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통성과 즉흥성, 창조성을 갖춘 전통춤을 추어야 한다
정년퇴임 및 출판기념식을 가진 이병옥 (前 용인대 무용과 명예교수)

 

 

 

 

 ​전통춤의 갈래는 계통별 분류에 중심이 우선이다

김영희: 이병옥 교수님 정년을 축하드립니다. 정년퇴임과 출판기념식을 겸해서 ‘계통별 전통춤’이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올리시는군요. 이번 공연을 계통별 전통춤이라는 타이틀로 붙이신 배경이 있나요?

이병옥: 전통춤을 분류하는데 있어서 그동안 유파(流派) 개념 중심으로 설명을 많이 했는데, 나는 전통춤의 분류를 궁중계, 기방계, 재인계, 민간계, 사당계의 계통 개념으로 먼저 보아야 한다고 일찍이 부터 생각했어요.

김영희: 유파 개념이 일종의 작가의 고유한 스타일 개념인데, 각 스타일이 다른 점으로 분류하는 방식이 문제가 있다고 보신건가요.

이병옥: 아니 유파는 그대로 의미가 있지요. 같은 춤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니까. 그런데 유파별, 계통별 분류를 씨줄과 날줄 개념으로 보면서, 계통별이 먼저고 그 아래에서 유파개념으로 나뉘어야 한다고 보는 거지요. 기녀들이 추는 춤, 광대들이 추는 춤, 무녀들이 추는 춤이 우선 기본 바탕과 구조에서 다르기 때문에, 계통성과 지역성을 먼저 분류해야 한다는 점을 문화재청에서도 인식을 같이 했어요.


 

 

 

김영희: 어쨌든 변화되더라도 현장연구는 해야 하잖아요.

이병옥: 그 변하는 모습을 연구해야 해요. 변하기 때문에 핵심이 유지되는지, 어떻게 달라지는 지도 봐야해요. 굿도 사람이 달라지면 달라져요. 옛날에 경기도당굿 장말도당굿은 일주일을 했었거든. 먹고 자고 자다가 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네 시간도 못해 전 마당을. 기능이 없어진 거죠. 제자들이 다 배우지를 못해서. 경기도 굿이 역시 재인청이 관장하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전국에서 경기굿이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쪼그라들어서 안타깝지.

김영희: 정병호 교수님의 연구를 계승하고 계신 걸로 아는데 어떻게 만나시게 됐지요?

이병옥: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1966년에 서울교대를 갔을 때, 김양곤 교수가 계셨어요. 무용교수가 남자교수여서 깜짝 놀랐지. 김양곤 교수에게 무용을 배우다 보니 교육대에서 희소가치도 있고 매력이 있어서 무용부에 들어가서 무용을 했어요. 내가 학창시절에 기계체조를 해서 유연하니까 동작도 잘 했고. 그러면서 학교선생을 하려면 레크리에이션을 잘해야겠다 싶어서 YMCA에 갔어요. 그때 YMCA에서 토요일은 전석환씨가 싱어롱을 하고, 화요일은 정병호 선생님이 포크댄스, 교육무용을 가르쳤어요.

김영희: 정병호 교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셨나요?

이병옥: 그럼 직접 가르쳤지. 포크댄스연구회를 조직했어요. 거기서 활동하면서 1967년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정병호 선생님한데 배웠어요 매주. 졸업하고 임용된 화곡국민학교에서도 포크댄스나 전통춤을 내가 다 가르쳤어요. 무용수업을 할 때 반마다 수업을 바꿔서 내가 했고, 운동회 하면 몇 학년을 다 가르쳤어요. 연구수업 때도 포크댄스 가르쳐서 보급하고. 그 때 김양곤 교수님이 전국순회하면서 아동무용강습회를 하면, 가을에 할 마스게임도 가르치고 무용도 가르치셨어요. 거기서 조교로 활동하고. 그래서 두 분을 모시고 공부했어요.

김영희: 그렇군요. 현재는 교육무용이 죽었는데 1960, 70년대는 활발했지요.

이병옥: 맞아요. 그래서 내가 김양곤 교수님의 대를 이어 교육무용을 하겠다고 교대를 졸업하면서 ‘R’이라고 도장을 팠어요. ‘R’은 닥터이며 레크리에이션의 의미를 둘 수 있는데, 아동무용 교육무용을 나의 길로 하겠다고 마음먹고 김양곤, 정병호 선생님을 만나며 양 쪽을 다했지. 그런데 김양곤 교수님이 정년도 못하시고 돌아가셔서 교대에서 길이 끊어졌지. 그때 잠시 좌절했지만 나는 또 한 분의 스승, 정병호 선생님이 계시니까. 그런데 정병호 교수님은 전통춤 관련 활동을 하게 됐는데, 임동권 박사가 무용 쪽에 문화재위원이 없으니 정병호 교수님한테 활동을 요청하셨고, 1970년부터 정병호 선생님이 현장조사를 하셨어요. 그러면서 교육무용을 접고 전통춤에 전념하셨지.

김영희: 그러면 초등학교 재직하면서 정병호 선생님이랑 현장에 다니셨나요?

이병옥: 그럼, 근데 평일 날에는 내가 못 따라가잖아. 나는 그게 내 한이야. 교수님은 지방에 가시는데, 나는 수업해야 하니. 주말하고 방학 때는 따라갈 수 있지만. 참으로 고마운 게 그게 내거라고 생각하고 공부를 시켜준다고 생각하고, 무조건 스승을 따라다녔어요.

김영희: 전통무용연구회의 결성을 보셨겠네요.

이병옥: 정병호 교수님이 1970년부터 기초조사를 하셨고 1976년에 전통무용연구회 출범해서 본격적으로 YMCA에서 이매방, 김숙자, 김석출, 이동안, 하보경 선생 등을 불러서 발표회를 했지. 그 때 나보다 위에 이종만 선생님이 계셔서 총무 역할을 하셨고. 김정녀 선생은 문화재청 예능민속실의 연구원이었는데 참여하셨고. 그밖에 이름 걸으신 분들이 있었고, 나는 막내니까 허드렛일을 했지. 근데 그게 나한테는 가장 큰 공부였어. 정병호 교수님의 모든 연구를 내가 옆에서 지켜봤고, 도와드린 경험이 내 자산이 됐으니. 정병호 선생님 『춤사위』 책도 내가 다 도와드렸어요.

김영희: 그러면서 여러 학교에서 학위를 하셨지요?

이병옥: 무용을 공부하려 했는데, 당시에는 어느 대학에도 무용이론 학위가 없었어요. 그래서 국문과, 체육과에서 민속이나 무용 관련 공부를 했고, 1993년에 경기대에서 박사를 마쳤어요. 용인대 무용과에 교수로 간 건 1988년이었고. 그 당시는 용인대가 아니라 유도대였는데, 무용과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초창기에는 힘들었어요. 1985년에 객석에서 무용평론상에 당선된 점도대학교수 되는데 도움이 됐었고.

김영희: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송파산대놀이와 인연은 어떻게 맺으셨는지요?

이병옥: 서울에 와서 포크댄스를 배우며 아동무용연구회 이종만 선생님을 알게 되었는데, 1973년에 송파산대놀이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그 할아버지들이 이종만 선생님 무용연구실에 와서 연습을 하셨어요. 이종만 선생님은 아동무용연구회 회원들에게 송파산대놀이를 배우게 했고. 나는 아동무용연구회 회원은 아니었지만 같이 배웠지. 그런데 전수자가 많았으면 안 배웠을 텐데, 전수자가 많아질 때까지만 배우자고 생각한 것이 송파산대놀이와의 오랜 인연이 된거지. 이종만 선생님이 조교역할을 하시고, 허호영 선생님이 그 당시는 대장이야. 그때만 해도 잠실벌이 허허벌판이었는데 시골 장터에 사무실 같을 거 하나 얻어서 토요일마다 배웠어요. 물론 빠진 날도 있었지만. 그래서 이종만 선생님이 취발이 할 때, 나는 신장수 역할을 하고, 상좌춤 취발이춤도 배웠지. 1981년에 전수조교가 됐다가, 1988년에 교수되면서 전수조교를 내놨다가 2000년에 전수조교로 다시 복귀했고, 지금은 송파산대놀이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어요. 고려대 졸업할 때 석사논문이 송파산대놀이였어. 문화재 지정당시는 허호영 선생님이 혼자 구술한 것으로 연희본이 만들어졌는데, 내가 가보니 연희본하고 다르게 연희하시는 거야. 그래서 할아버지 여섯 분의 재담을 5년간을 녹음해서 연희본을 다시 정리했지. 내가 정리한 연희본이 기존의 것보다 3배나 됩니다. 대사도 정리하고 연극적인 마당 구성, 기본 춤사위도 정리하고. 1982년에 석사논문으로 내자마자 일 년 후에 책으로 만들었어요. 사실은 내일 공연에 송파산대놀이 한 대목이 있는데 내가 공연합니다. 끝나고 깨끼춤을 추라고 하는데, 무용계에서는 이론가로만 알지만 나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거야.


 

 

 



 

 

 

 

김영희: 정병호 교수님의 연구를 이어서 하시겠군요?

이병옥: 그래요. 정병호 교수님이 전통춤을 민속으로만 연구하셨는데, 민속춤을 그냥 민속학적인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학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우리 춤만 갖고 볼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봐야 객관화될 수 있다. 춤의 인류학은 사실상 인류학자들이 없고, 그냥 인류학자들이 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인류학적으로 접근해보면 전통춤은 법칙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원리를 찾아내야 해요. 그런 개념으로 고대무용을 이번에도 정리했고. 비교하면서 전 세계적 시각으로 서양춤과 비교하면서 한국춤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병호 교수님의 학설을 더 발전시키고 세분화해서 기초를 마련해가지고 정병호-이병옥의 분류법으로 전통춤을 연구하고자 합니다. 분류법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니까.

김영희: 그러면 전통춤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까요. 요즘 전통춤 공연이 활발하고 전승체계도 달라지고 있는데.

이병옥: 지금까지 전통춤의 전승이 맹목적적인 무형문화재제도였고, 보유자들은 왕 같은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문화유산 개념으로 봐야 한다. 즉 많은 인구가 그 춤을 춘다면 문화재로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어떤 전통춤이 보편화됐기 때문에 문화재로 인정 안할 수도 있지만, 많은 이들이 즐기기 때문에 소중하게 봐야 한다는 거지요.

김영희: 희귀성이 아니라 명무개념으로 문화유산을 즐긴다면 지정한다는 건가요?

이병옥: 맞아요. 문화재로 지정된 춤 종목에 줄서기나 이수증에 매달리면서 맹목적인 전승을 위해 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춤을 추는 춤을 문화재로 지정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문화재는 문화재일 뿐이지, 영웅이 아니다. 중앙문화재도 그렇고 지방문화재도 그렇고. 그냥 똑같은 무용가 중에 하나일 뿐이지요. 정병호 선생님이 문화재를 27종 지정했는데 마지막에 후회를 하셨어요. 그때만 해도 문화재병이 심해서 폐해가 심했는데. 춤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가장 잘 춰야 하는데 남의 춤 춰봐야 결국 2등밖에 안 되니까. 이매방 선생의 춤을 아무리 잘 춰봐야 2등 밖에 안 된다는 말이고, 앞으로 전통성과 즉흥성, 창조성 없는 춤은 살아있는 춤이 아니다. 그래서 문화재법에서 원형이란 개념을 버리고 전형(典型)으로 봐야한다고 방향도 바뀌었어요.

김영희: 그렇군요. 시대가 변했으니 문화재제도도 바뀌는군요. 사실 옛날에 무형문화재제도라는 것 자체가 없었고, 춤꾼들은 춤으로 경쟁을 했었지요. 전통춤 공연이 관객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도록 활성화돼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오늘 인터뷰 감사하고, 정년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2013. 04.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