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현대무용단 ‘홍승엽의 댄스 살롱’
굳이 안 할 이유가 없는 것도 하고, 할 이유가 없는 것도 하는…
권옥희_춤비평가

 우리는 살면서 확신에 찬 이들을 만난다.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 때문에 하는지를 안다.(물론 이들 중 많은 수는 ‘무엇 때문에’를 간과하기도 한다) 이들은 확신을 동력으로 한 추진력으로 모든 장애물을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뚫고 나간 작은 구멍, 아무것도 아닌 그 공허한 무공간을 소유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 외의 면적에는 관심이 없다. 하긴 그 외의 것에 관심을 두면 확신이 아니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확신은 소거이자 배제의 작업이란 것도.
 국립현대무용단으로부터 선정된 뒤 ‘전문적인 창작환경과 제작 시스템을 제공(제작 지원금과 무용수클래스 지도까지)’ 받은 안무자 4명 (김정은, 박근태, 송주원, 안영준)의 작품이 <홍승엽의 댄스 살롱>(4월 5일~7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필자 5일 관람)이란 타이틀로 무대에 올랐다.
 이들에게서 넘치는 상상력의 반향이나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주관성의 극단으로서의 천재성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국립현대무용단’이 선정, 지원한 기준과 이유에 대한 설명을 대신할 작품 정도는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김정은의 <three>. 안무자는 말한다. 자신의 작품이 관객들을 어떠한 감정상태에 이르게 할 것이며, 그로인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상상하게 될 것이라고. 기다렸다. 무엇이, 언제 ‘예술적으로 극대화 되어 또 다른 이미지와 감정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지루한 기다림 끝에 확인한 것은 무대 위에 가득 쏟아진 플라스틱 공과 바닥재를 치우는 스텝들의 작업뿐. 무용수들의 춤을 다르게 만들 것이라고 했던 바닥재, 그 바닥재로 인하여 다르게 춤을 추는 무용수는 없었다. ‘과오’고 억지였다. 안무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 잘 구성한 작품을 먼저 보여줘야 관객이 ‘스스로 새로운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박근태의 <I wish...>. 움직이기는커녕 입고 벗기조차 힘든, 폭이 좁은 원피스는 불편한 사랑을 의미하는 듯. 체형이 다른 두 무용수가 같은 원피스를 입고 벗는 움직임을 처음과 끝에 배치함으로써 사랑에 대한 수다(정의)가 춤으로 여과되는 과정이 잘 드러났다. 반면 그리스풍의 기둥과 갓조명을 얹은 테이블, 서정적인 피아노 반주 음악 등은 의미 없이 섞인 또 다른 의미의 수다(소음)였다. 5명의 남녀 무용수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부산 사투리로 수다를 떠는 것, 이미 부산 젊은 안무가들의 작업에서 본 형식으로 개그콘서트의 한 꼭지와도 매우 닮았다. 수다속의 춤, 춤의 수다 속에서 춤의 여운이란 없다. 언어는 오해의 산물이다. 사랑, 사람, 말(수다)대신 자신을 언어화해야 한다.




 송주원의 <환각>. 얼굴을 자신의 머리칼로 싸맨 무용수가 있는가 하면, 헝클어진 긴 머리칼로 서로 연결된 채 바닥을 기고, 머리칼로 만든 큰 사각 판을 머리에 얹고 걷는다. 이러한 형언 불가능한 괴기스러운 머리칼의 표출을 ‘기억의 왜곡, 편집, 불분명함, 기억의 환타지성’이라고 송주원은 말한다. 패션쇼에서 익히 봤던 이러한 분장들은 모델의 익명성과 의상을(쇼의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장치이다. 하지만 <환각>에서의 머리칼 구조물은 춤을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상당한 부피의 머리칼 구조물을 머리에 얹은 무용수들은 바닥을 뒹굴고, 구조물속으로 머리가 사라져버린 무용수의 형체는 마치 외계인 같다. 송주원은 ‘기억에 대한 개인적 시선에 대한’ 이야기를 ‘다양한 시선’으로 하고자 한다. 다양한 시선들이 내재된 춤은 어디에…?
 자의적인 느낌이나 감정을 여과 없이 쏟아(배설)놓은, 과한 이미지의 범람으로 춤이 익사한 작품이었다.




 안영준의 <카니발 carnival, 카니발 cannibal>. 반듯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무용수들의 움직임, 구성, 작품이 주는 이미지 등을 말한다. 비범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일테면 ‘사랑합니다. 고객님’ 같은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미소 짓게는 하는데 감동은 없는. 주제의 익숙함. 어쩌겠는가. 우리는 불안을 동력으로 하는 신자유시대에 살고 있는 것을. 신자유시대가 도입한 승자독식 게임을 무한반복하면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의 고통이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루저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탈락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한히 스펙을 쌓는다. 태도, 성과, 인간관계 등도 좋아야한다.
 삶이 하나의 예능이 된 마당에 예술의 자율성과 인간 주관성의 발현으로서의 현대 예술은 어디에 있는가를 논할 것인가. 욕망과 잔인한 폭력성이 익숙하다니. 이른바 우울의 시대다.




 다시 말하지만 세계 운행의 비밀을 포착할 수 있는 천부적 재능으로 정신을 작품화하여 감상자인 우리의 마음에 그 정신을 불어넣는 위대한 존재들의 출현을 바란 것은 아니다. 당장은 대단하지 않더라도 추후 좋은 작품으로 경지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안무자를 바라는 기대가 있었다. 굳이 국립현대무용단에서 자리를 깔아준 이유일수도 있는. 아니, 그 자리 깔아 주는 일을 굳이 ‘국립현대무용단’에서 해야 할 이유는 또 뭔가? 이래저래 많은 의문만 든 실망스런 공연이었다. 

2013. 05.
사진제공_국립현대무용단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