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사)민족미학연구소 한국민족미학회 2023 춘계 학술발표회
20~21세기 한국의 민속극부흥운동과 학생운동, 정치사회운동
김사열_경북대 명예교수

1. 머리글: 문화-정치 사이 상호작용하는가?

2021년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개도국’에서 소위 ‘선진국’으로의 위상 격상이 공식 인정되었다. 구체적으로, 2021년 7월 2일 개최된 제68차 유엔무역개발회의(이하 UNCTAD) 무역개발이사회 폐막 세션에서 한국을 A그룹(아시아 및 아프리카)에서 B그룹(선진국)으로 지위 변경하도록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1964년 UNCTAD 설립 이래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지위를 변경한 첫 사례가 됐기 때문이다.

애초에 UNCTAD는 ‘개발도상국’의 산업화와 국제무역 참여 증진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기 때문에, A그룹에서 B그룹으로의 이동은 한국의 산업화가 극상의 수준에 와 있음을 의미한다. 그 뿐 아니라, 한국은 ‘민주주의를 정착해 가고 있는 나라‘로도 분류되어 국제사회에서 주목받는 모델국가가 되어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하게 되었을까? 그 ‘어떻게’에 대하여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한 국가적 성취에 대하여 흔히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의 역할을 거론하지만,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 ‘온 국민의 총력에 의한 것’이라고 답하는 것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20세기 전반에 일제의 강점과 침탈을 당하였고, 바로 이어서 1950~1953년까지 한국전쟁으로 동족상잔과 분단까지 겪은 터라, 그러한 산업화와 민주주의의 동시 성취는 결코 쉬울 수 없는 과제였다. 어쨌든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에 걸쳐 70여년의 세월 동안, 주로 전자는 기업인과 노동자의 지혜와 헌신, 후자는 정치인과 시민의 투쟁과 협력, 희생 등이 만들어낸 피땀의 산물인 셈이다.

세계사 속에서 커다란 역사적 어둠을 밝히려는 흐름의 초기에 흔히 지식인과 같은 소수 주창자의 선도적 역할이 있게 마련인데, 중심적 기치로 내건 가치가 비로소 대중에게까지 확산되어야 결국 그 문제의 난관을 돌파하게 된다. 기회주의적 속성이 강한 선도자들은 그 가치에 대한 지속성이 떨어지지만, 결과적으로 시민과 대중의 공유와 실행만이 진보적 가치를 확보하게 만든다. 한국의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의 정착도 그와 유사한 경로를 걸어왔다.

다양한 시각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충분히 합의되지 않은 기록의 전개가 가능하고, 역시 여러 가지 방향의 해석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예로, 민속극부흥운동이 학생운동과 정치사회운동에 영향을 미쳐서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적 대변혁에 기여하였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지금은 빈약한 구비문학적 주장과 서술이 언젠가 기록적 데이터를 만나 큰 매듭을 지어 완성되도록 기대를 걸어본다. 그러한 논의엔 한 국가의 융성에 문화와 정치가 긴밀히 상호작용(close interactions between culture & politics)함을 전제로 한다.


2. 1960~1970년대 산업화와 민속극부흥운동

한국의 산업화는 1945년 광복 이후 정치적 소용돌이, 한국전쟁, 외국원조 의존 등을 거치면서 거의 백지 상태에 있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부가 수출주도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하면서 산업화는 시동을 건 셈이다. 1962~1982년 동안 연평균 국민총생산 성장률이 8.2%에 이르는 고도성장을 기록하면서 이른바 ‘한강의 기적(Miracle on the Han River)’을 이뤄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를 요약하자면, 1960년대로부터 1980년대까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전통적인 공업화의 발전단계를 거쳤다. 1990년대 이후에는 첨단정보산업, 지식산업, 서비스산업 중심으로 재편되는 후기산업화시대 서비스산업화 단계로 전환되는 소위 ‘선진국형의 산업구조“로 변모해 왔다.

산업화에 있어서, 서구 선진국들이 일반적으로 200~300년의 기간에 걸쳐 성취한 수준을 한국은 불과 50년 만에 이뤄냈다. 그렇게 달성한 ‘압축적 산업화(compressed industralization)’는 세계 근현대사에서 유래 없는 것이었다. 그러한 급속한 산업화는 우리사회에 여러 가지 심대한 변화를 야기했다.

과연 산업화 전개는 한국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 왔는가? 첫째로, 인구의 대규모 이동이다. 농산어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여 도시화가 이뤄졌는데, 2010년에는 무려 80% 집중도가 이뤄졌다. 구체적으로, 농산어촌지역의 고령화와 공동화 방치, 수도권의 지나친 인구집중으로 주거환경 악화와 급격한 출산율 저하 등으로 인하여 국가 존재의 지속성에 큰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둘째로, 수출 우선의 경제정책은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 우대 산업-금융정책을 펼치도록 하였다. 대기업-중소기업, 수출기업-내수기업 간 양극화가 고착되고, 시장지배력을 확보한 재벌 대기업이 중소기업에게 위계적 하도급 불공정거래관행을 강요하여 결과적으로 재벌에게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허용하였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널리 확산되어 정규직-비정규직 간 격차와 차별이라는 고용구조 양극화가 나타났다.

셋째로, 공교육 의무화와 고등교육 비율 확대로 산업현장에 양질의 노동력 공급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구체적으로, 고교생들의 대학진학률 추이를 보면, 1980~1990년대 초반 30%대이었다가 2001~2003년 70%대, 2004년 이후 80%대 내외를 오르내렸다. 그 이후에는 2008년 83.8%, 2020년 79.4%를 각각 기록하였다. 동시에 사회전반의 고학력집단화는 생활수준이 개선된 중산층을 형성토록 하여 참여적 시민의식이 고양되는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960~1970년대 한국사회가 산업화를 위해 줄달음칠 때에 대학사회에서는 탈춤과 풍물굿 등을 포함하는 전통민속문화 부흥운동(revival movement of traditional folk culture)이 서서히 불을 지피기 시작하였다. 1969년 부산대 민속연구회, 1971년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등을 필두로 1973년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고려대 등에 탈춤반이 생겨났다. 민속극 부흥운동은 탈춤꾼들에게 단순히 전통극의 재현뿐 아니라 시대가 권위주의와 독재정치의 상황 아래이어서 풍자와 해학을 통한 민중의식의 성장 같은 흐름에도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어쨌든 1970년대는 독재정권시대여서 새로운 문화예술단체의 결성이나 작품 공연이 자유롭지 못했다. 관청에서 사전심사를 받아야 공연 허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어려움을 뚫고 수도권에서 「공장의 불빛」, 「금관의 예수」, 「진오귀굿」(1973년), 「소리굿 아구」(한두레, 1974년) 등 소중한 작품들이 간간이 탄생하였다. 이 작품들은 공연장을 확보하지 못하는 어려움 때문에 미공개 현장이나 서울제일교회에서 주로 공연을 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지원으로 인하여 박형규 목사와 교회는 당국의 감시대상이 되어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전국의 지역 현장에서도 소박한 형태의 마당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창작되었다. 전라도에서 놀이패 광대가 마당극 「함평 고구마」(1978년)를 공연하였다. 대구에선 한동안 창작탈춤 「냄새굿놀이」(경북대 탈춤반, 1980년 4월 19일, 경북대 시계탑 광장)가 이 지역 최초의 마당극 공연으로 알려졌는데, ‘새날동지회’가 공연한 「원귀마당쇠」(대구 중구 KG홀, 1963년)가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훗날에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한 분위기는 전국이 대구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대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기, 그리고 정부수립기에 진보적인 연극영화운동이 벌어졌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경향은 훗날 이 지역의 문화예술운동에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65년 조동일, 김지하, 심우성, 허금목 등이 주도한 ’민속극 연구회-말뚝이‘의 창립을 민속극 부흥운동의 본격적 시작’으로 보는 주장도 가능할 수 있다, 이 땅에서 민속극부흥운동이 시작된 지가 벌써 60주년이 가까워 오는 셈이다.


3-1. 1980년대 학생운동과 한국 민주화의 전개

이 땅의 민주화 운동(Democratic movements in Korea)은 1970~1980년대에 주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시작과 마무리 시기는 확장될 수 있다. 크게 바라보면, 해방 이후 한국사회는 분단과 전쟁, 독재 등의 질곡을 거치며 국민의 물질적, 정신적 생존을 위하여 산업화와 민주화를 각각 전개해 온 셈이다. 인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 모두가 소수에 의해 독점되지 않고, 국민 다수에게 공동선이 되는 정치민주화와 경제민주화 체제가 가능함을 잘 알고 있다.

(1) 1950~60년대 민주화운동을 살펴보면, 이승만 정권의 민주주의 유린괴 반독재민주화운동이 결국 4월혁명과 대중운동, 진보적 사회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을 매개로 민족민주운동을 촉발하였고, 장기집권 획책은 오히려 그 저지투쟁을 야기한다.

(2) 1970년대 민주화운동은, ‘학원병영화 반대와 교련철폐투쟁’에 이어서, 유신체제 전반기에 ‘유신반대투쟁’과 ‘학원민주화투쟁’, 유신체제 후반기엔 비상사태 일상화에 대한 ‘반독재 구국투쟁’, ‘본격적 반유신투쟁’ 등이 있었다. 이 시기에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는 단체가 전국적으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민중운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대구·경북의 경우, 1977년에 안동가톨릭농민회(약칭 ‘안동가농’)와 대구가톨릭농민회가 설립되었고, 1979년 영양군 감자피해보상운동을 하던 오원춘이 납치테러를 당하는 오원춘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수습 과정에 ‘안동가농과 천주교 안동교구는 한국천주교와의 연대투쟁으로, 농민운동을 탄압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박정희 정권의 만행을 폭로하는 투쟁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별개로, 1970년대 노동야학이 지역에 출현하면서, 노동자인 학생을 중심에 두고 자연스럽게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에 도시산업선교회와 가톨릭노동청년회가 관련된 역할을 전개하였다.

(3) 1980년대 초 ‘민주화의 봄’ 시기에 대학 내 ‘학원민주화투쟁’이 있었고, 광주민주화항쟁을 왜곡하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이어 1987년 초 박종철 고문 사망사건으로 인한 ‘6월민주항쟁’을 만나게 되었다. 1987년 3월 3일 박종철 49재에 맞춰 전국 주요 도시에서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열렸다. 대구의 경우도, ‘2·7규탄대회 때보다 더 많은 시민이 호응하며 시위가 일어났다’고 한다. 민주화 시위에 대한 대중의 대규모 참가는 대학생들의 선도와 시민들의 자각, 민통련과 같은 전국 조직의 시민단체 역할 등의 덕택일 것이다.

이어진 노태우 정권에서도 5공 청산운동과 1차·2차 공안정국 하의 민주화운동이 있었다.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계기로 이미 이 땅의 민주화는 거역할 수 없는 역사의 큰 흐름이 되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6월민주항쟁’ 이후, 시민들은 삶 속에서 풀뿌리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시대의 새로운 조류로 무장한 민족민주운동 지향의 진보적 청년단체, 민족민주운동 비지향의 새로운 시민운동 단체, 환경·핵·여성·건강·교육 등 특정 주제 추구 전문직능단체 등이 속속 생겨났다. 대다수 국민에게 꿈이 있고, 미래에 꿈의 실현을 기대하는 긍정적 분위기가 한국사회 속으로 불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3-2. 대학문화운동과 학생운동의 향방-‘NL’과 ’PD‘?

지역이나 대학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탈춤반, 풍물패 등을 포함하는 대학문화운동단체는 1970년대 초반~1980년대 전반의 시기에 대체로 창단되었다. 초기에 대학교 본부 학생담당부서에 허락을 받고 활동할 수 있었던 단체는 198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단과대학 단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학과·학부 단위로 활동하게 되기까지 대학 캠퍼스마다 자주적 문화운동의 기류가 드세었다.

대학에서 독서클럽이나 문학서클, 탈춤패와 풍물패 등이 주도하던 대학문화운동(cultural movements on university campus)은 다양한 문화패가 결성되면서 대학문화를 점차 풍성하게 만들었다. 문화패는 단지 숫자가 많아진 것 말고도 문화 창작물의 수준도 높아졌다. 대학에서 주체성과 창의성으로 무장한 예비문화예술가들의 등장은 기성세대가 구축해 놓은 구태의 세상을 혁신적으로 바꾸거나 대체할 만하여 시민들이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대학문화운동은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필요시엔 학생운동을 선도하는 가치의 보고로서 기능하였다. 문화패 대학생들도 학생운동가처럼 자신이 선택한 이념이나 노선에 따라 충실하게 문화예술 작업을 했다. 때로 대학문화패들은 대학 밖 부문별 현장에서 요구하는 수준에 반응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대다수 대학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총학생회를 구성하게 되면서, 대학문화패의 활동은 대학 내외에서 더욱 분주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민속문화 부흥운동이 성숙되자, 대학문화패들은 풍물의 마당이 품은 개방성과 소통, 공감 정신, 탈춤이 가진 풍자와 해학을 근간으로 하는 비판정신, 마당굿이 가진 문제해결 모색과 공동체 정신 등과 같은 장점을 발견하여 점차 새로운 연행예술의 창작에 사용하였다. 전승탈춤의 정신을 바탕으로 당대의 시대적 고민을 녹여 낸 창작탈춤과 창작마당극 작품의 귀한 탄생은 훗날 ‘마당극운동’으로 진화와 확산을 예고하기에 충분하였다. 광대들이 시대적 화두를 매개로 마당에서 관객을 직접 만나는 것만큼 좋은 민주화운동은 없다고 하면 과언일까? 그렇게 활개를 펴기 시작한 문화운동은 다양한 전개 양상을 띠며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체적으로, 대학문화운동은 학생운동과 민주화투쟁운동, 교육문화운동, 노동문화운동, 농민문화운동, 도시빈민문화운동 등과 관계를 맺으며 분화하였다.

대학은 예비지식인들의 집합장소여서 전반적으로 이념·노선 논쟁이 흔한 편이다. 그러한 논쟁적 분위기는 ‘1987년 6월민주항쟁 전부터 전개됐으며, 노태우 정권 시기에는 민주화운동의 여러 부문에서 NL계열과 PD계열로 조직이 나뉘었다.’ 구체적으로, NL이 주도했던 전대협은 자주·민주·통일을 내세우며, 반미통일운동에 관심을 쏟았다. 주로 노동현장에서 노동운동을 하던 PD계열은 1987년 대통령 선거를 거치면서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표방하고, 진보정당 운동의 전개에 집중하였다.

그런 학생운동권 내부의 논쟁적 흐름에 대하여 일각에서는 ‘분열 양상’으로 이해하여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노선의 분화’로 이해하여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노선에 대하여 심화해 가는 ‘분화’를 ‘입장 변경’이나 ‘전향’과는 구별할 필요가 있다.

실제 운동 현장에서 “각 조직의 활동가들은 노선의 차이가 있다 해도, 지역운동의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갈등하기보다는 상호 존중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사회에는 NL과 PD 두 계열이 각기 추구하는 2가지 가치가 모두 필요하다. 그것은 서로 보완적 관계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지 어느 것을 더 우선시하는가의 입장은 가능하지만, 사회의 균형과 온전함을 위하여 다른 하나를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한국사회에서 ‘사회구성체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예를 들자면, 한국이 ‘식민지 반봉건 사회’ 혹은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라는 입장이다. 21세기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더 이상 합리적이지 않은데, 왜냐하면 명백히 한국은 고도 자본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을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역시 오류다. 한국은 미국의 ‘신식민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한국은 미국과 군사동맹협약을 맺은 우방으로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 한 파트너 국가일 뿐이다.

실제로 1980년대 학생운동은 미국의 한국 지배, 천민자본주의의 폐해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격렬하게 투쟁하여 권위주의 체제를 흔들어 정치적 민주화의 문을 연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의 열정과 헌신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 대하여 모두 합리적 민주주의 체제를 요구하는 새로운 역사적 흐름으로 한국사회를 이끄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결국 NL·PD와 같은 이념과 노선 논쟁은 그 사회의 사상적 공기를 다양화하고, 동시에 사회발전이라는 수목을 키워내는 토양에 대하여 서로 다른 성분으로 소중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


4. 1990년대 이후 ‘386세대’ 정치사회운동과 전문문예운동

1980년대 대학을 다녔다가 졸업한 이들은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사회 각처로 진출하였다. 그들이 대학에서 겪은 주체적 민주화의 경험은 일반사회로 옮겨져서 일상의 민주화운동으로 혹은 다양한 부문별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다. 후자는 바로 노동운동, 농민운동, 교육운동, 문화예술운동, 여성운동, 통일운동, 빈민운동 등이다.

생활 속 일상의 민주화나 부문별 민주화운동의 시작과 심화는 민주주의가 다양한 현장을 만나 확산되어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기존의 전체주의 체제처럼 국가가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요구하거나 과도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민이 합리적으로 요구하는 것을 국가가 경청하고 수용하여 실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의 정착은 그 사회의 공적 체계를 합리적으로 세우고, 개인 혹은 시민이 국가 권력의 진정한 주인이 되도록 정의로운 사회를 구축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대학 졸업자 중 일부는 시민사회운동 속으로, 또다른 일부는 정치사회운동 쪽으로도 진입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대학 전체가 학생운동의 기류가 강해서 이들은 졸업 후에도 여러 세대 중 영향력을 가진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앞서 언급한대로, 대학진학률이 5% 미만이었던 1970년대와 달리, 1980년대는 30%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른바 ‘386 세대(the 386 Generation)’이다.

정치권에서도 ‘386세대’는 그러한 세대 기류를 배경으로 도드라지게 세력을 형성하며 진입하였다. 다른 세대가 보수, 진보 정치권에 고루 포진하는 경향과 달리, ‘386세대’ 주류는 대체로 민주당이나 진보정당 쪽에 자리 잡았다. 민주당 계열을 살펴보면, 그들은 김대중 정부 당시 일부가 정치권에 진입하였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17대 총선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대거 당선되어 다양한 정치 경력을 쌓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여야를 막론하고 ‘386세대’를 넓혀서 찾아보면,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문재인 정부 출범 시, 민정수석을 맡았던 PD계열 조국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던 NL계열 임종석에 대하여 한 언론에서는 ‘NL·PD 갈등 30년’을 거론하며, “화합해 문재인 대통령을 잘 보필할지 의문이다.”는 야당 대변인 논평을 창간기획으로 실었다. 그렇지만, 기대했던 견원지간의 싸움은 전혀 없었다. 더구나 조국은 최근에 낸 저서 『가불 선진국』 머리말에서 학생운동 ‘당시 내부 노선 투쟁의 두 축이었던 NL대 PD의 대립은 이제 현실 적합성을 잃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정치의 지향은 ’민생민주‘일 것’이라고 적고 있다.

1980년대 대학과 사회에 민주화운동의 바람이 불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다양한 전문문화단체들이 생겨나면서 사회변혁적 주제를 다룬 문화예술운동(professional culture and arts movement)이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마당극패들도 때로는 우리 사회의 문제, 때로는 지역사회의 문제 등을 연행의 주제로 두루 다루었다. 영남권에서도 80년대에 무려 16개 전문연희패가 생겨났는데, 대구에서 극단시인(1983년 1월)과 놀이패탈(1983년 12월), 부산에서 극단자갈치(1986년 3월), 극단새벽(1987년 9월), 놀이패일터(1988년 5월) 등이 창단을 선도하였다. 당시 분위기는, 〈영남지역마당굿운동협의회〉가 1988년 7월에 창립되고, 「제1회 영남지역민족극한마당」을 벌였을 정도이다.

1988년 겨울 전국에서 마당극운동에 동조하는 많은 극단과 놀이패의 활동가들이 모여 〈전국민족극운동협의회〉(〈한국민족극운동협회〉의 전신, 이하 ‘민극협’으로 줄여 씀)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기류의 형성에는 각처에서 창단된 새로운 단체들이 대종을 이루었지만, 마당극운동의 흐름에 동조하는 기존의 연극단체들도 일부 합세하였다. 당시 대구지역에서는 5개 단체가 참여하였고, 구체적으로 놀이패탈, 극단시인, 극단처용, 극단떼풀이, 극단한사랑 등이다.

1988년 3월 3일 서울 미리내소극장에서 시작되었던 「전국민족극한마당」(이하 ‘한마당’으로 줄여 씀)은 1,2회 대회를 서울에서 진행하고 3회부터, 대구, 광주, 부산, 대전, 청주, 원주, 제주, 인천, 목포 등 전국을 순회하며 개최되었다. 전국을 순회하며 지역마다의 자생적 문화를 바탕으로 한마당은 차츰 성장하였다. 또한 한마당을 진행하면서 지역의 공연예술은 그 경험을 부가하여 보다 굳건해져 갔다. ‘마치 관객과 광대가 서로의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더 큰 신명을 불러내듯 지역과 한마당은 선순환구조로 잘 짜인 큰 놀이판이 되었다. 한마당은 전통과 민중이 어우러진 공연예술축제라는 정체성에 맞게 지역으로, 민중으로, 우리의 신명이 살아있는 곳으로 지속적인 도전’을 벌여 나갔다.

1970년대에는 독재정권에 우호적이지 않은 문예단체의 결성, 비판적 공연 작품 허가, 자유로운 공연장 확보 등에 제약이 많았지만, 1980년대 이후는 달랐다. 전문문예단체의 결성도 그렇고, 작품 창작과 공연은 봇물처럼 쏟아졌다. 창작마당극 분야만 해도 「땅풀이」(제주 극단수눌음), 「한라산」, 「백조일손」, 「헛묘」 등을 포함하는 4·3 사월굿 연작(제주 놀이패한라산), 「일어서는 사람들」(광주 놀이패신명), 「금희의 오월」(광주 극단토박이), 「이 땅은 니캉내캉」과 「꼬리뽑힌 호랑이」(대구 놀이패탈), 「복지에서 성지로」(부산 극단자갈치), 「노동의 새벽」(서울 극단현장), 「호미풀이」(대전 마당극패우금치), 「창작춤판 춤으로 본 세상」과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청주 열림터) 등 나열하기가 힘들 정도로 풍성한 공연작품 연보를 만들었다.

1970년대 후반 민속극 복원과 마당굿 작업 시도는 80년대가 되면서 마당굿의 시대가 되었다. ‘신명을 솟구치게 하는 놀이정신과 개방적 포용성의 마당정신이 맺어 합쳐진 바탕 위에서 창조되는 마당굿은 예술의 생활화를 기약한다.’ 한 마디로, 1980년대 민속극운동은 ‘마당극에서 마당굿으로’라는 명제로 요약되었다. 창작탈춤 연출가 최재우는 80년대 후반부를 ‘다양한 매체와 장르의 개발과 확산’이라고 적시하였다.


5-1. 민주주의 진화는 아직도 진행형

나라 단위의 민주화운동은 어떤 정권이나 정치인들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사안에 대하여 일반 시민들이 공감하여 1인 시위나 기자회견 혹은 의법청원활동 등을 통하여 잘못된 권력의 행위에 발언하고 수정을 일상적으로 요구하게 될 때 진정한 민주화가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현재도 진행형인 바, 대중의 깨우침과 연대가 강고해야만 겨우 성취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와서 이제는 해당 사례가 비일비재하여 나열하기도 힘들지만, 기독교권에 한정시켜 최근에 일어난 2가지 예만 들어보자. (1) 한 예를 들자면, 2023년 3월 28일에 서울제일교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 NCCK 정의·평화위원회 등은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제일교회 파괴공작 공식 사과하고 재발 방지책 마련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였다. 그것은 2022년 12월 1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로 줄여 씀)가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와 교인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 사건”에 대하여 채택한 결정문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만시지탄이기는 하나 이제라도 진화위가 진실을 규명하고 해당 결정문을 채택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대한민국 정부에 대하여 3가지를 요구하며 권면하였다.

(2) 다른 예를 들자면, 2023년 3월 9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는 “최악의 외교참사, 일본 강제징용 제3자 변제안 반대한다.”고 입장을 밝히며, 윤석열 정부는 굴욕적인 강제징용 해법안을 즉각 철회하지 않는다면, 역사와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은 5월 15일에는 서울시청 광장에 모여 「민생파탄, 친일매국, 한반도 평화위협 윤석열 정권 규탄한다」는 주제를 내걸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시국기도회〉를 공개적으로 열기도 하였다.

이같이, 온 국민이 이러저러한 공적 피해를 입었을 때, 그들처럼 나서서, “국가는 사과하고 과거 잘못에 책임을 다하라!”라고 적힌 손 피켓을 거침없이 들게 되면, 비로소 시민 주도적 민주주의는 정착하게 된다. 결코 도달하기 쉽지 않은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권력은 그 대상과 공유하거나 나누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5-2. 마무리: 21세기에도 민속극 부흥이 필요한가?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의 마당극운동단체들은 당대가 직면했던 문제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창작 작품들을 생산하여 대중들과 꾸준히 만나왔다. 민극협의 한마당은 2001년 14회부터 지역순회를 마무리하고 특정지역에 안착하게 되었다. 성주에서 6년간 전국·지역 축제로 치러졌고, 목포와 증평, 통영 등지로 확대되었다.

2007년 한 해만 보아도, 민극협의 광대들은 목포, 증평, 성주를 포함하는 3개 지역에서 7·8월 보름의 행사 기간 동안 크고 작은 131회의 공연 연보를 완성했다. 참여 광대는 무려 650여명이었고, 새로 만들거나 사용한 무대가 13곳이었다고 하니 그 풍성한 규모와 콘텐츠의 넉넉함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성주-한마당만 해도, 공식참가작으로 「아이고 으이구」(청주 극단놀이패열림터), 「복지에서 성지로」(부산 극단자갈치), 「허삼관 매혈기」(부산 극단새벽), 「팔칠전」(부산 노동문화예술단 일터), 「여의와 황세」(진주 큰돌문화센터), 「애비」(대전 마당극단좋다), 「팔봉이 문」(대구 극단가인), 「청실홍실」(광주 극단토박이), 「달수의 저지가능한 상승」(서울 극단아리랑), 「찔레꽃 피면」(대구 극단함께사는세상) 등 무려 10개 작품이 선보였다. 거기에, 자유참가작 2개(극단함께사는세상의 「꼬리뽑힌 호랭이」, 극단터의 「산 가장자리 마을」)와 역대 우수작품 특별초청공연 2개(놀이패한라산의 「영감놀이」, 노동문화예술단일터의 「흩어지면 죽는다」), 신작 중심의 국내 초청공연으로 「체 게바라」(나무닭움직임연구소), 「저 놀부 두 손에 떡들고」(극단연극촌사람들)를 포함하여 6개, 해외극단 초청공연 4개 등을 합하면 4일 동안 무려 24개 작품이 공연되었다. 공연 회수의 증가는 당연히 콘텐츠의 질적 비약을 담보해 주었다.

2022년 기준으로 민극협은 30개 회원단체와 10개 준회원단체를 합하여 40개 그룹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탈춤과 마당극, 마당굿을 매개로 한 규모있는 축제가 광주, 목포, 진주, 통영, 안동, 구미, 청송, 청주, 강릉, 제주 등을 포함하여 20여개가 넘는 정도이니 대중적 인기가 무척 높은 편이다.

그런 축제와 활발한 공연을 바탕으로 21세기에도 한층 진화된 레전드급 작품들의 탄생이 필요하다. 예를 들자면, 첫 박효선 연극상 수상작인 「전태일-네 이름이 무엇이냐」(나무닭움직임연구소, 장소익 연출, 2020년)와 「수주탈춤 예수전」(창작탈춤패지기금지, 2022년) 등과 같은 작품의 등장이다. 후자의 경우, ‘마당굿운동 50주년 맞이 프로젝트’로 「수주탈춤 예수전」의 3부작 중 그 1부작인 「가나안 골목과 거리예배굿」(총연출 채희완)을 부산과 서울에서 3차례 선보인 적이 있는데, 세상이 좋아져서 나머지 2부작이 반드시 완성될 날을 기대해 본다.

그러한 불편한 시대와 일상에 대하여 발언하는 공연을 통하여 제기된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는가? 그러기는 쉽지 않다. 21세기에는 또 이 시대의 문제가 계속 불거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최근 정치권에서 일본과의 외교 관련으로 돌출한 ‘일본 강제징용 제3자 변제안’이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처리 문제’ 등을 공연 소재로 다룰 수도 있겠다. 또한,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여전히 남아있는 국내외 과거사 문제해결을 위한 개별 혹은 공동 대응 방안 모색도 필요하다. 기후위기와 생태적 혼란과 같은 전지구적 문제도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국가가 외형적으로 선진국 모습을 어느 정도 갖췄지만, 그 내부의 삶의 질 수준은 매우 빈한하다. 지나친 경쟁과 과도한 노동, 양극화의 불균형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 및 산업재해사망률 1위, 합계출산율 최하위 등을 각각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 문제 해결을 위하여, 다시 창작탈춤과 창작마당극을 포함하는 민속극 부흥운동(folk drama revival movements including creative mask dancing drama & Madang theater)이 필요한 시점이다.

2023. 7.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