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
학이 인간이고, 인간이 학인 세상을 노래하다
송성아_춤비평가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의 신작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이 3월 29일과 30일 양일간에 걸쳐 발표되었다. 새로 부임한 복미경 예술감독의 첫 번째 작품에 대한 기대감에 공연장(국립부산국악원 연악당)은 연일 북적였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학의 여러 모습을 입학(入鶴), 현학(玄鶴), 폐학(閉鶴), 피학(避鶴), 학명(鶴鳴), 합설(合設) 등으로 이미지화 한 작품은 총 6장 구성이고, 앞과 뒤에 서막과 종막을 덧붙이고 있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 ⓒ국립부산국악원/옥상훈



서막은 작품 전체의 핵심적 제재(subject-matter)가 학임을 암시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궁중정재 〈학무〉의 복색을 한 무용수가 날개를 접은 채 앉아있고, 연꽃 무늬 조명이 화려하게 쏟아진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 ⓒ국립부산국악원/옥상훈



짧은 서막 다음은 입학(1장)이다. 학의 고고한 모습을 이미지화하는 동시에, 작품의 주요 인물과 사건을 예비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서막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에 앉아있던 궁중 학이 일어서서 유려한 날갯짓을 하는 동안, 심플한 복색의 학들이 좌우에 도열해 있다. 그리고 꽤 많은 무용수들이 죽간자를 들고 정면을 응시한다. 당악정재 소도구(儀物) 중 하나로, 긴 대나무 장대로 만든 죽간자는 때때로 학 날갯짓을 묘사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궁중 학을 위협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말미에 죽간자의 공격을 받은 궁중 학은 앞으로 전개될 파란을 예고하며, 고통에 몸부림친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 ⓒ국립부산국악원/옥상훈



현학(2장)은 자연과 인간의 어울림을 묘사하고자 한 대목이다. 그런데 인간의 모습은 찾기 어렵고, 소나무를 상징하는 남성군무와 학을 상징하는 여성군무가 순차적으로 나열된다. 먼저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영상이 하나 둘 펼쳐지고, 소나무역의 남성무용수들이 등장한다. 처용무 보법(步法)을 닮은 걸음새는 힘차지만 탄력적이어서 선무도와 같은 무술을 연상시킨다. 이어 영남의 대표적인 춤사위 배김새를 응용하여, 강하게 꽉 내려 밟고(맺고), 제자리에서 어깨춤을 추었다가(어르고), 무겁지만 경쾌한 걸음새로 이리저리 걷는다(풀고). 그러다 어느 순간 〈진주교방굿거리춤〉의 맵시 있는 디딤새가 촘촘히 이어진다. 이후 학 역할의 여성군무가 등장하여 아정한 움직임을 이어가고, 남성군무가 그들 사이를 오가며 〈동래학춤〉의 뛰는 사위를 반복한다.

이처럼 ‘소나무-학-소나무와 학’으로 이어지는 군무는 전정(殿庭) ‧ 마당 ‧ 방안에서 연희된 각종 전통춤 동작을 능수능란하게 변주하는데, 작가의 우리 춤 일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짐작케 한다. 그런데 이들 춤을 소나무와 학으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 감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 ⓒ국립부산국악원/옥상훈



폐학(3장)은 인간의 욕망을 문무(文武)의 대립으로 이미지화하며, 이를 통해 학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계(2장)가 깨어졌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나전칠기 장식장의 화려한 학 문양이 영상에 나타나고, 다수의 문관과 무관이 등장한다. 대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들의 대결은 일무(佾舞)를 닮아 있는데, 정서적 긴장감이나 욕망으로 인한 갈등 혹은 파괴를 확인하기 어렵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 ⓒ국립부산국악원/옥상훈



피학(4장)은 전쟁과 황폐화된 자연으로 인해 죽임 당하는 학과 인간을 묘사한다. 무대 후면 높은 단상 위에 음악을 맡은 앙상블 시나위(대표:신현식)와 특별출연한 김덕수가 앉아 있고, 판소리 한 대목이 흘러나온다. 구성진 창은 소프라노의 고음과 뒤섞기고, 방상시 역할의 남성군무와 학 역할의 여성군무가 등장한다. 원래 방상시는 궁중 나례에서 거대한 탈을 쓰고,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신(疫神)을 물리치는 나자(儺者)이다. 그런데 작품에서 방상시는 학을 괴롭히는 인물로 묘사되며, 급기야 죽음으로 내몬다. 죽은 학의 잔해 위로 굴곡진 한국근현대사를 담은 영상이 쏟아져 내린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 ⓒ국립부산국악원/옥상훈



학명(5장)은 살아남은 학과 인간이 죽은 벗을 부르며 눈물짓는 대목이다. 별빛 또는 설원을 연상시키는 영상과 함께 긴 수건을 든 여성군무진이 등장한다. 영남지역 주요 레퍼토리 중 하나인 김수악류 〈살풀이춤〉을 변주한 움직임이 처연하게 이어지고, 중간 중간 슬픔이 배인 어깨로 장단을 타는 부분이 부각된다. 말미에 절규하던 무용수가 무대 아래로 사라지면, 남은 자들의 아픔도 짙어진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 ⓒ국립부산국악원/옥상훈



합설(6장)은 죽임의 세계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장(場)이다. 혼합박인 동해안별신굿 장단을 재해석한 음악이 관객의 정서를 뒤흔든다. 이어 바라를 든 여성군무진과 보다 큰 대(大)바라를 든 남성군무진이 순차적으로 등장한다. 황금빛 바라와 오방색 의상이 시청각을 자극하고, 여성의 명료한 디딤새와 남성의 호방한 몸짓이 마지막 종막을 향해 달려간다. 휘몰아치는 이 과정은 정서적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대를 감도는 정서가 지나치게 단정하다고 할 수 있다.



국립부산국악원 무용단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 ⓒ국립부산국악원/옥상훈



종막은 죽임 당한 학이 다시 살아나 평화의 메시지를 던져준다는 것이다. 무대 중앙에 연꽃 문양이 가득하고, 죽임 당한 학들이 그 주변을 에워싼다. 저음의 입소리 와 함께 궁중 학이 등장하여 우아한 날갯짓을 하고, 나머지는 객석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 꽃을 나눠준다.

예술일반에서 제목은 작품의 주제, 제재, 형식 따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관객이나 독자의 독해에 도움을 준다.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이란 긴 표제는 이 작품의 주제가 자연과 인간의 상생 및 평화임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주제를 구체화시키기 위한 핵심적 재료(題材)가 학임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동래학춤〉을 비롯한 영남 춤 자산을 두루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살필 수 있다. 그렇다면 말미의 ‘합설(合設)’은 무엇을 표방하기 위한 것인가? 앞서 살핀 6장의 소제목이 합설이기도 하다. 이것을 강조하기 위함인가?

작가의 의도를 살필 수 있는 팸플릿에서 합설은 『악학궤범』에 수록된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따온 것이다. 긴 정재 제목 끝자락에 있는 합설은 각기 다른 춤이라 할 수 있는 〈학무〉, 〈연화대무〉, 〈처용무〉를 하나의 작품으로 묶고 있음을 표현한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양식은 각기 다른 에피소드(episode)를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옴니버스스타일(omnibus style)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는 단순 나열이 아니라, 전체를 묶는 서사 또는 서정이 있음을 암시한다.

합설과 관련된 작가의 의도를 고려할 때,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쟁점은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그 처음은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각 장면의 명료한 내용 전달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품의 면면을 살피면, 서막과 종막을 포함한 모든 장면이 인간은 학이고, 학은 곧 인간임을 전제한다. 한국전통예술일반에서 인간과 자연의 친교(親交)는 쉬이 발견되며, 〈춘앵전〉이나 〈동래학춤〉에서도 인간과 꾀꼬리, 인간과 학이 하나가 되어 그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그러나 오늘날 이 같은 관계는 쉽게 감지되기 않는다. 때문에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계기점이 필요한데, 작품에서 그 단초를 찾기 어렵다. 이로써 여러 등장인물의 역할과 의미가 불투명했으며, 각 장면의 내용 또한 명료하게 전달되지 못했다 하겠다.

두 번째는 각기 다른 장면을 하나의 양식으로 묶는 서사 또는 서정의 명확한 전달이다. 작품의도를 중심으로 얼개를 추려보면, 학과 인간이 평화롭게 공생한다(2장 현학). 평화는 이내 깨어지고(3장 폐학), 학과 인간이 죽임 당하며(4장 피학), 슬픔이 극대화된다(5장 학명). 이후 정화와 치유의 과정을 거쳐(6장 합설) 살림의 세계로 이행한다(종막 학립). 결국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서사는 죽임 당한 뭇 생명이 정화와 치유의 과정을 거쳐 참된 살림의 세계로의 이행한다는 것이다. 이를 서정으로 치환하면 죽임은 깊은 슬픔 내지는 한(恨), 정화와 치유는 신바람 내지는 신명, 살림은 온화한 웃음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 같은 서사와 서정은 앞서 언급한 바 있는 인물과 장면의 모호성으로 인해 오롯이 부각되지 못한 측면이 크다 하겠다.

국립부산국악원의 〈학-상생과 평화의 영남춤 합설〉은 비록 미완이기는 하지만, 기존 국공립단체에서 흔히 선보이던 무용극을 탈피하여, 합설이란 새로운 형식을 실험했다. 또한 신무용식 움직임을 지양하고, 전통춤 동작 일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와 더불어 다양한 움직임을 개발하고자 한 노력은 매우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동시대적 감수성을 반영한 의상 ‧ 무대 ‧ 조명은 시각적 세련됨을 선사했으며, 한국음악과 서양음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반주는, 긴장과 이완의 정서곡선을 적절히 조절하지 못해 다소 과잉된 인상을 주었으나, 청각적 신선함을 제공했다. 새로움을 향한 도전은 언제나 쉽지 않다. 넓고 깊은 고민 속에서 진일보한 다음을 기대한다.

송성아

춤이론가. 무용학과 미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전통춤 형식의 체계적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표저서로 『한국전통춤 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한국전통춤 구조의 체계적 범주와 그 예시』(2016)가 있다. 현재 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있다.​​​​​​​​

2024. 5.
사진제공_국립부산국악원, 옥상훈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