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해니쉬발레 〈되돌이표: 두 개의 숨〉, 발레블랑 〈시향〉
발레를 벗어나는 발레
정옥희_춤비평가

3월엔 발레 공연이 풍성했다. 유니버설발레단과 국립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뿐 아니라 체코부르노국립주니어발레단의 내한공연, 피아니스트 조재혁과 안무가 유회웅이 협업한 〈메시앙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서울발레시어터의 〈화양연화〉, 해니쉬발레의 〈되돌이표: 두 개의 숨〉(이하 〈되돌이표〉), 그리고 발레블랑의 〈시향〉이 이어졌다. 3월까지는 춤 공연계가 비수기인데 뜻밖의 다채로움이다. 그 중에서도 시선을 사로잡은 공연은 해니쉬발레와 발레블랑이다.

발레블랑의 두 안무가(탁지현, 김다애)뿐 아니라 해니쉬발레의 대표 이해니는 모두 이화여대 무용과 동문 발레단인 발레블랑의 단원으로, 하루 차이로 나란히 공연했다. 자연히 발레블랑이라는 단체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1980년에 결성된 발레블랑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 동문 무용단이다. ‘발레블랑’(ballet blanc)이라는 명칭은 서구 발레에 대한 존경 및 탐구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동문무용단이 활성화되었다가 위축된 오늘날, 발레블랑은 지난 시대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해니쉬발레와 발레블랑의 공연은 장르적 정체성이나 동문 무용단의 정체성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다. 모두 당스데꼴(danse d’école)의 수직축과 풀업, 턴아웃 등의 원칙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게다가 발레블랑 정기공연엔 단원보다 특별출연이 더 많고, 타 대학 출신도 많다. K-pop이 더 이상 한국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것처럼 동문단체 역시 구성원의 정체성에 대해 한결 유연해졌다. 이는 발레블랑이라는 단체 뿐 아니라 한국발레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해니쉬발레 〈되돌이표: 두 개의 숨〉 ⓒ잔나비와 묘한계책



해니쉬발레의 〈되돌이표: 두 개의 숨〉(3월 23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은 숨을 모티브로 생성과 소멸을 순환적인 구조와 공감각적인 연출로 구현한 작품이다. 무 혹은 죽음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번성하다가 다시 무로 돌아간다는 순환적인 구조는 죽음-삶, 생성-소멸, 자연-문명의 이분법을 중첩시킨다. 하얀 종이조각 여러 개를 샹들리에처럼 매단 구조물이 무대 바닥에서부터 들어올려지면 모로 누운 무용수의 뒷모습이 드러난다. 살색 반바지와 탑을 입은 그녀는 인간의 원형이자 시원(始原)으로서 서서히 깨어나 움직이다가 사라진다. 다소 진부한 연출이지만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무용수 김소혜의 힘이다. 군더더기 없는 잘 훈련된 몸과 성찰적인 분위기를 지닌 그녀는 지극히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첫 장면을 흡입력 있게 소화했다. 몸의 중심에서부터 사방으로 에너지가 뻗어나가는 가운데 팔꿈치로 흐름의 변화를 만들어내고 호흡으로 파동을 일으킨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다.





해니쉬발레 〈되돌이표: 두 개의 숨〉 ⓒ잔나비와 묘한계책



김소혜가 사라진 무대에 검은 셔츠와 바지를 입은 남녀 무용수들이 등장한다. 도회적이고 문명적인 관계와 구조가 구축된다. 그들은 김소혜의 움직임과 사뭇 다르다. 움직임이 호흡에서 자연스레 촉발되기보다는 외부에서 주입되어 빠르고 기계적으로 스펙터클을 구축한다. 문명이란 그런 것이다. 숨 막힐 즈음이 되면 어두운 무대에 갑자기 조명 기둥이 꽂히며 ‘숨구멍’을 열어준다. 하나였던 구멍이 여럿으로 늘어나며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새 소리, 물소리, 숨소리가 다시 들린다.





해니쉬발레 〈되돌이표: 두 개의 숨〉 ⓒ잔나비와 묘한계책



작품 후반은 풍선 및 공 오브제를 활용한다. 커다란 흰색 풍선을 머리에 쓴 여성 무용수와 그를 비호하는 남성무용수가 애절하게 춤춘다. 만화 같은 미장센이 소격효과를 일으키는 가운데 잃어버린 시절, 가까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아련함이나 상실감이 묻어나온다. 커플이 들어간 후 다른 무용수가 회색 공, 그리고 작은 공을 가져나온다. 흰색의 가벼운 풍선과 회색의 무거운 공의 대조 역시 자연-문명, 순수-오염의 이분법을 꽤나 직설적으로 다룬다. 무용수들은 공과의 상호작용 혹은 접촉즉흥을 꽤 능숙하게 해낸다. 마지막엔 살색 옷차림의 김소혜가 다시 등장하며 전체 순환구조를 완성한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아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는 의미이다.





해니쉬발레 〈되돌이표: 두 개의 숨〉 ⓒ잔나비와 묘한계책



〈되돌이표〉는 3D 이머시브 음향기술과 반구형 화면구조물을 활용한 프로젝션 등을 통해 세련된 무대 연출에 상당히 공들인 작품이다. 개인 무용단의 작업으로서 완성도가 높다. 하지만 세련된 이미지를 통해 주제를 강조하는 방식이 예측가능한 범위 안에 머물렀다는 점과 3D 이머시브 음향 기술로 숨소리가 좀 더 잘 들린다는 것 너머 새로운 점은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이해니 안무가는 몸통에서 촉발된 에너지를 역동적인 동작으로 구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다만 〈되돌이표〉는 주제의 추상성과 이분법적인 도식이 강하다보니 뚜렷한 개성을 각인시키지는 못했다. 열정과 의욕이 가득한 안무가의 성장이 기대된다.

이해니의 〈되돌이표〉가 죽음-삶, 문명-자연의 이분법을 토대로 한다면 김다애의 〈힐리빌리〉(3월 24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힘든 현실-좋았던 과거’의 이분법을 토대로 한다. 〈힐리빌리〉는 미국 컨트리송의 토착 명칭인 ‘힐빌리(hillbilly)’를 응용한 제목이며, 컨트리송 주크박스 발레이다. 발레와 컨트리송의 조합은 의외이지만 설득력 있다. 밥 딜런, 엘튼 존의 곡부터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곡까지 여러 곡을 나열하며 ‘좋았던 날’을 회상한다. 우리가 회상하는 과거란 꼭 장소특정적일 필요는 없다. 시놉시스에서 말하듯이 청소기를 돌리는 엄마가 흥얼거리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먼 이국의 컨트리송일 수 있다.



김다애 〈HillyBilly〉 ⓒHanfilm



막이 열리면 각각 검정색과 흰색 계열의 슬립원피스를 입은 두 여성이 무대 양 옆에서 흐느적거리며 등장한다. 몸통을 잔뜩 비틀고 발끝을 치켜든 이들은 무대 중앙에서 만난 후 관객석을 향해 정면으로 걸어온다. 그런데 한 무용수가 오케스트라 피트로 내려가 버리자 다른 무용수가 놀라 뒷걸음질 친다.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김다애 〈HillyBilly〉 ⓒHanfilm



무용수들이 하나둘 등장해선 황량한 무대 위를 헤매다가 하나둘 쓰러진다. 시체처럼 던져진 몸뚱이 위로 대책 없이 감상적인 컨트리송이 흘러나온다. 몸들은 꼼짝없이 누워 이 곳 너머의 풍경을 떠올린다. 서서히 일어선 몸들이 이리저리 뭉치고 흩어지며 활력을 찾는다. 탈춤 춤꾼의 등장처럼 팔다리를 크게 휘저으며 무대를 뛰어다니던 무용수들이 다시 무대에 쓰러진다. 문득 홀로 남은 1인이 오케스트라 피트로 내려가면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잡음이 들린다. 위기의 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 하나가 나를 살게 한다. 무대에 무지갯빛 조명이 쏟아지며 무용수들이 다시 살아난다.



김다애 〈HillyBilly〉 ⓒHanfilm



〈힐리빌리〉는 대중적이길 두려워하지 않는다. 여느 발레보단 쇼나 뮤지컬을 닮았다. 조명은 원색과 무지개색을 오가고 무용수들은 대중춤에서처럼 정면을 향해 춤춘다. 각 춤은 3-5분짜리 컨트리송의 호흡에 맞춰 시작되고 끝난다. 기계음이 웅웅거리는 앰비언트 사운드가 대세인 춤 공연에서 낯선 선택이다. 한 때 예술춤에선 가사가 있는 대중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는데 발레 몸들 위로 쏟아지는 컨트리송의 위력이 대단하다.





김다애 〈HillyBilly〉 ⓒHanfilm



안무가는 발레의 고상함이나 세련됨, 진지함과 엄숙함을 모두 내던지고 엉덩이를 삐죽거리고 가슴을 흔드는데 주저함이 없다. 작품은 상당한 분량의 제스춰와 엑센트, 흥과 에너지로 구성된다. 그런데 이는 흥겨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마치 서양 미술사에서의 선색논쟁처럼 발레의 정체성을 선에서 색으로, 디자인에서 양감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근대 화가들이 선 헤게모니에서 탈피해 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면, 김다애의 〈힐리빌리〉는 고전적이고 조형적인 발레 선에서 벗어나 움직임의 벡터와 양감을 부각시킨다. 선보다 색, 디자인보다 양감이 더 진보한 것은 아니지만 춤의 접근법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 것은 맞다. 무용수들은 섹슈얼하고 센슈얼한 움직임으로 마음껏 개성을 드러내는 한편 복잡한 군무의 합을 깔끔하게 맞추었다. 많은 노력이 들어갔음이 엿보인다. 다만 사지를 자유롭게 풀어놓는 것에 완전히 익숙지 않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몸들이 너무 단조롭게 가늘어서 살집의 감각이 빈약하다는 점이 아쉽기도 했다. 보다 다양한 형태와 크기의 몸들이 했더라면 에너지가 증폭되었을 것이다.





김다애 〈HillyBilly〉 ⓒHanfilm



이는 객석 한편을 채운 올림머리 예술학교 발레학생들과 중첩되며 새로운 질문들을 촉발시켰다. 긴 시간 몸통과 사지를 통제하려 훈련해온 이들, 성냥개비처럼 마른 몸을 유지하려 노력해온 이들에게 이 작품은 무엇을 제시할까? 좀처럼 발끝을 포인트하거나 다리를 높이 들거나 여러 바퀴 돌지 않아도 발레가 된다면, 앞으로의 발레교육은 어때야 할까? 발레는 발레를 벗어날 수 있으려나? 그 때에도 여전히 발레일까? 지극히 고풍스러운 단체가 지극히 확장된 발레를 선보이니, 한국 발레의 발전사가 실감나는 순간이다.

정옥희

춤 연구자 및 비평가. 이화여자대학교 무용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미국 템플대학교에서 무용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니버설발레단과 중국 광저우시립발레단의 정단원으로 활동했다. 현재 Dance Chronicle 자문위원이며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저서로 『진화하는 발레클래스』(2022), 『이 춤의 운명은: 살아남은 작품들의 생애사』(2020)가 있다.​​​

2024. 4.
사진제공_잔나비와 묘한계책, Hanfilm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