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이숙재 『한글춤』의 변천
이해준의 실험과 3제자의 소극장 춤
이만주_춤비평가

 세상에는 온갖 공연예술이 있지만 자기 나라 글자를 소재로 삼아 작품을 만든 경우는 거의 없으리라. 이십여 성상, 다양한 줄거리와 형식으로 공연을 펼치며 107회 공연을 한 이숙재『한글춤』의 역사에서 이번 소극장인 춤전용M극장에서 공연된 『천(天)·지(地)·인(人)으로 그려본 한글춤』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춤언어를 사용하고 무용 역사상 최초로 로봇이 인간과 함께 춤을 추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2012.10.27-28/성아름, 박희진, 이정화 안무/이해준 연출).
 이 시점에서 지금까지 20여 년간의 『한글춤』의 역사와 변천(變遷) 양상을 정리해 본다.


 I. 『한글춤』의 탄생과 발전 과정

 『한글춤』은 한국 안에서가 아니라 바깥인 미국에서 움터, 10년이라는 회임기간 끝에 탄생되었다. 1980년 뉴욕(NYU)으로 유학 가, 84년까지 머문 이숙재는 당시로서는 젊고 재기발랄하며 의욕에 찬 한국의 무용가였다. 현대무용의 본류를 알고 싶어 했던 그녀는 대학의 전임강사라는 안정된 기득권을 버리고 다시 공부를 위해 뉴욕행을 택했다.
 그녀는 현대 춤의 본고장에서 몇 가지를 느끼게 된다. ‘현대의 춤이란 방향성 없이 가는 것이 방향이라는 것’, ‘궁극적으로 예술춤이란 누구에게서부터 배울 것도 없이 자기 나름대로 실험을 계속하면서 독자성을 추구하면 됨’을 알게 된다. 그 외에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예술의 창작이란 남의 것에서 헤매일 것이 아니라 자국의 고유문화와 관련된 것을 추구할 때 더욱 진정한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사실에 바탕한 사색과 숙고 끝에 어느 날 뇌리에 자명하게 떠오른 것이 우리 민족의 자랑이자 세계가 인정하는 가장 빼어난 글자인 한글로 춤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다. 이후 그녀의 화두가 된 『한글춤』은 뉴욕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밀물현대무용단을 창단한 1984년에서 다시 7년이란 세월이 흐른 199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된 작품이 되어 국내 무대에 올려졌다.
 안무자이자 실질적인 연출자인 이숙재는 춤으로서는 대형 레퍼토리라 할 수 있는 『한글춤』 작품에 처음부터 그가 뉴욕에서 보고 배워 온 방식들인 다른 장르와의 협력, 타(他) 매체와 첨단 테크놀로지의 활용이라는 미장센(Mise-en-Scene)을 구사했다. 『한글춤』을 위해 특별히 작곡된 음악과 구성된 음향을 배경으로 그 음악에 맞춘 듯한 조명 아래 남녀 무용수들이 마치 글씨를 써나가는 듯 몸으로 한글의 자모를 조합·형성하는 것을 춤으로 나타내었다. 인간의 몸과 춤이 가장 아름다운 글꼴이 되는 오묘함은 한글만큼이나 신비스럽다. 한글이 판타지이듯이 『한글춤』도 판타지이다.
 그 후 이십여년 간, 2009년 10월, 100회 공연까지 『한글춤』이라는 대명제는 그대로 둔 채, 「홀소리, 닿소리」, 「신(新)용비어천가」, 「뿌리 깊은 나무」, 「한글 새천년의 꿈」, 「샘이 깊은 물」, 「훈민정음 보물찾기」 등 40여개의 제목을 달고 버전(Version)을 달리해, 국내외에서 공연되며 우리 한글의 빼어남과 아름다움, 우리 창작무용의 저력을 대내외에 알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2010-2012년, 이해준 안무 공연과 이번 소극장 공연까지 치면 107회, 나아가 소규모 공연까지 치면 수십회가 더 늘어남).
 버전을 달리 할 때마다 한글의 원리와 철학, 창제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로 내용과 구성의 일부를 새롭게 짰다. 또한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작품에 변화를 주며 『한글춤』은 진화를 거듭했다. 우리 춤계의 공연이란 것이 대부분 1-2회 공연으로 끝나고 길어야 3-4일을 넘기지 못하는 풍토에서 한 레퍼토리로 100회를 넘긴 공연은 무용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Ⅱ. 이해준의 실험, 젊은의 새 판(Paradigm) 짜기 


 시대가 바뀌면 사람들의 기호도 바뀌고 문화도 바뀐다. 춤 문화도 예외일 수 없다. 따라서 한글춤도 달라져야 했고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야 했다. 이러한 추세를 정확히 읽은 사람이 이숙재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이해준(현 한양대 생활무용예술학과 교수)이다.
 『한글춤』은 2009년까지는 주로 옥내의 대형극장을 이용하며 유료관객을 대상으로 공연되었다. 하지만 이해준이 안무와 연출을 주도하기 시작한 2010년 10월부터는 무대가 옥내가 아닌 세종문화회관 야외특설무대로 옮겨졌다. 『한글춤』은 이제 연희자와 관객 사이에 소통성이 강한, 우리 전래의 마당놀이 형식을 취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관람이 개방된 것이다.
 그간의 변화가 업그레이드(Upgrade)로 공연에 따라 버전(Version)이 바뀌었다면 그는 젊음과 더욱 현대화된 시각으로 개념(Concept)을 바꿔 틀과 판(Paradigm) 자체를 다시 짜기 시작했다. 이해준은 일찍이 초현실주의 시적 상상력을 수반하는 춤 작품을 만들며 인간 무의식의 세계를 도출하여 형상화하고 자기 특유의 춤언어를 구사하는 개성 있는 젊은 안무가였다.
 그는 그가 만드는 『한글춤』에, 내용에 있어서는 판타지 소설과 공상과학 소설(SF)의 스타일을 차용하면서 형식에 있어서는 라이브 밴드와 뮤지컬 배우들의 가창을 삽입하여 뮤지컬과 음악극적 요소를 대폭 가미했다. 이제는 발레를 비롯한 모든 춤 영역에 진입한 비보잉을 과감하게 받아들였으며 비보잉 중에서도 또 다른 분화 형태인 팝핀(Poppin) 등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간 순수예술춤에서 금기시했던 소위 실용춤을 수용하여 순수예술춤과 대중예술춤의 자연스런 조화를 시도했다. 패션의 개념, 디지털 디자인, 3D 입체영상 등, 첨단 테크놀로지의 사용을 통해 다양한 부류의 관객과 소통을 꾀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잘 보여준 작품이 그가 바통을 이어 받은 후, 첫 번째로 무대에 올린 『마당놀이 한글 아띠』이다. 2010년 10월 7일 밤(오후 8시)에 세종문화회관 야외특설무대(동쪽 계단 위 상판무대)에서 공연된 작품은 내러티브가 동화적 상상을 넘어 SF의 얼개에 가까웠다.
 우주 내지 외계인과의 교감을 담다 보니 무대의상으로 어떤 장면에서는 우주복 같은 것을 입기도 했다. 디지털 영상이 사용되는 가운데 밴드의 생음악에 뮤지컬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고 믹싱 뮤직 전문DJ가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는 음악이 사용되기도 했다. 밀물현대무용단의 주역 무용수들(이정화, 이보경, 성아름, 박희진, 최원준)과 객원 무용수들(이영일, 김종기), 비보이들(이우재, 이덕인, 박진성) 외에 한양대 학부와 대학원에 재학 중인 32명의 젊은 무용수들(안겸, 이상윤, 최자윤, 권오혁)이 출연하여 도합 40명이 넘는 숫자가 가을 밤, 춤의 향연을 벌였다.
 2011년 10월 6일에는 세종문화회관 동쪽 계단 쪽 상설무대에서 『한글 춤으로 노래하다』가 공연되었다. 현재 한글의 여러 서체인 궁체, 판본체, 흘림체, 샘물체를 시도한 것이 흥미로웠다. 세계 비보잉 배틀(Battle)을 주름잡고 있는 7,8명의 비보이들이 출연하여 젊음의 열기로 공연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2012년 10월 5일에도 마찬가지로 세종문화회관 야외특설무대(대극장과 세종M극장 사이 공간 안쪽)에서 『한글 함께 누리다』라는 작품으로 한글이 갖는 에너지의 흐름, 한글의 역학(力學)을 춤으로 구현해 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 사이, 서울문화재단 공연예술창작활성화지원사업 선정작으로 2012년 5월 12-14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뿌리 깊은 나무』를 공연했다. 이 작품에서도 내러티브로는 판타지 소설의 소설을 취하면서 형식으로는 음악극 요소를 많이 가미하여 갈등과 대립이 화합과 상생으로 변환하는 세상과 인생의 진리를 구현하고자 했다. 작품에는 전체적으로 이해준에 의해 변화된 『한글춤』의 다양한 실험이 총망라되었다.



Ⅲ. 또 다른 실험, 
『천(天)·지(地)·인(人)으로 그려본 한글춤』


 이숙재의 여자 제자들이자 밀물무용단의 단원인 이정화, 성아름, 박희진은 이번 10월에 공연된 『천(天)·지(地)·인(人)으로 그려본 한글춤』에서 아예 차원(Dimension)을 바꾸는 또 다른 실험들을 시도했다.
 우선 이제까지 중·대형으로 공연되던 『한글춤』을 소규모화하면서 대극장 공연을 소극장 공연으로 바꾼 점이 두드러졌다. 두 번째가 그간의 『한글춤』이 구상(具象)과 내러티브에 의존이 많았다면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많은 추상적인 춤단어를 사용하면서 대폭적으로 은유(Metaphor)의 세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한글춤』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몸과 춤으로의 글꼴 형성도 잠시 접었다. 세 번째는 무용사에서 아마도 최초로 로봇이 춤꾼으로서 인간 무용수와 함께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는 점이다.
 작품을 한글창제 원리의 바탕을 이루는 삼재(三才)인 천(天)·지(地)·인(人)의 3장(章)으로 나누어 세 명이 각각 1장씩을 안무하고 직접 출연하여 춤췄다. 1, 2, 3장은 각 장이 독립된 장이면서 전체적으로는 연결성을 갖는 옴니버스 형식을 취했다. 모두가 밀물무용단에서 성장하여 주역이 된 무용가들이다보니 안무와 춤에서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각각이 개성을 발휘했다.
 1장과 2장의 성아름과 박희진은 『한글춤』이 갖고 있는 포스트모던 댄스와 테크놀로지의 최첨단적인 분위기에서 공연예술의 원초라고 할 수 있는 제천의식(祭天儀式)과 우리 민속무용의 샤머니즘적인 분위기로 돌아섰다.
 1장〔천(天)-4차원의 공간〕을 안무한 성아름은 하늘을 우주라는 공간에서 볼 때는 꼭대기와 태양이 있는 곳, 사람으로 보면 머리와 사유하는 정신의 영역으로 해석했다. 우리 옛 조상들은 하늘을 원(圓, o)으로 생각했다. 무대 중앙에 선 성아름을 7명의 무용수가 원으로 둘러싸고 함께 춤을 출 때는 하늘로부터의 강신의식·降神儀式)이나 태양으로부터의 채화의식(採火儀式)을 거행하는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브제로 사용된 무대 중앙에 놓인 넓은 흰 천 위, 가운데로 떨어지는 원형(圓形)의 붉은 조명은 태양일 수도 있고 태극의 원초적인 형태 내지는 변형(Deformation)일 수도 있겠다. 태극(太極)은 생명체와 삼라만상의 원천이자 기(氣)의 순환을 뜻한다 그 ‘기’의 흐름을 타는 듯, 성아름은 몸의 경련을 일으키며 춤을 추었다. 마치 신내림을 받는 무녀가 몸을 떨 듯이……. 이어 그녀는 솟대 위의 비상하는 새처럼 새가 되어 춤을 추었다. 하늘과 인간세계의 메신저 노릇을 담당하는 새처럼.
 ‘하늘(天)’을 춤춘 1장이 끝나면서 무대 안쪽의 한쪽 구석 천정으로부터 흰 색의 긴 천이 무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긴 천은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이다. 하늘과 땅이 이어졌다.
 옛 사람들은 땅(地)은 사각으로 모가 졌다고 생각했다. 2장〔지(地)-탄생 그리고 소통〕을 안무하고 혼자 춤춘 박희진도 대지(大地)를 사각(ㅁ)으로 생각했다. 2장이 시작되면서 무대 가장자리로 사각 테, 즉 ㅁ 모양의 조명이 비춰졌다. 촛불 하나를 들고 나온 박희진은 땅의 가장자리 ㅁ을 따라 돌며 땅의 세계로 바뀌었음을 암시했다.
 대지는 어머니이다. 인간은 땅을 일궈 먹고 산다. 하지만 인간과 땅은 햇빛을 주고 비를 내려주는 하늘을 경배해야 한다. 그래, 박희진은 땅에 뿌리를 박았다가 또 하늘을 우러르느라 무대 전체로 옮겨 다니며 몸 움직임의 폭을 최대한 크게 해 역동적으로 춤을 추었다. 대지와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하늘과 인간은 땅으로 수렴된다. 박희진은 안무에 천지인의 조화를 나타내려는 듯 했다. 그녀는 사선으로 길게 드리운 흰 천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며 혼신을 다해 춤에 몰입하면서 무대 위에 세워 놓은 작은 촛불과 앙상블(Ensemble)을 이루었다.

 

 

 
 

 앞의 두 명과는 다르게, 3장〔인(人)-스마트 한글〕을 안무한 이정화는 제천의식에서 현대 첨단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이정화는 최첨단 휴머노이드 로봇(안무자는 안드로이드 로봇이라고 했으나 휴머노이드에 해당함)을 등장시켜 함께 춤을 추었다. 사전 프로그래밍(서경대학교 전자공학과 서기성 교수, 같은 과 석사과정 이재민)에 의해서이지만 안무자의 안무 의도대로 움직이며 스스로 춤을 추었다.
 처음 두 남자 무용수가 등장하더니, 키가 약 60cm 되는 로봇 나오(NAO, 무게 4.3 kg, 특수 플라스틱 재질, 프랑스의 Aldebaran Robotics사 제작)가 혼자 걸어 나온다. 서구의 줄인형극 공연을 할 때와 같이 이정화가 마치 위에서 줄로 조종하는 듯한 동작으로 춤을 추면 로봇이 앞에서 거의 유사한 동작으로 춤을 추었다. 그녀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하체 높이 되는 망 모습의 가변성 우리같은 것을 준비하여 그 안에 들어가 춤을 추었다. 그녀의 춤은 1980년대 초 미국에서 유행하던, 로봇의 움직임처럼 팔 다리의 분절된 동작으로 추던 로봇춤을 흉내 내었다. 인간이 추는 희화화된 로봇춤과 실제로 로봇이 앙증맞게 추는 춤이 어우러져 귀엽고 코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글춤』은 글꼴에서 시작하여 로봇이 등장하여 춤을 추는 국면까지 왔다. 로봇이 춤꾼으로서 춤을 췄다는 사실은 춤예술의 미래를 알리는 또 하나의 신호이다. 훗날 무용사가(史家)들은 로봇이 연희자로서 인간 무용수와 함께 무대에서 춤을 공연한 2012년 10월 27, 28일을 특별한 날로 기록할 것이다.

2012. 12.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