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생사의 의지가 난발하는 불안정한 정글을 기대하며
김혜라_춤비평가

국립현대무용단 김성용 감독의 〈정글〉 (4.11~14, 토월극장)이 다시 한번 선보였다. 감독은 정글이란 상황에서 표출되는 날 것의 이미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정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반추하려 한 것이다. 춤꾼 저마다의 잠재된 감각을 일깨워 몸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굴하려는 감독의 의지는 대구시립무용단 재임 때부터 시작된 화두이다. ‘프로세스 인 잇'(Process In It)이란 감독만의 움직임 탐구법을 가동시켜 관성에 찌든 몸에서 탈피한 춤을 추구하고 있다. 자발성에 기초한 안무 메소드로 춤의 본질을 파헤치려는 감독의 노력은 규격화된 춤교육에 대한 반성적인 실천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지속적인 탐구 과정을 거친 〈정글〉은 관객에게 생명력이 물씬 발현되는 무대를 선사했는가?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국립현대무용단/황인모



작년 국제현대무용제에서 발표한 〈정글: 감각과 반응〉에서 ‘감각과 반응’이란 부제를 뺀 〈정글〉은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미시적인 개인의 정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작에 비해 현실적 삶에 빗대어 볼 연상의 구조는 약화되었고, 정글 속 개개의 숙명을 내포한 몸짓이 강화되었다. 유명무실했던 장치인 숲 더미는 정글 밖의 대자연으로부터 선사 받은 빛을 여과하는 장치로 쓸모 있는 변신을 했다. 전체적인 톤도 통일되어 집중력이 올라갔고, 움직임 구사법도 전작에 비해 개성이 잘 두드러졌다. 사선과 평행선으로 시시각각 비춰지는 조명 빛의 쓰임새나 토월 극장 무대의 깊이감을 십분 활용한 원근법적 전략도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요소로 적절했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국립현대무용단/황인모



첫 장면은 다시 봐도 인상적으로 시계추를 돌려 원시적인 세계로 관객을 안내한다. 영험하게 보일 정도로 빛 주변부를 천천히 거니는 원무로 고요히 진동하는 정적을 선사한다. 마치 죽거나 죽여야 하는 생존 전쟁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의 긴장감이다. 열대우림 속에서 17명의 춤꾼들은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며 각자 도생의 문법으로 격렬하게 에너지를 품어낸다. 음영 사이 빛을 통해 한 명씩 드러나는 몸짓은 우주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함과 동시에 저항하는 양가성을 품은 생명체로 오묘하다. 빛과 그림자 틈새에서 유영하는 몸짓들이 함축하는 자기 발언은 침묵속에 강한 힘(의지)으로 어필된다. 그늘진 찬란함이랄까. 그들은 탈구된 몸동작으로, 급작스러운 하강으로, 늘어지는 동작으로, 유연하고 유기적인 움직임에서 이탈하기를 자처한다. 다종다양한 생명체의 생존방식이라 여겨진 무대에서 춤꾼은 미개척된 땅을 일구듯 자신의 몸을 거칠게 개간해 나아간다. 생을 향한 의지이자 집념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국립현대무용단/황인모



마리히코 하라(Marihiko Hara)의 음악에 힘입어 정글에서의 관계성이 펼쳐지고, 공동체 안에서 도태되는 형국 같은 생태계의 모습이 그려진다. 17명의 춤꾼들이 작품 중반부까지 서로 접촉하지 않는 전개도 흥미롭다. 연대할 수 없는 운명으로, 몸을 맞댈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고독이 동반된 경계심으로 읽혔다. 카오스모스 한 정글에서 스스로를 지켜내야 하는 숙명이 전작보다 선명해졌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국립현대무용단/황인모



그러나 한 시간 내내 이어지는 몸서리는 동작들은 시간이 갈수록 이질성이 희미해졌다. 서사 구조를 걷어낸 병렬적인 안무전개도 후반부로 갈수록 동어 반복되며 현장의 긴박함이 상쇄되었다. 등장하는 무리의 규모만 달라질 뿐 개인적 몸부림 이상의 다른 맥락으로 나아가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일례로 남녀(생명체)의 교배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인류 존속이란 본능적인 행위 암시가 있었으나 임팩트가 약했다(개인적으론 더욱 직설적인 표현이었으면 어떠했을까 싶다). 작품의 핵심 요소인 움직임도 정형성을 거부한 특별한 표현법이라 하기도 애매하다. (우리는 피핑톰 단체같이 비가역적으로 신체를 사용하는 움직임부터, 보리스 샤르마츠의 정형을 거부한 직설적인 움직임 등 꽤나 다양한 움직임 구사의 스펙트럼을 경험했다.) 새로운 감각의 태동을 찾으려는 감독의 진지한 동기와 시도와는 별개로 말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정글〉 ⓒ국립현대무용단/황인모



필자는 전작에 대해 “생의 치열함을 빗대어 ‘살아있음’을 방증하려 한 작업이나, 그 논지를 끌고 갈 전환적인 전략이 ‘움직임’ 하나로 공략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평한 바 있다 (〈춤웹진〉 11월호). 이번 신작도 정글에 내팽개친 개체들의 몸부림이 호소력을 갖기 위해서는 오늘과 매개할 전환적인 사고와 장치가 필요해 보였다. ‘원시적 미감에 기인한 몸짓 향연’ 의로만 그치지 않으려면 말이다. 움직임에만 사력을 다하기보단 생명의 탄생, 도태, 소멸, 본능, 죽음의 몸짓이 정신없이 펼쳐지는 생명력이 품어져 나오는 무대 말이다. 작품이란 내용을 이끌어 갈 단서를 제시하며 결론으로 도달해야 한다. 죽임의 단서가 실종된 환상 속 정글이 아니라 복잡다단한 ‘생사의 의지가 난발하는 불안전한 정글’을 상상해본다.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생존 경쟁이 과거와 오늘이 다르지 않게 보이려면 말이다.

또 하나 작품의 작업과정을 기록해 놓은 ‘리슨 투 유어 바디’ 책자에는 작업에 임하는 감독의 춤철학이 녹아 있고, 오디션 과정이나 연습실 광경부터 무용수들의 경험담까지 세심하게 관찰한 현장이 담겨 있다. 공공무용단에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기록하는 일은 필요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작품이 창작되는 지난한 과정을 관객과 공유하며 작품을 되뇌어 보는 의미 있는 기록이다. 다만 책의 내용상 ‘저자’라는 표기보다는 ‘기록자’ 내지는 ‘필자’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정글〉이 한국을 대표하는 컨템퍼러리 작품으로 7월 파리에 소개된다. 예술에 포용적이나 꽤나 논리와 감각에 까다로운 유럽 관객들에게 호소력이 있을 지 기대와 우려가 교차된다.

김혜라

현장 비평가로 2012년 한국춤비평가협회를 통해 등단했다. 월간 <춤웹진>과 <더프리뷰>에 정기적으로 컨템퍼러리 창작춤을 기고하고 있으며, 국공립을 비롯하여 여러 문화재단에서 심의와 평가도 병행하고 있다. 세종시문화재단 자문위원, <춤웹진>편집위원이며 중앙대에서 비평관련 춤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

2024. 5.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 황인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