른 컬러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허 프로젝트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 ⓒ2023창작산실/옥상훈



허성임의 ‘깊이에로의 시도’는 이 작품에서 동물의 등장을 통한 ‘현실적 감각을 무장해제’시키고, 무대 위 존재들의 몸과 행위의 이질성을 통한 ‘이분법적 대조’와 동시에 외로움으로 포착된 ‘내면적 정서를 음악으로 확실하게 구성하는’ 방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무대화시키는 데 어느 정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덧붙여, 이후에 보이는 손에 괴기스러운 장식을 하여 이상한 토끼의 세계를 그림자 로 보여주는 장면(영상디자이너
김예은)은 앞에 쌓아 올린 외로움에 대한 정서적 피곤함을 가볍게 덜어내어 동화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하기에 적절했다. 정서적으로 쌓인 무게감에 대해 마치 ‘이 모든 건 환상이고 동화라고 생각해’라고 속삭여 관객이 무거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처럼 가볍게 위로한다.


허성임에게 현대인의 외로움은 화려한 세상과 sns에서는 가려진, 금지된 영역으로 포착되었고, 그렇게 가려진 인간 내면의 사회적인 고립이나, 정서적인 외로움이 무슨 색깔인지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함께 있어도 전혀 공존할 수 없는 어떤 절망과 허무로 드러나며, 그것을 압축하는 한 문장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를 건져 올린 것으로 보인다. 밝고 리듬 강한 춤으로 무대를 생명력 있는 에너지로 채우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기의 방식으로 한발 한발 존재에의 깊은 질문과 사유를 향해가고자 하는 예술가를 갖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희소식이다.



허 프로젝트 〈토끼는 어디로 갔나요?〉 ⓒ2023창작산실/옥상훈



한 가지를 보태자면 아르코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선정작으로, 지원금 규모나 창작 시간, 창작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좋은 창작 여건을 제공하는 프로젝트의 기준으로 보면, 시도되지 못한 장면 때문인지 40분이 조금 넘는 공연 시간은 너무 짧았고 그 남은 시간을 특별 커튼콜로 그림자극으로 보여준 것은 조금은 어설프고 성급한 판단으로 보였다. 완성도에 있어서 많이 비어있는 부분, 대극장이라는 공간이 적절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공간과 작품이 아직은 부조화 하는 부분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긴 했으나 이후 레퍼토리 공연으로 지속하면서 보완되기를 기대하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지현

1999년 춤전문지의 공모를 통해 등단했다. 2011년 춤비평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비평집 『춤에 대하여 Ⅰ, Ⅱ』를 출간했다. 현장 춤비평가로서 왕성한 비평작업과 함께 한예종 무용원 강사를 역임하고, 현재 아르코극장 운영위원과 국립현대무용단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24. 3.
사진제공_2023창작산실(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