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계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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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

춤비평가 이만주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
다미르, 150쪽, 1만원 문의 damir06@nate.com


춤비평가와 사진작가로 활동 중인 이만주가 시집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을 출간했다. 저자는 "시는 어려서부터 썼으나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3, 4년 전 어느 날, 지하철역 안, 미끄럼문 유리창 위에 씌어 진 시들을 우연히 읽다가, 언어의 유희뿐인 시들에 의문을 가졌다. 그 후 시를 쓰기 시작해 이 시집을 내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60편의 시가 실려 있고 책 말미에 「공연과 리뷰」 편집인인 김태원이 쓴 이만주의 시 세계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 저자 이만주

 현재, 춤비평가와 사진작가로 활동 중. (한국춤비평가협회 회원, 서울문화재단 무용 전문평가위원)

  서울에서 출생. 서울대학교 지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외대 대학원 정외과에서 국제관계를 전공하며, 아랍·이스라엘 분쟁에 관심을 갖고 <중공·中共의 대중동‧對中東 정책에 관한 연구: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1985년)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국내 방방곡곡을 여행했으며, 파리를 위시한 유럽, 보스턴, 뉴욕 등지 미국에서 젊음의 한때를 보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세계 70여개국을 여행했다. 길 위에 있었던 것만도 2-3년은 되리라. 1990년대 초, 우리나라 젊은이 해외배낭여행 붐을 일게 한 여행가 중의 한 사람이며, 기행작가 대신 ‘여행작가’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해 퍼뜨렸다. 
  요르단 후세인화력발전소 건설에 한국회사의 직원으로 참여했을 때는 2년 간, 사막현장에서 근로자들과 함께 기거하며, 매주말 그리스, 로마 및 이슬람 이전의 나바티언 문명 유적지 고고학 답사를 다녔다. 그 기간, 아랍 및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벗하며 분쟁으로 인한 그들의 고통을 알게 되어, 귀국하여 ‘아랍·이스라엘 갈등(Arab-Israeli Conflict)’을 전공하게 되었다.
  무역회사, 건설회사 근무 후, ‘월간 카라이프’ 편집부장과 여행사 임원을 거쳐 터키국영항공사 한국 GSA의 CEO를 역임했다. 안양대학교 관광경영학과에서 잠시 강의를 했다. 검도 유단자로 종로구 대한검도회장을 지냈다. 
  한때 한국 국학과 민속학에 깊이 빠진 이래, 지금도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활발한 자유기고가로 여행, 민속, 공연예술, 영화에 대한 글과 사진을 여러 매체에 수백 회 게재했다. 해외에서 직접 촬영한 비디오 필름으로 TV에서 수십 회 방송하기도 했다. 1994년, 저서 ‘이만주 세계여행 에세이’로 ‘올해의 여행인상’을 수상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 이승이 저승과 다른 점은 예술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예술에 빠진 이래, 필경, 따뜻한 피가 흐르는 몸을 움직이는 춤예술에 심취하게 되어 60무렵에 춤비평을 시작했다. 이어 곧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미국춤비평가협회(DCA)의 정회원이 되었으며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조사연구위원을 지냈다.
  대학원 졸업 후, 실로 수십 년 만에 주위 지인들의 강권으로 ‘윤리경영’을 주창하는 경영학 석·박사 전문대학원인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에서 ‘한류’와 ‘동반성장’을 연구하고 있다.
  보여지는 화려한 경력과는 달리 변화무쌍하고 굴곡진 삶을 살아, 화려함이 구차함으로 바뀔 때는 일일이 밝히기 싫을 정도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기도 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따라서 생(生)의 밑바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으며, 힘들고 어렵게 사는 이들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시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3, 4년 전 어느 날, 지하철역 안, 미끄럼문 유리창 위에 씌어 진 시들을 우연히 읽다가, 언어의 유희뿐인 시들에 의문을 가졌다. 그 후, 시를 쓰기 시작해, 이 시집을 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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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주의 시 세계

동시대 삶의 균열상에 대한 시화(詩化)


김태원_문화비평·전 동아대 교수


 춤비평을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갖고 있는 이만주 씨는 예순이 훨씬 넘은 나이임에도 마치 30대 청년처럼 살고 있다. 늘 운동모자를 쓰고 자주 등산가방을 메고 있는 캐주얼한 옷차림새다. 그리고 가까운 이와 식사하거나 술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질 않는다. 금방 어디로인가를 향해 자리를 뜰 자세다. 그런 가운데 언제 구입했는지 손에는 최신 스마트폰을 들고 있으며, 그는 이 작은 기계를 통해 다소 조바심치듯 어딘가와 적극 교신(交信)하고 싶어 한다. 그가 한때 여행사, 항공사에 근무하며 여행작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그 같은 교신의 태도는 어떤 심리적 불안함보다는 적극적 삶의 한 태도로 읽혀진다.
 그 같은 이만주 씨의 교신은 그러나 그 범위가 넓다. 자신이 관심 갖고 있는 영역에 대해 스마트폰의 인터넷 기능을 능숙히 활용해 전세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외국어 능력으로 지식과 데이터의 숲을 뒤져 조사(research)를 한다. 신문에 보도되는 매일의 국내 사건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상, 뉴욕타임스나 BBC 같은 앱을 통한 기사의 검색을 통해 동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지구상의 사건을 관찰한다. 스마트폰의 기능이 요즘처럼 발달하기 이전에 그는 납작한 노트북을 갖고 그 같은 작업을 했다. 그래서 언제인가 현재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춤비평의 영역에서 월북 무용가인 최승희(崔承喜)의 해외에서의 춤 공연 활동이 이슈로 떠올랐을 때 그는 1930년대 후반, 미국에서 여러 차례 공연 활동을 한 그녀의 행적을 뉴욕타임스의 기사들을 통해 찾아내, ‘비록 일본식 이름인 사이 쇼키(Sai Shoki)를 사용하기는 했으나 엄연히 한국인 무용가(Korean dancer)로 활동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런 까닭인지 이번에 펴내는 첫 시집에는 자신의 그간의 여행 경험이 반영된 시작(詩作)을 비롯하여 여러 편들의 시가 그 같은 그의 생활경험과 또 그와 관련된 시사감각(時事感覺)을 담고 있다. 대개 그 같은 소재의 시들은 국내 시인들 다수의 경우에는 다소 순간적인 서정적 견문성(見聞性)이나 영탄조의 충동성을 띤 감성을 담고 있거나, 아니면 김수영을 비롯한 50~60년대 시인들처럼 어떤 역설적인 자폐성을 드러내는 데 비해 그의 시들은 그 속에 배인 역사와 문명의 아픈 균열상을 읽어내며, 동시대인으로서 그에 대한 연민(憐憫)의 감정을 자주 드러낸다. 그것은 최근 터키의 한 해변가에 난민 가족으로 엎드려 죽은 세 살배기 한 어린아이(아일란)의 죽음에 대한 시 「세 살배기 아일란의 주검」에서부터 중국의 문화대혁명 때의 무모한 파괴상에 대한 시 「문화대혁명 전말」, 오스만 터키에 의한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 함락으로 인한 유럽 기독교문화의 문명적 수혜와 역설적인 ‘부흥(르네상스)’을 담은 시 「비 내리는 이스탄불」, 그리고 중남미인들의 비극적 역사와 삶에 대한 시 「쿠스코 소녀의 눈망울」들이 모두 그러하다. (이들 대부분은 Ⅱ부에 실려 있다.) 마치 여행자의 카메라를 통해 이국 도시의 이모저모를 스케치하는 것과 같은 다큐적 감성에, 적절하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 거기에 가미되어 그 모두 전혀 낯선 풍경이 아닌, 우리 시대가 매일 마주하고 있는 문명상임을 이 시들은 폭넓은 시각으로 체험케 해준다.
 그런 가운데 세계사와 문명이 늘 승자(勝者)의 것이 되고, 인간 이성(理性)은 폭력이나 무력(武力) 앞에 그 모습이 소실되고야 마는 야만성과 부조리가 사실상 모두 인간의 무모한 장난질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인식이 다음과 같은 한 흥미로운 시 속에 집약되어 있다.


우리 할머니들이 빌던 기도처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지고

우리네 삼신(三神)은 삼불(三佛)로 바뀌고

서낭당 터엔 교회가 들어서고

룩소 이집트신전 위엔 교회가 얹히고

이스탄불 소피아 성당은 정복자들이 모스크로 바꾸고

코르도바 메스키타 모스크는 정복자들이 성당으로 바꾸고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대불(大佛)은
이슬람 탈레반이 우상숭배는 안 된다며
대포로 부숴버렸다

신들의 장난보다 더 무서운 인간의 짓거리

―「인간의 짓거리」(全文)



 문제는 그 같은 큰 단위의 역사와 문명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 안의 서민의 삶도 그 못지않은 야만과 위선 아래 신음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민 1인당 GNP 2~3만 불이라는 정부 발표와 관계없이 곤충처럼 반지하 쪽방이나 고시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 어두운 골목 속에 있는 무수한 수의 독거노인들, 겨우 1~2달치의 생활비만 갖고 위태롭게 살고 있는 불쌍한 가구들, 또 월급 80만 원 정도의 아르바이트생이나 근로자들, 그리고 여러 가지 형태로 버림받고 있는 이 땅의 무수한 청춘들….
 지난 1970~80년대는 이른바 정치자유화와 민주화가 사회의 지배적 관심사이고 문제였는데 비해서, 이젠 ‘경제’ 즉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와 그런 가운데 ‘인간다운 품위와 삶의 환경’을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보장제도가 시급히 필요하다는 소리 없는 외침을 그 같은 시들은 매우 사실적이면서 인상 깊게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과거 70~80년대 이른바 민중의식에 고취된 이들처럼 시를 통해 울분을 터트리며 어떤 한스러움과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또 그 스스로 그 같은 버림받고 있는 듯한 계층과 상당 부분 삶의 힘듦을 공유(共有)하며 그것의 치유를 위해서는 어떤 새로운 경제사회체제 내지 공감의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그는 시를 통해 말한다. 그의 시집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무연(無緣) 사회」에서부터 이 시집의 제목이 된 「다시 맺어야 할 사회계약」까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시들이 그러한데, 여기서 그는 그간의 정치경제적 실험이라고 믿었던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신자유주의’, ‘제3의 길’ 모두 실패하였다고 보면서 최근 주목을 끌고 있는 ‘조건 없는 기본 소득제’, 곧 재산의 다소(多少)나 노동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국민에게 1인당 월(月), 일정금액(한국도 경제력으로 볼 때 가용예산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면 월 70-100만 원 정도의 지급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도 있음)을 지급하는 제도(현재 브라질, 미국 알래스카 등에서 시행 중이며 스위스, 핀란드 등지에서도 검토 중)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중남미인들의 자연친화적 삶의 가치관을 담는 ‘부엔 비비르 운동’과 우리의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철학에 대해 주목하고, 그 같은 윤리적 가치를 부활시켜야 할 필요성을 시 「‘부엔 비비르’와 ‘고루 가난한 사회’」에 담아 말한다. 즉 착취·파괴·천민자본주의적 부익부 빈익빈의 세계가 아니라, 균형 있는 분배·절검·인간다움의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할 것이다.
 철저히 고독하고 고립된, 우리 삶의 어두운 모습과 그런 가운데 너무나 낙관적인 장수(長壽)에 대한 사회적 기대치―이것은 어느 정도 현대의학과 매스컴이 오도하고 있다―간의 역설을 그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면서도 냉정하게 묘사한다.


밤이 되자 모두, 갯벌 굴 속 게였다

온종일 리어카를 끌던 라면박스 할머니도
반지하, 개미굴 한 칸에 갇혔다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모으던 할아버지도
쪽방촌, 벌집 한 칸에 갇혔다

고시원이나 아파트도 갇힌 한 칸이기는 마찬가지

적막강산에서 모두들 서서히 죽어간다

경제 기적을 이룬 공화국에서
수명이 길어져
예전보다는 훨씬 오래 살 것이라고들 한다

―「무연(無緣) 사회」(全文)



 그 같은 시인의 세계관과 우리 삶의 심한 균열상은 어떤 측면 빅토르 위고가 18세기 중엽 『레 미제라블』에서 묘사한 프랑스혁명 전야의 모습과 흡사해 보이거나, 20세기 1~2차 세계대전 사이에서 자본주의 문명의 크나큰 모순을 고발하려 한 B. 브레히트의 시(詩) 속에 담긴 동시대적 삶의 모습과도 어느 정도 흡사해 보인다.
 그러나 시인은 과격한 사회주의자는 아니다. 그렇다고 지난 70~80년대와 같은 거친 민중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앞서 언급했듯 개인적으로 현대문명의 이기(利器)가 주는 혜택을 적절히 누리고 있으면서, 특별한 이념(이데올로기)보다는 개인적인 삶의 자유로움과 그 환경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그런 가운데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여행·사진찍기·공연 관람·글쓰기 등에 골고루 흥미를 느끼면서 참여도 하고 싶어 하는 자유문화인 내지 신(新)유목민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지성적 보헤미안에 더 가까운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이 시집에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인물시뿐만 아니라 이른바 인사동 문화 속에서 작은 신화가 된 시인 천상병과 재야 지성인 민병산에 대한 흥미로운 시들도 실려 있다. 이른바 시를 직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이 일방적으로 경외감을 갖고 있거나, 아니면 까닭 모르게 폄하하고 싶은 이들에 대해 그가 스스럼없이 인간적 친근감을 드러내며 시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이 내게 무척 놀랍다.
 끝으로 이 시집의 후반에는 자신의 일상적 삶의 주변에서 관찰되는 한두 가지 부조리한 삶의 풍경에 대한 독특한 관찰자의―혹은 ‘견자적(見者的)’―시선이 담긴 시 두 편 「상중(喪中)」과 「어떤 사연」과 우리말에 담긴 아름다운 의미를 쉽게 풀어보고 음미하고 있는 이색적인 시 「곱고 깊은 우리말」, 그리고 자신의 다소 어두운 자화상이라 할 만한 시 한 편 「밤길을 가는 개」가 실려 있다. 앞 두 편의 시는 거듭 우리 일상의 부조리한 모습을 마치 영화감독이나 사진작가와 같이 짧게 단편적으로 스케치하듯, 어느 정도 씁쓸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담아본 것이라면, 우리말에 감춰진 의미를 유사한 발음의 낱말들과 연계시켜 보려 한 중간의 시는 동양적 지혜가 경구(警句)와 같이 각 시행마다 압축되어 한자의 의미와는 다른, 흥미로운 우리말 뜻의 증폭을 가져온다. 그런 가운데 그는 밤길을 걷는, 어느 날 섬에서 뭍으로 온, 한 진돗개에게서 얼마만큼 자신의 모습을 본다.


(중략)

개 한 녀석이 밤길을 간다

전생의 공덕이 모자라 개로 태어난 한 녀석이
먼 먼 윤회의 전생의 또 전생에
못 다 갔던 길이 있었던 것처럼
밤길을 간다

나도 홀로 밤길을 간다

―「밤길을 가는 개」 중에서



 대다수의 시인들은 적어도 몇십 년간에 걸친 시작(詩作)의 노력 끝에 기억될 만한 몇 편의 시와 이름을 남긴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이육사, 이상, 윤동주처럼 그저 한 권 분량의 시집이나 몇 편의 시로써 그 이상의 시인됨을 증명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대부분 지금으로 보면 매우 젊은 나이 때 그랬다. 몇 년 전 지하철 벽면이나 안전유리판에 붙어 있는 시들을 보고―상당수가 여성적 감상성을 드러내거나 서정적이다―불현듯 그와 ‘다른 시’를 써 보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는 시인의 창작 모티브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렇듯 오늘의 한국시는 너무 여성적 감성주의의 늪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일부는 수평적인 동시대적 삶의 감각을 저버리고 극히 개인적인 자폐적 실험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뜻에서 시인이 그의 짧은 서문에서 두보(杜甫)처럼 시대와 삶의 아픔을 담는 다산(茶山)의 시론(詩論)을 얘기하고 있는 것, 또 작고한 천상병처럼 수필처럼 쉽게 와 닿는 시를 말하고 있는 것, 모두 의미롭고 또 그런 만큼 이채롭다고도 하겠다.

2016.1.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