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육완순 현대무용 50 페스티벌〉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아 하류에는 모든 물이 모여든다 (도덕경 61장)
이지현_춤비평가

 올해는 작년에 이어 무용가들의 굵직하고도 긴 춤의 세월을 기념하는 공연이 이어지고 있다. 2, 30년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그 곱절의 시간을 춤으로 채워 온 선생들이 제자들과 함께 기념하는 무대가 줄을 잇고 있다. <김현자의 춤 60년 – My life>, <김매자 춤인생 60년 – 봄날은 간다> 그리고 <육완순 현대무용 50 페스티벌>까지 일련의 기념공연들이 이어지는 까닭은 전쟁과 분단 속에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의 5, 60년대에 이 분들이 그 땅을 일구고 거기서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기념공연들은 한 개인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것인 동시에 한국의 근대와 함께 성장해온 춤의 역사와도 떼어 낼 수 없는 나이테를 공유하는 공연이라 볼 수 있다. 특히 <육완순 현대무용 50 페스티벌>은 미국의 마사 그라함 테크닉을 수입하여 이화여대에서 교육적으로 정착시킨 육완순 선생이 이번 무대를 채웠던 80편의 무용작품과 89명의 안무자와 460명의 출연자들을 ‘한국을 빛낸 현대무용가들’로 초청하여 보여줬던 것처럼 그 양적인 성장과 질적인 변화를 일궈내는 ‘씨앗을 뿌리는’ 선구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15일의 개막공연은 50주년의 기점이 되고 있는 1963년 귀국공연에서 선보였던 〈Basic Movement〉를 오프닝으로 하여 국립국악원 무용단, 국립무용단, 국립발레단, 유니버설 발레단, 서을발레시어터, 서울예술단 등 국내의 주요 국공립 무용단 뿐 아니라 사립발레단 까지 축하공연을 헌정하는 무대로 채워졌다. 당시 수업을 통해 전수되고 있던 Martha Gragham 테크닉을 단계별로 무대에 적합하도록 연속된 동작으로 구성하여 보여주었던 〈Basic Movement〉를 경희대, 국민대, 상명대, 성균관대, 서울종합예술학교, 수원대, 이화여대,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체대, 한성대 등 10개 대학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과거의 무대를 재연, 확장하여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무대에 육완순 선생이 직접 출연하여 이윤경, 김희진, 이정은, 장은정, 김혜숙, 김정은, 최혜경 등 7명의 제자들과 ‘아직도, 최고의 날을 꿈꾼다’란 작품을 피아노 연주에 맞춰 보여주는 것으로 개막공연을 마무리했다.

 

 


 나 역시 이화여대에서 현대무용을 수학하였기에 대학을 졸업한지 27년 만에 그 동작들을 다시 보니 기억의 보따리가 풀려 나온 것 마냥 온갖 감회가 스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발레를 전공하고 예고에 들어가 현대무용 수업을 경험한 후에 현대무용의 매력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현대무용에 대한 대단한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사도라 던컨의 이름과 함께 동의어로 사용되었던 자유와 해방의 이미지와 바로 마사 그라함 테크닉이 가진 상대적으로 발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을 몸으로 체험하게 해 준 것에서 기인한다. 그건 어떤 해방감이었는데, 깊이 알고 보면 아이러니 하게도 던컨의 정신과 그라함의 테크닉은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미리 발레를 배운 경험이 이 두 가지를 현대무용이라는 것으로 발레와는 완전히 다른, 형식을 벗어난 자유로운 춤으로 인식하게 했다. 신나는 리듬과 비트의 고리타분하지 않은 다양한 음악에 맞춰 춤 출 수 있는 현대무용을 전공으로 택하고 해방감을 선물 받았고,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 ‘춤의 맛’에 젖어 살 수 있는 행운을 누렸었다.

 

 


 개막 공연 후 아르코 대극장과 소극장에서 하루씩 번갈아 가며 6-7개의 작품이 하루에 공연되는 8일간의 대장정은 이번 페스티벌의 ‘불꽃놀이’였다. 이제는 모두 60을 살짝 넘긴 김영순, 이정희, 장정윤, 남정호, 김경옥 등이 무대에서 직접 춤을 추는가 하면, 박인숙, 조은미, 정의숙 등 교수들은 후학들의 무대를 헌정하였고, 김매자, 국수호 등 한국춤의 원로들과 조윤라, 김순정이 발레작품으로 직접 무대를 보여줌으로써 전공을 초월한 ‘화합’의 축제에 불꽃을 터트려 주었다. 그 외의 젊은 현대무용가들은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대표작을 짧은 버전으로 보여주었고, 이제는 40대 중반이 되어버린 제자인 김희진, 장은정 등은 <가자!>를, 박소정은 〈A-Cross〉라는 이 행사를 기념하고 스승에게 바치는 헌정작을 선보였다.
 <가자!>는 엄밀하게 신작은 아니다. 장은정과 김혜숙이 중심이 되어 중년여성과 토크쇼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는 치유 지향의 공연인 <당신은 바비레따에 살고 있군요>의 형식을 빌어 와 선, 후배와 함께 대학시절 배우고 췄던 〈Basic Movement〉를 패러디 한다. 장기하의 ‘달이 차오른다, 가자!”에 맞춰 컨트랙션과 릴리즈 중심의 플로어 엑서사이즈와 수퍼스타 예수 그리스도에 나오는 지겹도록 췄던 군무동작을 학생이 된 듯 열심히 열광적으로 춘다. 그들은 브로셔에 “형태적인 몸짓, 관념에 치우친 춤에 집중했던 지난 세기를 향해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용서를 구하려 한다…. (중략)… 그러한 초석 위에 이제 우리는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형식 안에 갇혔던 몸의 자유, 영혼의 자유를 꿈꾼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들이 가벼운 패러디로 재연해낸 – 세상의 모든 춤인줄 알고 추었던, 그것도 정말 어떤 반론이나 어떤 의문도 제기할 줄 모르고 추었던 - <베이직 무브먼트>는 대학시절 이후 30년이 지난 지금 바로 이 무대에서 스스로 거둬내는 제의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장면들은 그 경험을 공유하지 않은- <베이직 무브먼트>를 수업 때마다, 레슨 때마다, 입시 때마다 하지 않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스스로를 위한 위로와 긍정, 그리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젖히는 의미를 획득하였으나 그것을 객관적인 풍자로 몰아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경험을 공유하고 있던 나와 또 다른 선 후배들은 아마 우리의 몸 속에 있던 그 경험의 무거움과 벽들을 그들 덕분에 웃음으로 날려 버릴 수 있는 후련함을 얻었을 것이다. 머리에 에어프런을 한 ‘바바리녀’들이 사랑스럽다.

 

 


 〈A-Cross〉는 그에 비하면 훨씬 진지한 방식으로 접근한다. 박소정은 진정으로 스승과의 인연을 ‘하나의 교차’로 해석한다. 그것도 지대하고 크다는 의미의 A를 수식어로 사용하여 스승이 자신에게 미친 춤의 영향을 춤으로 풀어낸다. 박소정은 선배 안애순 감독(한국공연예술센타 무용감독)의 무용단에서 수장 노릇을 하며 충실한 무용수로써의 길을 꾸준히 걸어 왔다. 그녀의 무용수로써의 단련됨은 그간 보여준 군무와 자신의 안무작에서 보다 〈A-Cross〉에서 가장 정련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사 그라함의 ‘베이직 무브먼트’를 해체하고 파편화시켜 그것으로 훈련되었으나 그 후에 그것을 이미 벗어나 다른 언어를 갖게 된 몸에 다시 담아 보여준다. Cup hand와 body trunk의 contraction은 짧고 굵게 나타나고 사라진다. 오직 몸과 근육으로 야생을 살아 온 그녀의 몸이 무대 위에서 용감함의 아우라를 빛내며 으르렁 거린다. 이 작품에 영감을 준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가 울려 나오면서 박소정은 한 켠에 놔 두었던 흰색 작은 물렁한 공모양의 물체를 소중이 손에 들고 어떤 길을 걸어간다. 그 공에 조명은 집중되고 오로지 그 작은 물체만이 빛날 때 살포시 바닥에 내려놓고 돌아 나간다. 그녀가 돌아간 뒤에도 그 물체는 빛나고 있다. 그렇게 스승에 대한 마음이 무대 위에서 빛난다. 춤을 마음을 담는 도구로 이렇게 잘 사용할 수 있고, 자신의 춤 공부의 가르침과 역사를 녹이고 잘라 한편의 주마등처럼 춤으로 구성해서 전달할 수 있는 춤이 얼마나 있을까? 이것은 그간 박소정이 수련해 온 춤추기와 이번의 기념공연이 마음을 촉발시켰고, 그것이 정확한 위치에서 cross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소정의 춤꾼으로서의 순수한 여정이 이뤄낸 수정 같이 투명한 ‘마음의 춤’을 보았다.

 

 


 지난 2011년 9월 3일, 미국 시카고에서 박외선 선생이 별세하셨다. 2012년엔 1주기를 맞아 춤자료관 연낙재에서 미공개 영상과 사진 등 유품 50점을 전시하고 회고모임과 학술 세미나를 열었다. 그리고 선생의 제자인 부산대 정귀인 교수는 작년 12월 19일 부산에서 <나는 춤이다- 스승 박외선 선생을 추모하며>란 공연을 가졌다. 박외선 선생은 1962년 일본 유학 후 이화여대에서 교수가 되었으며 그때 가르침을 받은 많은 제자들이 역시 현재의 무용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박외선 선생이 기억되는 이유는 한국의 현대무용 역사가 이화여대에서 전문적인 대학교육으로 시작되면서 수많은 전공생을 배출하였고 양적, 질적 성장의 토대를 갖추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도 현대무용이 우리의 무용가에 의해 대중에게 소개되기 시작한 것은 최승희가 한국적인 것 소재로 작품을 하기 전, 이시이 바꾸로부터의 직접적인 영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던 시절의 작품들은 그 뿌리가 마리 뷔그만의 독일 표현주의 양식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녀가 타이즈를 입고 맨발로 현대무용 동작을 하고 있는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의 공연사진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그렇게 일찍이 1920년대에 공연으로 현대무용이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국내에서 하나의 양식으로 인정받고 활동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1945년 8•15해방 직후 조선무용예술협회 산하 조직으로 현대무용부가 있었던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발레나 전통무용과 구분되는 현대무용이라는 양식에 대한 개념이 해방 후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 1957년 일본에서 유학하고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남성 현대무용가 김상규선생이 <이사도라 던컨 30주기 기념공연>을 가졌고, 1960년대 이화여대에서 일본유학과 미국 연수 경험을 갖고 있는 박외선 선생과 미국 유학 후 육완순 선생이 귀국공연과 더불어 후학양성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이어 그라함 스타일의 현대무용과는 다른 전위무용으로 홍신자선생이 1973년 <제례> 공연으로 전 문화계에 충격을 안겨주며 현대무용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증폭시켰다.
 현대무용은 형식과 아카데미즘의 제도적 굴레가 되었던 클래식 발레를 벗어나 근대(모던)를 열어젖힌 징표가 되는 양식이다. 그래서 거기엔 필수적으로 제도화된 고전주의로부터 해방된 근대적 인간에 대한 이상이 자유와 개인에 대한 발견과 존중이 이념화되어 있다. 그렇기에 현대무용에서 이 정신을 간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게다가 제식훈련처럼 형식과 방법론으로 정신을 마비시키는 테크닉 교육은 과거 고전주의의 잔영이자 회귀의 그림자이지 진정 현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껍질 뿐인 현대, 이름 뿐인 현대무용으로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도는 것과 마찬가지의 착오인 것이다.
 <육완순 현대무용 50 페스티벌>을 보면서 현대무용의 정신을 수호하고 그것을 전파시킨 공로를 기념하거나 한국 현대무용의 역사 속에서 자연스럽게 선생의 공로가 제자리를 찾는 방향으로 가지 못한 것이 아쉽다. 오히려 역사를 한 개인을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단견에 위태로움을 느꼈다.
 게다가 긴 역사의 행보를 예술적 성취, 교육적 업적, 사회적 활동으로 나누어 여러 각도로 조망하지 못한 것도 또 하나의 아쉬움이다. 오로지 특정 스타일의 현대무용을 미국에서 수입하였고, 지금의 고등학생과 대학생, 현대무용을 전공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마사 그라함 기본 테크닉을 경전처럼 외우고 익히고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육완순 선생의 공을 한정짓는 것도 자기통찰이 빈약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게 한정된 부각은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고 빛만을 보려는 태도와 연관이 깊으며 흔적의 그림자를 돌아보지 않는 다는 것은 진실에서 멀어지기 쉽다.
 무용의 역사에서는 진실에 가까이 가지 않으려는 자칭 선구자가 필요한 게 아니라 정신을 해방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한, 그래서 저절로 추앙받는 예술가가, 어른이 더 소중하다. 적은 땅에서 자신이 제일이라는 것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고 더 많이 갖는 영웅이 필요하기 보다는 녹아 사라져 멀리서 열매 가득한 나무를 바라보는 씨앗이 되는 큰 영혼이 필요하다.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큰 나라는 강의 하류와 같아 하류에는 모든 물이 모여든다 – 도덕경 61장)

2013. 03.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