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연구

한국춤비평가협회 선정 2023 춤비평논저상 - 최우수논문
근대 무용가 조택원의 친일 행적에 관한 역사적 성찰
조경아

초 록
연구의 목적은 조택원(趙澤元; 일본명 후쿠가와 모토 福川元, 1907-1976)의 구체적인 친일 행위를 밝히고, 역사적으로 성찰하여 근대춤역사 인식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연구방법은 문헌연구로 『친일인명사전』(2009)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2009) 등과 당대 신문·잡지를 이용하고 시각자료도 활용했다. 연구내용으로 우선, 친일의 기준과 조택원이 해당되는 영역을 알아보았다. 다음으로, 조택원의 친일 활동을 분야별로 밝혔다. 조택원은 대표적인 친일작품인 「부여회상곡」(1941.5.12.-16) 안무, 다수의 황군위문공연, 징병과 학도병을 위한 공연을 비롯해 연극계와 영화계까지 전방위로 친일 활동을 펼쳐나갔다. 해방 이후에 조택원은 친일 이력에도 불구하고 춤계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했으며, 사망 후에는 모금을 통해 춤비(碑)가 세워졌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의 춤 교육에서 조택원의 예술적 공적과 친일의 과오를 균형잡힌 시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더불어 국립극장에 세워진 조택원의 춤비 옆에 친일 이력이 명시된 안내문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Ⅰ. 머리말

과거청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회적·역사적 확인이 필요하다. 이는 진실의 사회적 회복을 위한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과거청산 문제를 조사·연구해온 프리실라 헤이너(Priscilla B. Hayner)는 ‘아는 것(Knowledge)’과 ‘인정하는 것(Acknowledgement)’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인정되지 않는 사실은 진실이면서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산작업은 가해자들이 잘못을 시인할 수 밖에 없도록 은폐된 자료를 찾아내고, 또 여론을 형성시키는 일이다(안병욱 2010, 50-51).

 위 인용문에서 말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사회적·역사적 확인이 필요”한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가 ‘친일(親日)’이다. 친일은 일본(日)과 친하다(親)는 단어적 의미를 넘어,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에 적극 협력하여 우리 민족에게 피해를 끼친 반민족행위를 지칭하는 역사적 용어이다. 이 연구의 목적은 무용가 조택원(趙澤元; 일본명 후쿠가와 모토 福川元, 1907-1976)의 구체적인 친일 행위를 밝히고, 그것을 역사적으로 성찰하여 근대춤역사 인식을 새롭게 하려는 것이다.
 시민사회에서 주도한 『친일인명사전』(2009)에 등재된 무용가는 조택원과 최승희이며, 국가에서 주도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2009)에 등재된 무용가는 조택원이다. 조택원은 무용가 중 유일하게 두 곳에서 모두 친일 행위자로 선정되었다. 이 글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무용가를 성찰하는 첫 번째 연구이며, 다음 차례로 최승희를 다룰 예정이다.
 친일 청산의 과제는 한국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다. 이준식(2010)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벗어난 나라에서 반민족행위자를 청산하고 처벌하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직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가 좌절되어 국가 차원에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했고, 친일 세력이 한국 사회의 권력을 장악하여 어떠한 형태의 친일 청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110).
 해방 직후 정치적인 친일 청산은 좌초되었지만, 학계에서는 친일청산 작업을 시작했다. 친일파에 관한 최초의 연구서는 1948년에 발간된 『친일파군상』이다. 이 책에서 인물별로 핵심적인 친일 행적을 서술했고, 최승희가 포함되었다. 친일파에 관한 본격적인 학술논의는 1966년에 임종국이 저술한 『친일문학론』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친일 연구가 확산되었다.
 친일 연구에 관한 독보적인 저작은 2009년에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이다. 이 사전은 역사 바로 세우기의 의지를 지닌 180여명의 연구자들이 10여년에 걸쳐 집필한 노작이었다. 1999년에 지식인들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 대학교수 1만인 선언’을 했고, 이에 화답하여 시민들은 성금을 모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지원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국가가 하지 않은 친일청산 작업을 지식인과 시민의 힘으로 일구어낸 연구작업이며, 친일연구가 집단화・조직화된 결과물이었다(조세열 2010, 270-272). 이 사전은 대중적 확산을 위해 모바일 어플(2012)로 출시되었다.
 국가차원의 친일 청산은 이보다 뒤늦게 이루어졌다. 노무현 정권 때인 2004년에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법률 제07361호, 약칭 반민족규명법)이 시행되고, 특별법을 기준으로 2005-2009년까지 대통령 직속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했다. 그 결과물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가 간행됐다. 학문분야에서 친일 역사의 청산은 여전히 해결할 과제이며, 무용계도 예외가 아니므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간 무용학계에서의 친일 논의는 어떠했는가. 조택원과 최승희의 친일 행적에 관한 논란이 일부 있었으나, 대표적인 근대 무용가이자 신무용의 개척자로 칭송되는 그들을 정면으로 다루기는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두 무용가의 친일 행적에 관한 학술적 논의는 매우 미진하다. 『친일인명사전』에 조택원과 최승희,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조택원이 수록된 후 14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들의 공적에 관한 논문은 많으나, 그들의 과오인 ‘친일 문제’를 학술적으로 진지하게 다룬 단독 논문이 한 편도 없다는 것은 무용학계의 편향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글의 연구대상인 조택원에 관해, 사회학자 이진아(2022)는 조택원의 친일 행적이 학술적 차원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1940년대 국민무용의 수립과 제창이라는 구조 안에서 조택원의 친일은 이루어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126-127). 무용계 안에서는 신무용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조택원의 친일 행위가 부분적으로만 언급되었다. 나치 부역자의 숙청반대 여론을 잠재우며,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1)는 “어제의 범죄를 벌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어리석은 일이다. 프랑스는 관용으로 건설되지 않는다”(김정호 2019, 92에서 재인용)라는 경구를 남겼다. 이는 친일 청산 과제를 앞둔 무용계에도 시사하는 점이 크다.
 대학에서 근대춤역사 강의를 하며 최승희와 조택원을 언급할 때마다 ‘빛나는 신무용의 업적’ 과 ‘친일’ 이력의 간극을, 어떻게 통찰력 있게 가르쳐야 할까 고민되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그들의 ‘빛나는 업적’만 알고 있을 뿐, ‘친일’ 이력은 거의 알지 못했다. 미래세대를 위해서라도 무용계에서 친일 행위에 관한 역사적 성찰이 필요하며, 무용계의 역사적 인물을 균형있게 바라보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자성에서 이 연구는 시작되었다.
 연구의 시기적 범위는 일제강점기이며, 문헌 연구방법으로 진행했다. 연구자료는 문헌과 함께 사진이나 영상 등의 시각자료도 활용했다.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인용된 조택원 친일 행적에 관한 1차 자료를 수집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기록은 국가기록원에도 요청하여 조택원의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서, 조사내용 등을 받았다(국가기록원 조택원: 관리번호 D-무용-00911). 근대 신문과 잡지는 웹으로 구축된 자료를 이용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구축된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와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구축된 한국근현대잡지자료・친일파관련문헌을 살펴보았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제공하는 근대 신문도 이용했다. 또한 타 분야에서 수행된 친일 관련 선행 연구도 참고했다.
 연구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의 ‘친일’ 등재 기준과 조택원이 해당되는 분야는 무엇인가. 둘째,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등재된 조택원 친일 행적은 어떠했는가. 셋째, 친일 무용가에 관한 균형잡힌 역사적 시각을 어떻게 가져야 하나. 이러한 연구내용을 통해 일제강점기의 무용가 조택원의 구체적인 친일 행적을 밝히고, 해방 이후 조택원의 행보와 평가를 살펴보며, 앞으로 조택원에 관한 균형있는 역사적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Ⅱ. 친일의 기준과 조택원

1. 『친일인명사전』의 친일 기준과 조택원

『친일인명사전』에는 친일 인물이 4,389명 수록되었다. 그 중 무용가로는 조택원과 최승희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었을까? 『친일인명사전』의 수록기준에 따르면(2009) 친일파는 크게 두 부류이다. 첫째는 민족반역자이고, 둘째는 부일협력자로서 역사적 책임이 무겁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친일파라 했다. ‘친일’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1905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이다(민족문제연구소 2009, 18).

 위에서 인용한 친일의 기준에 따라 『친일인명사전』(2009)에서는 여섯 항목으로 분류한 뒤에 다시 소항목으로 나누었다(21-22; 61-63). 그 내용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조택원이 해당되는 문화예술인의 경우에 『친일인명사전』 수록기준은 엄격했다. 왜냐하면 문화예술인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 크다는 관점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 ‘대동아성전’ 등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을 합리화하는 주장을 선전하여, 조선인을 전쟁으로 내몬 책임을 무겁게 판단한 것이다(조세열 2015, 282-283).
 『친일인명사전』의 분류 체계에서 조택원은 다섯째 범주인 “지식인・종교인・문화예술인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에 해당된다. 다시 세부 선정 기준에 따르면 조택원은 두 가지에 부합한다. 첫째는 ‘안무・공연·심사’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한 것이고, 둘째는 ‘대일본무용연맹 이사’를 역임한 것이다.(<표 1>)
 즉 『친일인명사전』의 ‘친일’ 기준에 따르면, 조택원은 친일 관련 공연활동과 친일 단체 임원 경력 등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였다.

 

표 1. 『친일인명사전』의 ‘친일’ 선정 기준과 조택원
(Identifying Jo Taekwon’s Activities in the Pro-Japanese Biographical Dictionary as collaborations)


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의 친일 기준과 조택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는 1,006명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고, 무용가로는 조택원이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 4,389명인 것에 비해 4분의1로 선정규모가 줄었다. 또한 ‘친일반민족행위’의 기준은 법령으로 제시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친일인명사전』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약칭: 반민족규명법, 시행 2012.10.22. 법률 제11494호)에서 규정한 ‘친일’ 혹은 ‘친일반민족행위’의 내용은 유사하다. 다만, 「반민족규명법」에서는 친일을 한 ‘인물’보다는 ‘행위’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이 달랐다. 이는 ‘친일반민족행위자’ 규정을 ‘친일반민족행위’로 대체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범주를 대폭 축소시켰다는 한계가 있다. 구체적 행적을 입증하지 못하면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 하더라도 친일반민족행위자에서 제외할 수밖에 없는 근원적 결함을 안게 되었다는 비판이다(조세열 2015, 296).
 「반민족규명법」이 정의한 친일반민족행위라 함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이 시작된 러・일전쟁 개전시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행한 다음 각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로 정의하고 20호의 친일반민족행위로 분류했다. 친일반민족행위로는 매국, 항일운동 탄압, 일제의 통치기구에 참여, 경제・문화 침탈에 적극 협력,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 등으로 구분되었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32). 20호의 친일반민족행위를 정리하면, 아래의 <표 2>와 같다.



 

표 2. 「반민족규명법」의 선정 기준과 조택원
(Identifying Jo Taekwon’s Activities in the Special Act on Identifying the Truth of Anti-National Activities as collaborations)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009)에서는 <표 2>처럼 반민족규명법에 따라, 조택원의 친일반민족행위를 두 유형으로 판단하여 결정했다. 첫째는, 반민족규명법 2조 11호에 해당하는 것으로, “학병・지원병・징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宣傳)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이다. 둘째는, 반민족규명법 2조 13호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회・문화 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이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2009, 256-257). 다음 장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에 해당되는 조택원의 활동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Ⅲ. 조택원의 친일 행위는 무엇인가

“과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넘어서서 과거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연구가 없이는 비판적 역사담론 역시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허영란 2010, 66)는 논의처럼 친일무용가에 관한 역사적 성찰을 위해서도 친일 행위에 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연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 이유에서 이 장에서는 조택원의 친일 행위를 구체적으로 밝혀보겠다.

1. 친일 춤 공연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조택원은 안무와 공연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참여했다. 조택원의 이러한 공연활동은 일본제국주의가 군국주의로 치달아가는 1940년대 전반에 집중되었다. 친일 춤 공연으로는 안무한 공연, 일본군 위문공연, 지원병과 학병을 선전하는 공연 등 세 가지로 나뉘는데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친일 안무작: 「부여회상곡(扶餘回想曲)」
(1) 「부여회상곡」을 자발적으로 만들었을까
 조택원의 친일 이력 중에 첫 번째로 손꼽히는 것이 「부여회상곡」이라는 작품을 만든 것이다. 「부여회상곡」은 조선총독부가 식민정책으로 표방하던 내선일체(內鮮一體:일본內과 조선鮮은 한 몸一體)를 담은 프로파간다(propaganda) 작품이기 때문이다.
 김현아(2023)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1938년에 조선교육령을 개정하며 통치 전 분야에서 ‘내선일체’를 표방했다. 그리고 내선일체를 시각화하여 강조할 ‘시설계획’으로 부여신궁(扶餘神宮) 건립을 추진했다(53-54). 고대에 일본은 백제와 왕래가 빈번해 정치, 경제, 문화에 상호 교섭이 있었다는 근거를 내세워 조선총독부는 내선일체의 발상지로 부여를 부각시키고, 부여에 신궁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김현아 2023, 63).
 「부여회상곡」은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총독부의 정책하에 건립되던 부여신궁과 짝을 이룬 작품이다. 즉 고대에 백제의 부여와 일본이 밀접했다는 역사를 왜곡·과장하여, 일제강점기 일본과 조선도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를 춤으로 형상화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선총독부가 부여신궁을 건립하면서까지 부여를 내선일체의 발상지로 선전하던 정치적 맥락에서 「부여회상곡」이라는 작품이 탄생했다.
 조택원은 「부여회상곡」을 어떻게 안무하게 됐을까. 조택원의 자서전인 『가사호접』(1973)에 그 정황이 자세히 보인다. 1940년에 조택원은 「학」(1940.1.11.-13)의 초연을 일본 동경에서 했다(“조택원 신작무용” 1939, 5면). 그리고 「학」의 국내 공연을 성사시키려고 시오하라(鹽原) 학무국장을 스스로 찾아갔다. 학무국은 조선총독부 총독의 직속 부서인데, 그 기관의 장을 찾아가 부탁할 정도로 조택원은 조선총독부와 친연성을 가진 듯하다. 학무국장은 「학」 공연이 성사되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공연의 좌절감을 느꼈을 조택원에게 새로운 제안을 한다.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취지에 맞는 것이 뭐 없겠습니까? 그런 거라면 어떤 큰 것이든지 성사시킬 수가 있겠읍니다마는”
“글쎄요, 별로 아는 게 없는데요.”
“삼천 궁녀(宮女)의 이야기는 무용이 되지 않겠습니까?”
“될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쇼. 삼천 궁녀의 이야기는 내선일체의 취지에도 맞을 수가 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백제(百濟)는 내선일체의 근원이 될 수 있거든요.”
그제서야 나는 그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그가 하려면 될 수 있음을 물론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취지로 내세우는 ‘내선일체’란 말의 뒷맛이 좋지 않았다. 쉽게 이야기해서 그들의 식민정책에 협력을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연구자의 강조 표시, 이하 같음)
…(중략)…따라서 시오하라(鹽原) 학무국장의 그 제의를 나는 재고의 여지도 없이 거부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대로의 어떤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주제를 가지고, 다시 말하면 삼천 궁녀의 이야기를 가지고 나는 나대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하나의 예술적인 형태로 정리할 수가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불현듯 깨달았다.-고란사의 달밤. 그 달밤에 궁녀들이 고란사로 물길러 가는 정경. 낙화암, 백마강. 여기서 꽃잎처럼 흩어져 내리는 삼천 궁녀.-이 모든 것은 우리의 뛰어난 전원시(田園詩)가 될 수 있는 소재가 아닌가! 특히 무용에 적합한 소재가 아닌가! 게다가 그 두드러진 드라머! 그렇다. 틀림없이 훌륭한 무용시(詩)가 될 수 있으리라.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내 가슴속은 벌써 큰 기쁨으로 벅차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시오하라(鹽原)의 제의를 받아들였다(조택원 1973, 181-182).

자서전의 내용은 중요한 사실을 말해준다. 우선, 「부여회상곡」의 주제와 소재를 조선총독부에서 제시했다는 점이다. 주제인 ‘내선일체’와 소재인 ‘삼천궁녀’를 모두 학무국장이 조택원에게 제시했기 때문이다.
 조택원이 친일을 하기 위해 「부여회상곡」을 만들었느냐를 판별하는데 중요한 지점은 ‘자발성’이다. 과연 일제강점기와 군국주의라는 시대상황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안무를 하게 된 것일까? 시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자발성에 기인해서 안무를 하게 된 것일까? 이는 그의 친일 이력을 판별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위에 인용한 자서전의 내용을 상세히 살펴보면, 「부여회상곡」을 선택하는 조택원의 내면에서 인식→ 부정→ 타협→ 변명(위안)이라는 네 단계의 변화가 보인다.
 첫째, ‘인식’의 단계이다. 「부여회상곡」을 제안받았을 때, 조택원은 “내선일체라는 말의 뒷말이 좋지 않았다” 했고, 식민정책에 협력하는 작품임을 알았다.
 둘째, ‘부정’의 단계이다. 내선일체 작품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는 인식했기에 조택원은 “거부했어야 할 일”이라고 제안을 부정했다.
 셋째, ‘타협’의 단계이다. 거부했어야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고 하며 현실과 타협한 모습을 보인다. 「학」 공연이 무산된 시점에, 어떤 큰 작품이라도 내선일체를 표방하면 성사시킬 수 있다는 학무국장의 말에 조택원은 타협했다.
 넷째, ‘변명(위안)’의 단계이다. 타협하는 것이 좋은 이유를 적극적으로 찾는 자기변명과 위안이 이어진다. 조택원은 이 기회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내가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하나의 예술적인 형태”로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기변명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확신으로 이어져 “내 가슴은 큰 기쁨으로 벅차”올랐다는 자기 위안을 한다.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신문 인터뷰에서 조택원은 한술 더하여 “옳다. 이 기회에 한국무용이 너희 일본무용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마” 라는 포부를 갖고 당장 「부여회상곡」 제작에 들어갔다고 회상했다(“내가 겪은” 1973, 5면). 식민정책인 내선일체를 표현하라는 대전제 아래, 자율적인 표현의 한계는 분명한 상황이었다. 영민한 조택원은 이를 인식했지만, 자신의 예술적 욕망을 위해서 눈감고 자기변명과 자기위안을 한 것이다.
 즉, 조택원이 만든 「부여회상곡」은 일본제국주의 강제로 인한 작품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만든 친일 작품이었다. 애초에 총독부 학무국장의 제안이 있었지만, 거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조택원에게 공연여부를 선택할 결정권이 달려있던 조건에서, 스스로 일본제국주의와 타협하여 「부여회상곡」을 만들었다.

(2) 「부여회상곡」에서 조택원의 역할은 무엇인가
 시오하라 학무국장이 조택원에게 제안한 주제와 소재대로 공연이 마련되어 1940년에는 “내선일체의 사실(史實)을 토대. 무용시로 될 「부여회상곡」”이라는 기사가 등장한다(“내선일체의 사실을” 1940.11.29. 6면). 1년간 준비 과정은 대략 1940년 봄에서 41년 봄까지 공연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조택원 1973, 182).
 1941년 2월 28일자 『매일신보』(도판 1)에는 “내선일체 표현의 대무용시 공연: 「부여회상곡」, 조택원 중심으로 결정”이라 했다. 「부여회상곡」은 ‘내선일체’를 표현하며, 조택원이 중심적 역할을 맡고, 형식은 ‘대무용시’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왼쪽부터) 도판 1. 「부여회상곡」(Buyeohoesanggok) 『매일신보』 1941.02.28. 4면
도판 2. 「부여회상곡」(Buyeohoesanggok). 『국민신보』, 1941. 6. 1. 9면
도판 3. 「부여회상곡」(Buyeohoesanggok).『삼천리』, 13권 제7호, 1941.7. 33면



 조택원은 주도적으로 스텝을 꾸렸고, 극본과 음악에도 관여했다. 김생려(金生麗) 지휘, 김정환 의상, 배운성 무대장치, 이서구(李瑞求) 각본, 이시이바쿠(石井漠)의 동생인 석정오랑(石井五郎)이 작곡으로 참여했다. 이시이바쿠의 딸인 이시이칸나를 비롯하여, 석정(石井)무용연구소에서 일본무용가들이 왔다. 주요 스텝들과 부여를 답사할 때는 충남도지사가 차를 제공했으며(조택원 1973, 182-183; 조택원 2015, 132), 출연진은 130인으로 합창단 40인, 관현악단 45인, 무용가 25인이다(이철 1941, 34면). 자서전에 1942년 4월 15-17일 6회 공연을 했다 하나(조택원 1973, 184), 그의 기억과 달리 「부여회상곡」은 1941년 5월 12-16일까지 5일간 경성 부민관(현 국회의사당)에서 공연했고, 2일간 대구에서도 공연했다.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았으며 주최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이었다(“부여회상곡의 감격” 1941, 3면). 이 공연을 위해 조선총독부로부터 4만원을 지원받았다(조택원 1973, 182).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일제 당시 1만원을 1억으로 추정하므로(2009년 기준) 4억을 받은 셈이다.
 「부여회상곡」의 결산 내역도 공개됐다. 『삼천리』(1941, 33면)에 수록된 결산에 따르면, 조택원은 1천원을 받았다. 하루 2회 공연으로 입장료는 지정석 3원, 보통석 2원, 학생석 0.5원이었다. 유료 관객의 공연 수입은 19,405원이고 지출은 22,800원이었다. 또한 객석 판매는 야간 지정석 309석, 야간 보통석 945석, 주간 보통석 265석, 학생석 1080석으로 총 유료관객이 2,599석에 이른다. 총 공연 수입대비 약간의 적자가 있으나, 2,599명의 유료 관객수를 고려한다면, 「부여회상곡」은 성황을 이뤘다고 할만하다.

(3) 「부여회상곡」의 구성과 친일적 요소
 「부여회상곡」은 무용시, 무대시, 무용극, 무용곡, 국민무용 등으로 불렸으나(문경연 2011, 210), 장르적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명칭은 무용극이라 생각한다. 「부여회상곡」은 12곡으로 구성되었다. ‘곡(曲)’은 악곡뿐 아니라, 무용극에서 ‘장’과 같은 단위이다. 「부여회상곡」의 구성과 내용은 『삼천리』에 “국어판특집, 내선일체의 무용시 「부여회상곡」”(1941.3. 51-54면)에 일본어로 자세히 소개되었다. 장별 제목, 내용, 출연진, 춤, 조명, 분위기, 무대, 의상, 강조점 등이 기록되었다. 그 중 곡명, 핵심 내용, 등장하는 춤을 정리하고 친일적 성격을 판단하여 정리한 것이 <표 3>이다.



표 3. 「부여회상곡」의 구성과 친일적 성격
(Composition and Pro-Japanese Character of Buyeohoesanggok)



도판 4. 조택원. 「부여회상곡」(Buyeohoisanggok). 1941. 『춤의 선구자 조택원』. 서울:댄스포럼, 2006, 85.



 무용극의 형식이며 12곡으로 구성된 「부여회상곡」을 기-승-전-결의 구조로 나누고 친일적 요소를 살펴보겠다. 서곡에서는 일본풍-조선풍-내선음악으로 이어져 음악으로 조선과 일본이 화합한다는 내선일체를 강조했다.
 첫째, ‘기’에 해당하는 부분은 2-4곡으로, 백제 성(명)왕 때, 일본천황에게 불상을 바쳤다는 설정이다. 부여를 회상하는 작품에 백제 성왕이 등장한 이유는 538년(성왕 16)에 백제의 수도를 부여(사비)로 옮겼으며, 552년(성왕 30)에 일본에 불상과 불경을 전해준 인물이기 때문이다. 「부여회상곡」에서는 백제가 불상을 전해주며 불교를 전파한(『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기(欽明紀) 13년(552) 10월)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백제가 일본천황의 만수무강을 위해 불상을 바쳤다는 날조된 설정이 등장한다. 또한 백제의 중흥을 위해 일본 흠명천황이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는 것도 역사적 왜곡이다.
 둘째, ‘승’에 해당하는 부분은 5-6곡으로, 일본의 처녀 세 명이 백제에 불교 유학을 온 내용이다. 백제와 일본 여성들이 화합하여 춤추는 장면을 강조하여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형상화했다. 일본의 원조로 인해 백제가 태평하다는 왜곡된 설정도 등장했다.
 셋째, ‘전’에 해당하는 부분은 7-10곡으로, 의자왕 때 백제가 멸망하는 과정을 담았다. 백제의 패망과 삼천궁녀의 투신은 멸망한 조선 백성들의 처지를 떠올리게 한다. 역사의 패배를 심어주는 장치로 삼천 궁녀 이야기를 활용했다.
 넷째, ‘결’에 해당하는 부분은 11-12곡으로, 고대와 근대 모두 일본과 조선이 하나였다는 내선일체의 내용을 강조하면서 마무리했다. 고대의 한일부부와 근대의 한일부부의 춤을 무대에 동시에 내세워, 내선일체의 역사적 뿌리가 깊었다는 왜곡을 장조한 설정이었다.

(4) 「부여회상곡」의 반응과 평가
 「부여회상곡」 공연은 일본제국주의의 호평을 받았다. 조선총독부 총독은 이렇게 위대한 예술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사람에게는 국가와 사회가 우러러 받들고 아낌없는 원조를 해야한다는 담화를 발표할 정도로 극찬을 했다(조택원 2015, 131-132). 중추원 참의가 찾아오고 평소에 광대짓이나 하고 있다고 폄하하던 지인들도 「부여회상곡」을 통해 자신을 알아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조택원 1973, 184-185). 아마미 요시쿠니 방송협회장도 “「부여회상곡」 같은 건 좋았군요, 정말 멋진 거였어요…(중략)…내지와 조선과의 절충이네요”라며 이런 작품을 많이 해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전쟁이 끝나면 크게 격려하고 싶다고(“문화영역의 명사를” 1941, 25면) 할 정도로 「부여회상곡」은 일제의 의도와 부합했다.
 조택원도 「부여회상곡」에 만족했다. 공연 후 인터뷰(“상해・경성양지” 1941, 166면)에서 자신의 「부여회상곡」은 ‘국민무용’의 효시라는 자긍심을 보였다. 또한 내선일체의 역사적 실제(史實)를 주제로 했고 경성과 대구 공연에서 많은 성과를 얻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역사적 왜곡에 관해 조택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조택원이 자서전에서 자랑스러운 논조로 밝힌 조선총독부 총독의 극찬은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인 ‘내선일체’가 「부여회상곡」에 잘 형상화되었고, 그만큼 친일반민족적인 작품이라는 반증이다. 이후 1987년에 박용구는 「부여회상곡」이 친일작품 제1호이며, 여기서 선보인 나비걸음은 국적불명의 춤동작인데 여전히 답습하고 있는 대표적인 식민문화의 잔존현상이라고 지적했다(“광복42년…일제잔재” 1987, 9면).

2) 황군(皇軍) 위문공연
 조택원은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황군(일본군) 위문공연의 주역이었다. 일본군을 위한 위문공연의 시작은 경방단과 감시대 주최로 공연요청이 들어온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총동원법’에 따른 전국 순회공연의 성격이었다(조택원 1973, 189-190). 그의 자서전에 기술된 내용을 보면, 「부여회상곡」을 조선총독부에서 학무국장에게 제안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제안받고 실행하는 과정에서도 인식→ 부정→ 타협→ 변명(위안)의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조택원이 위문공연의 제안을 받았을 때,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부여회상곡」의 취지보다도 오히려 더 뒷맛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며칠을 두고 생각한 끝에 결국 수락하기로 결심했다”(조택원 1973, 190)는 내용처럼, 조택원 스스로 「부여회상곡」보다도 황군 위문공연이 더 좋지 않은 것임을 인식했고, 며칠을 두고 고민할 만큼 스스로 부정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조택원은 타협의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자기변명과 위안을 한다.
 위문공연에 대한 조택원의 자기변명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자신의 몸을 보호하고, 둘째는 회당 3백원(현재 약 3백 만원)이라는 만족할만한 공연 개런티를 지급받으며, 셋째는 어떤 현실이라도 예술의 창조와 제작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라 했다(조택원 1973, 190-191). 조택원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세 가지 정당성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에서 개인적 안위와 이익에 우선한 자발적 선택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았던 1945년에 조택원은 스스로 황군위문단 단장이 되기까지 했다. 가까운 예술인 친구들에게 징용 영장이 나왔고, 그들을 징용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조택원이 착상한 것이 황군위문단이라 했다(조택원 1973, 192). 실제 그는 위문공연을 하며 친구들과 자신의 신변을 안전하게 지켰다고 했으며,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7월에 2만원(현재 약2억)의 거액을 얻었다고 했다(조택원 1973, 209). 북지 황군 위문공연에서 얻은 2만원은 북지 은행권이라 조선이나 일본에서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군 사령관의 지시로 총독부 이재국에서 조선은행권으로 바꿔주었다. 조택원(1973)에 따르면, 2만원은 1973년의 시세로 1천만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그는 황군위문 공연의 수익금을 자신이 1942년에 사둔 돈암동 연구소를 수리하는 비용으로 썼다(조택원 1973, 225).
 즉, 조택원의 황군 위문공연은 사적인 안위와 이익을 가질 수 있다는 자발적 판단으로 실행되었다. 따라서 그의 황군 위문공연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아픔처럼 논의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애초에 그가 위문공연의 제안을 받았을 때, 자신의 안위와 이익과 예술적 욕망을 위해 위문공연을 했고,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황군 위문공연단을 조직하여 스스로 단장이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큰 수익금을 얻어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 그는 식민지하 일본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자발적으로 활용했던 것이다.
 조택원은 황군위문공연 단장의 자격으로 해방이 되기 전 3년 동안 국내는 물론 만주, 북지(北支, 북중국), 중지(中支), 몽고의 수백 개 도시를 돌면서 1000회가 넘는 황군 위문공연을 했다. 그러나 자신이 황군 위문공연을 한 것은 일종의 ‘징용’이었다고 피력했다(조택원 2015, 133). 당시 목숨을 내건 진짜 징용과는 걸맞지 않는 자기변명이었다. 조택원은 황군 위문공연이 징용이라고 말하면서도, 황군 위문공연 이후 ‘끗발’이 높아져 평북지사에게 자신이 추천한 지인(동기동창 이하영, 이익흥)이 고위직으로 승진을 했다고 자랑스레 밝힌다(조택원 2015, 134). 이는 매우 ‘모순’이다. 징용을 다녀온 후에 끗발이 높아지는 식민지 백성이 어디에 있을까.
 지금까지 조택원의 친일 공연 중에 친일 안무작인 「부여회상곡」과 황군 위문공연을 논의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Ⅱ』(2009)에 따르면, 조택원이 무용시 「부여회상곡」을 연출 및 안무하고, 황군 위문공연에 참여한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3호에 해당된다(220).

3) 지원병과 학병을 선전, 선동한 공연
 조택원은 무용 공연으로 지원병과 학병을 선전, 선동했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 조택원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에 용병으로 쓰일 조선인 지원병을 위한 공연에 참여했다. 1942년 5월 18일 오전 9시부터 경성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리고, 육군지원자후원회에서 주최한 ‘지원병 장행회’에서 조택원은 “춤으로 일동을 위안”하는 공연을 했다. 육군병지원자훈련소 수료생 1,800명을 보내는 장행회(壯行會) 때였다(“명일의 승리를” 1942, 2면).
 또한 조택원은 청년 학도병을 위한 자리에도 춤으로 참여했다. 1943년 11월 8일 오후6시 반부터 경성 부민관 대강당에서 ‘학도 출진을 배웅하는 밤’이 열렸다. 조선 청년은 학도병이 되어 ‘황국을 위해 궐기하자’는 내용이었다. 2부에 조택원이 출연하여 “1. 힘을 모아 2. 자매 3. 학무 4. 아버지 자장가의 무용” 등을 공연했다(“그 진충(盡忠)에” 1943, 2면).
 조택원이 지원병과 학병을 위해 춤 공연을 한 것은 일제강점기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2조 제11호에 해당된다. 이 법률의 내용은 “학병・지원병 또는 징용을 전국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선전 또는 선동하거나 강요한 행위”와 관련된 것이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7, 233).

2. 연극계와 영화계에서 친일 활동

1) 연극계에서 친일 활동
 조택원은 연극계에서 친일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1년에 조선연극협회에서는 이동극단(移動劇團)을 조직했다. 이동극단을 통해 도시가 아닌 농촌, 산촌, 어촌에 다니며 일본제국주의에 적합한 시국인식을 철저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마련되었다. 이동극단 강습회에서 조택원은 무용을 가르쳤다(“조선연극협회 이동극단” 2009, 3면).
 또한 조택원은 친일 단체인 연극문화협회에서 회원자격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220). 총독부 학무국의 어용단체였던 조선연극문화협회는 ‘기예증(技藝證)’을 가진 자에 한해서 무대예술을 할 수 있게 했다. 기예증은 일종의 공연예술인 허가증명서로,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공연예술활동이 가능하다는 자격증이었다. 이는 1944년에 공포한 「조선흥행등취체규칙(朝鮮興行等取締規則)」에 따른 것이다(문옥배 2006, 339). 기예증을 받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일종의 사상 검증을 실시했다. 연극은 민중을 계몽하는 문화적인 무기(“심사원 결정” 1944, 2면)라는 일제의 정책하에, 황민상식 등을 심사했다. 심사위원으로는 연극 관련 군, 관민 대표 19명이 참여했는데, 조택원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조택원은 예술가가 황국신민으로서 자격을 가졌는냐를 판별하는 심사위원으로 연극계에서 활약할 정도로, 스스로 황국신민의 정체성을 지녔다고 하겠다.
 1944년에 조택원은 ‘연극인 총궐기예능제’인 「성난 아시아」에 출연했다. 1944년 10월 12-13일 이틀 간 부민관에서 개최된 이 행사는 연극에 150인이 출현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이 행사는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주최자인 조선연극문화협회회장 아베 타츠이치가 진두 지휘했다. 내용은 적대국인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조선반도에 징병제가 공포되어 학도들이 전쟁에 출전하는 것이었다. 징병제를 선전하는 이 행사에서 조택원은 조용자와 함께 2부에 출연했다(“성난 아시아” 1944, 60-64면).

2) 영화계에서 친일 활동
 조택원은 친일 영화인으로도 활동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에 ‘조선영화령(朝鮮映畵令)’을 발표하여 등록한 자만 영화계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통제했다. 1941년에 제1기로 등록된 영화인은 58명이었다. 이들은 관민 12명으로 조직된 기능심사위원회(技能審査委員會)에서 기능 심사를 받고, 소관 경찰서에서 신원조사까지 통과된 이들이었다. 제1기 영화인으로 등록된 자 중에 연기자는 44명이었는데, 35세의 조택원도 여기에 포함되었다(“제1기 영화인” 1941, 236-238). 조택원은 1936년에 제작된 영화인 「미몽(迷夢)」에 무용가 역으로 출연한 영화인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친일적 색채가 드러나지 않았다.
 조택원이 노골적으로 친일적 색채를 띤 영화에 출연한 것은 1944에 제작된 영화 「헤이따이상(兵隊さん: 병정님)」이었다. 일제는 “전시하에 있어서 영화는 병기(兵器)이다”(“군과 영화” 1944, 4면)라는 프로파간다 영화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배경에서 「헤이따이상」이 탄생했다. 이 영화는 지원병을 보내며 군대는 어떠한 곳인가 궁금해하는 조선의 가정에 군대 지식을 보급하려는 목적으로 조선군보도부에서 제작했다(“군보도부 제작영상” 1944, 2면). 「헤이따이상」은 조선인이 지원병이 되어 일본 천황을 위해 싸우는 것을 선전하는 국책영화였다. 조택원이 맡은 배역은 지원병을 위문하는 예능위문회에서 춤추는 무용수였다(강성률 2007).



도판 5. 방한준 감독 「병정님」(兵隊さん; Byeongjeongnim) 1944, 조택원 소고춤 영상캡쳐, 한국영상자료원, 서울 https://www.youtube.com/watch?v=VBQjIzowU-E



 석지훈(2020)은 조택원이 출연하는 부분을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손꼽았다. 지원병 위문공연에서 조택원은 농악을 무대화한 소고춤을 1분 정도 춤추었다.(<도판 5>) 제국주의 선전영화임에도 민족적 색채를 띤 소고춤이 등장한 것에 관해 “소고춤은 일본제국의 하위 지방색(Locality)인 ‘조선문화’로 변질되어 수용, 대중화된 것”(157-158)이라는 석지훈의 해석은 명쾌하다. 조택원의 소고춤은 조선의 지원병에게 조선의 향수를 불러일으켰겠지만, 독립적인 조선의 민족문화가 아니라 일본에 종속된 하위 지방문화로서 존재한 것이다. 즉, 그의 춤에 조선적인 특색이 강하다고 해서 친일이 아닌 것은 아니다. 조택원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적인 색채의 춤으로서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반민족적인 행위를 한 것이다.

3. 친일 글

조택원은 공연뿐만 아니라, 글을 통해서도 내선일체를 주창하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다. 조택원이 쓴 글에서는 스스로 일본인이라는 자의식이 보인다. 조택원은 1938년 12월 20일에 글을 기고했다. 『재만조선인통신』(1939.1. 113-114면)에 수록된 “동방문화의 재건기:신춘기고”인데, 프랑스에서 1년 간 머문 이야기가 담겼다. 조택원은 자신을 ‘일본인’이라 프랑스인에게 소개했으며, 새로운 세계는 일본으로부터 나올 것이고, 서양인들에게 일본의 문화는 참으로 경이롭다고 평했다. 조택원은 글의 마지막에서 “동양의 전통에서 새로운 힘을 찾자”라고 결론지으며 그 해법으로 “동양의 자랑은 창작적인 일본에 반드시 있을 것을 확신”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 자신은 일본인이며, 그가 찾고 싶은 동양의 전통과 자랑은 일본적인 것이었다.
 그는 『매일신보』(1942, 2면)에 “석정막(石井漠) 선생의 예술 30주년 공연에 제(際)하여”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조택원은 반도 출신의 문하생을 특별히 애호해 준 석정막 선생이야말로 무용예술을 통하여 내선일체를 벌써부터 실행해 온 분이라고 치켜세우면서 “지금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에 있어 순(純) 일본적인 신문화의 수립이 급무가 되어 있는 이때에 석정 선생은 실로 국보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그는 대동아 공영권 건설이 중요하다고 보았고, 순 일본적인 신문화의 수립이 당시의 급한 임무, 즉 시대적 과제라고 판단한 것이다.
 조택원은 “반성과 신(新)출발: 무용협회 결성의 제창”(1943, 2면)이라는 논설에서 국민총력전에 참가할 조선무용협회 결성을 촉구하였다. “조선무용도 지방색인 특색을 가진 일본 무용계에 한자리를 차지하자는 것이다. 그래야 생명이 있을 것”이라 주장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논설로서 내선일체를 주창하고, 조선무용을 일본의 한 지방춤으로 인식하여 국민총력전에 참여해야한다고 역설할 정도로 친일적 세계관을 내면화했던 무용가가 조택원이었다. 조택원의 글을 통해 그가 스스로 일본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졌으며, 내선일체를 적극 지지했고, 국민총력전에 참가해야한다는 적극성을 띠며 친일반민족행위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4. 친일 단체 임원활동

조택원은 친일 단체의 임원 활동으로 협력행위를 했다. 『친일인명사전』(2009)에 따르면, 조택원은 조선의 무용가로서 유일하게 일본 무용단체의 임원이 되는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조택원은 대일본무용연맹 이사를 역임했다. 1941년에 조택원은 대일본무용연맹이사로서 『녹기』에 실린 “반도 예술을 말한다”(1941, 62-71)라는 좌담회에서 「부여회상곡」을 평가했다. 또한 1943년에 조택원은 ‘대일본무용협회 현대무용부 이사’라는 명함과 ‘총독부 경무국 촉탁’ 위임장을 갖고 있었다. 특히 총독부 경무국 촉탁이라는 신분은 머리가 길었던 조택원을 바라보던 형사의 의심어린 눈길에서 그를 구원해주었다(조택원 1973, 193-196). 1945년 8.15 직전에 조택원은 조선군사령부의 촉탁의 지위로 북지 일대를 순회 공연했다(조택원 1973, 208). 이처럼 1940년대에 조택원의 직위는 대일본무용연맹이사(1941), 대일본무용협회 현대무용부 이사(1943), 총독부 경무국 촉탁(1943), 조선군사령부 촉탁(1945) 등으로 맹위를 떨쳤다.

5. 창씨개명: 후쿠가와 모토(福川元; 조택원)

조택원은 창씨개명을 했을까. 1940년부터 시작된 창씨개명은 조선인에게 일본 성씨를 쓰도록 강요한 것으로, 민족성을 말살하려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최재성 2010, 389). 조택원의 자서전 『가사호접』(1973)에서는 「부여회상곡」 공연을 마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창씨개명을 권유했지만 조택원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상표라 강변했고, “나는 일본이 항복하는 순간까지 끝내 창씨는 안하고 견디었다”라고 했다(189).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조택원이 창씨개명을 안했다는 자서전의 내용을 전적으로 신뢰한 성기숙(2007)은 창씨개명은 친일을 판단하는 근거인데, “조택원은 결정적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기에” 그는 친일파가 아니라 지일파(知日波)라고 했다. 조택원 장례식에서 백두진이 읽은 조문이 『춤의 선구자 조택원』(2006) 화보집에 수록되었는데 제목이 “조택원은 이름 아닌 상표라고 창씨개명을 거절”(336)이었다. 1991년 11월 19일의 연합뉴스 웹사이트에 의하면, 조택원의 사망 이후 춤비 건립을 주도했던 춤지 발행인 조동화는 조택원이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 예술활동을 했다며 두둔했다. 이처럼 본인, 지인, 연구자, 원로 무용인이 조택원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하자, 조택원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론처럼 퍼지기도 했다. 더 나아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잘못된 근거를 토대로 조택원의 친일 행적을 감싸주기도 했다.
 조택원이 창씨개명을 했던 증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1941년에 “반도 예술을 말한다”(1941, 62-71)라는 좌담회에 참석했는데, 참석자 명단에 후쿠가와 모토(복천원 福川元)라는 창씨개명한 이름과 조택원이 함께 기록되었다. 그의 직함은 대일본무용연맹이사였다. 이 내용은 『친일인명사전』 이미 소개되어,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웹버전에서도 조택원의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타난다.
 둘째, 조택원의 창씨개명은 잡지에도 등장한다. 1942년 7월호 『대동아』(69) 잡지에는 ‘영화’라는 제목으로 창씨개명한 영화인의 이름이 소개되었다. 원래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을 분명히 알게 하려는 정보였다. 두 이름이 나열된 영화인으로 여배우 13명, 남배우 20명, 감독 10명, 촬영기사 6명이 등장한다. 남배우 항목 중 ‘복천원(福川元)’은 ‘조택원’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조택원이 창씨개명한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는 기사이며, 남배우에 이름을 올린 정도로 조택원이 영화인으로도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두 기록을 보면, 조택원이 창씨개명한 사실은 분명하다. 늦어도 1941년 7월에는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 당시 두 잡지에 창씨개명한 이름이 실렸음에도 불구하고 조택원은 말년의 자서전까지 창씨개명한 사실을 부정했다. 창씨개명만은 들키고 싶지 않아 기억을 왜곡한 것일까. 진실이 드러나지 않길 바랐던 것일까.


Ⅳ. 친일 무용가 조택원에 관한 역사적 성찰

“과거 사실에 대한 성찰은 그 자체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오늘의 현실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를 캐묻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송기호 1988, 164-165). 그런 의미에서 이 장에서는 해방 이후, 조택원의 친일에 관한 논의와 행적을 성찰하려고 한다.

1. 해외의 반민족행위자 처리와 무용계

우리를 성찰하는데, 다른 나라의 반민족행위자 처리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조형근(2022)에 따르면, 독일은 나치 잔당을 엄벌하고 끊임없이 사죄하며 배상해 왔다. 그러한 태도는 일본이 전쟁범죄를 전혀 반성하지 않는 태도와 비교된다. 과거사 청산의 시각에서, 4년간 점령당했던 프랑스의 나치 잔재 청산은 철저했다. 프랑스 임시정부 수립 전에 재판 없이 약식 처형된 대독 협력자의 숫자만 1만여 명에 달한다. 1944년 8월 15일부터 1945년 4월까지 프랑스에서 12만 6,020명이 대독 협력 혐의로 체포됐다. 징역형이 9만 8,000여 명이고, 511명의 정치인이 피선거권을 박탈당했고, 7만여 명이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12만여 명의 공무원이 파면됐다. 대독협력 행위를 한 문인은 작품 발표가 금지됐다(조형근 2022, 40; 135). 해방이후 친일 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하려는 반민특위가 좌절되었던 것과 달리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반민족행위에 관한 엄격한 국가적 청산과정이 있었다.
 독일의 무용계는 어떠했나. 권혜인(2018)에 따르면, 표현주의 무용가 루돌프 폰 라반(Rudolf von Laban, 1879-1958)은 나치에 협력한 대가로 1933-1937년까지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보상을 제공받았고, 그 결과 나치 치하에서도 라반은 활발하게 자신의 예술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박성혜는(2019) 독일 표현주의 무용가를 대표하는 라반과 마리 뷔그만(Mary Wigman, 1886-1973)이 초기에 나치에 경계심 없이 협력했으나, 이후 나치가 표현주의의 춤을 배격하자 이들에게 주었던 지원금이 끊기면서 무용활동이 어려워졌다고 지적했다. 나치와 관련된 독일 무용가에 관해 두 연구자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며 평가를 삼가고 있다. 두 무용가가 지닌 무용사적 업적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치에 협력한 무용가들에 관한 해외 학계의 논의도 진행 중이다. 릴리안 카리나, 매리언 칸트(Lilian Karina, Marion Kant)의 저서 『히틀러의 무용가들』(Hitler's Dancers, 2003)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서는 라반이 나치와 유사한 인종차별적인 시각에서 “완전히 인종에 기초한 새로운 댄스 컬트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2003, 35). 유대인을 대상으로 첫 번째 나치 학살이 일어난 1933년부터 이후 1937년까지 라반, 뷔그만, 팔루카(Paucca) 등은 “피(blood)”와 “토양(soil)” 등의 인종주의적인 주제로 글을 썼다. 특히 라반은 나치의 이데올로기를 옹호했고, 나치 치하에서 1937년까지 공무원 지위를 보장받았다(22; 37)는 점을 밝혔다.
 최근의 연구(Wesley Lim 2022)에서도 독일의 신무용을 개척한 라반과 뷔그만이 나치 정권과 결탁했다고 평가한다. 1934년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 1897-1945)의 선전부에 제안에 따라, 라반은 국가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목적의 페스티벌인 도이치 탄츠페스트슈필레 (Deutsche Tanzfestspiele)를 조직했고, 뷔그만도 여기서 춤을 추는 등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178-179).
 독일무용과 국가 사회주의의 상호작용과 복잡성을 탁월하게 제시한 연구자는 수잔 매닝(Susan Manning)이다. 뷔그만의 춤과 나치협력을 『황홀과 악마』(Ecstasy and the Demon, 2006)라는 상징으로 논의한 수잔 매닝은 뷔그만의 안무가 파시즘으로 전환을 결정한 것은 괴벨스 문화부에게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 했다. 뷔그만은 1934년과 1935년에 국가 사회주의 댄스페스티벌의 안무를 의뢰받았으며, 뷔그만이 파시스트 미학에 최고로 기여한 것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막식 공연이라 했다(2006, 3). 그러나 당사자인 뷔그만은 나치의 국가 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와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Manning 2006, 353). 이는 친일 무용가들이 자신의 친일 이력을 은폐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미화시키려는 태도와 같은 맥락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해외 학계에서도 나치 협력 무용가에 관한 연구는 오래되지 않았다. 독일의 표현주의 무용과 나치가 어떻게 결탁했는가의 문제는 다양한 질문을 던지며 논의되는 추세이다. 특히, 루돌프 폰 라반과 마리 뷔그만은 현대 무용계에 끼친 업적으로 인해 나치 협력이 가려진 측면이 있었으나, 비교적 최근에 와서 나치 협력 무용에 관한 해석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역사적 재평가도 시도되고 있다.

2. 해방 이후 무용계에서 조택원의 입지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에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조택원에게 무대예술 분야를 맡아 달라고 한다. 그러나 젊은 소장파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내선일체를 위해 「부여회상곡」을 만든 이력 때문에 조택원을 반대했다. 조택원은 직위를 사양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그 젊은이들의 생각이 옳은지도 모릅니다. 전혀 새 사람들로써 새 출범을 하는 게 옳을 겁니다. 난 확실히 ‘친일’을 한 사람이니까요. 때가 묻은 사람이니까요. 새 집을 짓는데 이런 헌 재목을 써서야 되겠습니까?(조택원 1973, 237)

 조택원은 위의 인용문처럼 자서전에서 스스로 친일 행적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해방 이후 신문 기고문에서 자신은 친일파의 누명을 썼다며 억울한 논조로 말했다. “해방 후 친일파의 누명을 쓴 나는 자기비판으로 거진 1년간 무위도식”(조택원 1946, 4면)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생활고에 분노를 표했으며, 친일에 관한 반성이나 성찰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택원 자신의 기록임에도 “친일파의 누명”(1946)을 썼다는 것과 “난 확실히 친일을 한 사람”(1973)이라는 자백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머리말에서 말했듯이 “가해자들이 잘못을 시인할 수 밖에 없도록 은폐된 자료를 찾아내는”(안병욱 2010, 51) 작업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중요하다.
 친일 이력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에 조택원은 무용계에서 온갖 요직을 거쳤다. 조택원은 1946년 6월 8일에 창립된 조선무용예술협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인사” 1946, 1면). 그 외에 무용협회 상임고문, 국립극장 무용관계운영위원,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무용개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즉, 조택원의 친일반민족행위는 해방 이후 춤 이력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의 수상 경력 또한 화려하다. 1964년에 한국무용협회가 제정한 제1회 무용상에서 공로상을 받았고(“첫 공로상에” 1964, 5면), 1966년에 서울시 문화상을, 1973년에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고, 다음 해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4년에는 문화예술인에게 주는 첫 문화훈장인 제1회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당시 68세였던 조택원은 “두 번째 사는 삶을 더욱 충실히 살라고 훈장이 주어진 것 같다”라고 말했다(“첫 문화훈장” 1974, 5면). 이종숙(2018)은 “조택원은 친일의 대가를 일제 치하에서는 후하게 받았고 해방 후에는 톡톡히 치렀다”고 했으나(214) 조택원은 생전과 사후까지 명예로운 자리에 있었다.



도판 6. 조택원춤비(Jo Taekwon Dance Memorial Stone). 『춤의 선구자 조택원』. 서울: 댄스포럼, 2006, 6.



 1976년 6월 8일 대장암으로 조택원이 사망한 이후에도 조택원을 향한 찬사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1991년 11월 19일 연합뉴스 사이트에 따르면, 무용계는 92년 춤의 해 기념사업으로 조택원의 춤비(碑)를 추진했다. 조택원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춤의 해 사업으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있었음에도 조동화를 중심으로 하는 『춤』지의 주도로 무용가 최초로 춤비(<도판 6>)가 제작되었다. 4년 7개월 간 모금했으며, 모금한 사람은 총 1330명, 모금 합계는 5199만 1400원이다. 춤비 건립위원장은 강선영이 맡았다(조택원 2015, 260).
 「만종」을 춤추는 형상의 조택원 춤비는 국가의 대표적인 극장인 국립극장 앞마당에 놓여졌다. 춤비 하단에는 “우리 근대무용의 선각자이며 불멸의 춤 작품을 남기신 무용가”라는 내용만 새겨졌을 뿐, 그 어디에도 조택원의 친일 행적은 쓰여지지 않았다.
 2020년 8월 14일의 오마이뉴스 기사(김종훈 2020)에 의하면 조택원과 달리 서울시에 존재하는 친일파 기념물 중에는 친일 행적을 함께 표기한 사례도 있다. 국립국악원에 설치된 김기수, 함화진 동상이 그것이다. 또한 2023년 7월 5일 민족문제연구소 사이트의 “근대음악전시관의 가면을 쓴 홍난파 기념사업 추진을 반대한다”라는 성명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앞에 설치되었던 현재명 흉상은 2020년 국정감사에서 지적을 받은 후 철거되었다. 공적 공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기념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사회적 합의였기 때문이다.
 무용계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를 했던 조택원의 춤비를, 모금을 통해 공적 공간에 건립할만 했는가에 관해 진지한 물음과 성찰이 필요하다. 친일 경력은 그의 성취로 인해 미화될 수 있는 것인가.


Ⅴ. 맺음말: 친일반민족행위 무용가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나중에 태어난 자의 특권으로 앞선 세대를 비판하지 말라”라는 경구를 남겼다(조세열 2010, 275에서 재인용). 앞선 예술가의 행적을 논할 때 유의미한 시사점을 주는 발언이다. 근대 춤역사의 주요 인물인 조택원의 예술적 성취와 반민족적인 친일을 어떻게 균형있게 교육할 것인가를 새롭게 고민할 시점이다. 친일 무용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은 그간의 춤 역사교육에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택원이 이룬 신무용의 성취와 더불어 과오인 친일행적도 함께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역사의 진실을 가르치는 것이며, 다음 세대가 ‘예술과 윤리’라는 중요한 문제를 성찰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 살펴본 결과, 조택원의 친일 행위는 일본 군국주의가 극도로 치닫는 1940년대 전반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의 친일반민족행위의 종류는 안무, 공연, 논설, 심사, 창씨개명, 친일단체 임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활동 분야도 무용, 연극, 영화까지 광범위했다. 특히 조택원의 친일이 자발적이었는가를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내선일체를 표현한 「부여회상곡」 안무와 황군위문공연을 조선총독부에게 제안받았을 때, 인식-부정-타협-변명(위안)이라는 심경의 변화를 거쳐 일본제국주의가 원하는 반민족행위에 협력했다. 그 결과 그는 개인적 안위와 예술적 욕망과 사적 이익을 취했다. 민족적인 색채의 춤을 추었던 조택원은 결국 자발적으로 반민족적인 친일 행위를 했던 것이다. 자서전(2015)에서 보이는 조택원의 생애 또한 일본과 밀접했다. 이시이바쿠가 스승이었으며, 일본 무용수들과 활동을 했고, 첫 번째 결혼에서 장모가 일본인이었으며, 그를 늘 지원해주는 일본 권력층이 다수였다. 해외공연 때는 일본대사관에 늘 초청장을 보냈으며, 1960년대 한일회담에 참여할 정도로 조택원은 일본통이었다. 이진아(2022)도 “조택원의 일본인 네트워크와 물적 자원은 해방 이후까지 평생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145)라고 평가했다.
 친일 무용가 연구는 이제 걸음마를 떼는 단계이지만, 친일 청산 연구 대열에 무용학계도 동참한다는 학문적 의의가 있다. 향후 무용계에서 친일에 관한 후속연구가 나오기를 기대하며 다양을 질문을 던져 풍부한 논의의 장이 열리길 기대한다. 다음 글에서는 최승희의 친일 행적을 논의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제언을 하고 싶다. 현재 공적공간인 국립극장 앞마당에 있는 조택원의 춤비 옆에 친일 행적을 단백하게 써넣은 작은 비문을 추가로 설치하길 제안한다. 조택원의 공적뿐만 아니라 과오도 함께 기록하여, 편향된 사실이 아니라 균형잡힌 진실한 역사를 알려주면 좋겠다. 그러면 국립극장이라는 공적공간에 세워진 조택원의 춤비가 뒷 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이 글이 그러한 작업에 작은 디딤돌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

원게재: 무용역사기록학 2023. 9. Vol. 70: 115-144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3007892
인터넷 잡지 <춤웹진>의 편집 체계 내부 시스템 사정상 논문의 각주 및 참고문헌과 영문 초록(Abstract)은 삽입하기가 어려우므로 해당 내용은 논문의 원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 편집자주

2024. 3.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