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김윤정 〈울프〉 〈완벽한사랑〉
의식의 흐름 그리고 사랑을 이야기하라면
김채현_춤비평가

 2011년 공연한 이후 김윤정이 두 작품으로 공연을 올렸다. <울프>는 2010년 작으로서 이번이 재공연이며, <완벽한 사랑>은 신작이다(3. 9~10. 아르코예술극장).

 춤 작품 <울프>는 출연진은 이전과 동일하되 작품의 전체 흐름은 이전에 비해 조밀해졌다. <울프>가 우리에게 묘파해 보이는 것은 ‘내면’의 의식 세계이다. 느릿하며 고즈넉한 움직임으로 독백하는 여성, 몸부림과 뿌리침의 힘이 강한 움직임을 펼치는 여성. <울프>에서 이 두 여성은 같은 인물의 양면을 뚜렷이 대비시키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관객은 작품에서 어느 표류(漂流)하는 자아를 만나게 된다.
 <울프>는 20세기 전반기를 살은 영국 여성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이름을 제목으로 인용한 춤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섬세하고 예민한 심리 속에서 평생 고뇌에 시달린 작가로 알고들 있다. 의식의 흐름을 모던한 기법으로 영민하게 그려낸 버지니아 울프는 60살이던 어느 날 지팡이를 짚고 산책을 나가고선 불귀의 객이 되었다. 작가는 인근 해변에 지팡이를 남긴 채 실종되었고 이틀 후 그 사체가 발견되어 사람들을 허탈에 빠트렸다. 그녀의 작품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파도(The Waves)>이며, 김윤정은 스스로 밝히듯이 <파도>에서 춤 <울프>를 착안하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페미니스트 계열 작가로 재해석되는 면이 있고, 경우에 따라 이 점이 부각되기도 한다. <울프> 역시 그런 시각의 춤이려니 지레 짐작되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파도>는 예닐곱 명의 남녀 인물이 각자 번갈아 길게 하는 독백을 엮은 소설이다. 그 독백이 하도 길어 연극 같은 소설이라 해도 무방하다. 한 사람의 독백이 몇 페이지에 걸쳐 서술되기 일쑤고, 하나의 독백도 뜬금없어 보이는 의식의 흐름을 쫓으므로 <파도>를 읽다보면 지루한 감마저 든다.(그런 류의 뜬금없음과 유사한 사례를 V. 니진스키의 일기책에서도 볼 수 있다.) 인간 의식의 흐름이 이럴 것임을 <파도>에서 실감하게 되는데, <파도> 특유의 지겨움은 오히려 소설이 보여줄 만한 예술적 미덕으로 감지된다.
 <파도>에서 버나드, 네빌, 로우다, 수잔 들이 털어놓는 독백들은 버지니아 울프의 내면을 관류하는 마음들 같아 보인다. 여러 소설적 가공인물들 입으로 버지니아 울프는 삶을 이야기한다. 아니 그보다는 살아가는 존재가 취해야 할 모습(혹은 의미)을 찾으려 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독자는 어느 소설가의 존재론을 읽게 된다. 그래서 <파도>의 독자에게 전달되는 삶은 줄거리로 연속되는 삶이 아니라 단편적 사실이나 기분과 느낌이 조각조각 떠올랐다 사라지는 존재의 순간들이다.
 <파도>에서 어느 등장인물이 한 독백의 한 구절만 읽어 본다. “고마운 고독이여. 혼자 있게 해다오. 이 존재의 베일을, 밤낮으로, 온종일,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모습을 바꾸는 구름을 내던져버리자. 여기에 앉은 동안에도 나는 변하고 있었다. 하늘이 변하는 것을 주목했다. 구름이 별들을 감쌌다가 풀어주었다가 다시 숨기는 것을 보았다. 이제 더 이상 이러한 변화를 보지 않는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고 나도 더 이상 변하지 않는다. 눈의 압박을, 육체의 유혹을, 거짓말과 문장들 일체의 필요를 제거시킨 고마운 고독이여.”
 <울프>는 <파도>의 독백들과 버지니아 울프의 내면세계를 주축으로 하였다. 녹음으로 들리거나 출연자 현지예가 읊조리는 대사들을 배경으로 현지예와 김윤아는 순간 순간 이미지를 펼쳤다. 춤 제목이 소설 작가의 이름과 동일하고 작가의 내면세계를 소재로 활용함에도 불구하고 이 춤은 버지니아 울프에 관한 춤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 같은 사람이 가졌을 내면세계는 <울프>에서 우리들의 것으로 일반화된다. 여기서 남녀의 구분은 대체로 무의미한데, 왜냐하면 두 여성 출연진 그리고 작품의 장치로 걸린 드레스가 여성 취향을 말해주긴 하지만 굳이 여성을 특정하여 작품이 전개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울프는 그런 내면을 가졌고 또 그것을 드러내는 사람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현지예가 어둠 속에서 스툴 체어에 못을 쾅쾅 박는 망치 소리로 막을 열은 <울프>에서 그런 소리에 내포된 견고함이나 단단함은 몇 차례 독백에서 강하게 환기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붙잡으려 하는 의식의 욕구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너 단단해? 나는 나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이 싫은 거야. 나는 자주 혼자서 무(無)의 한가운데로 떨어지고 말아”라고 하는 독백이 암시하는 것처럼 나의 내면이 대하는 나는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 이렇게 견고하지 않고 흔들리는 내면 속에서 의식은 더욱 흘러갈 것이다.




 현지예는 옅은 남색의 실내 드레스를 갖추고 작품을 끌어간다. 큰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과 전신을 비추어 독백하는 현지예 아니 울프의 모습에서 확인되듯 <울프>의 무대는 혼자만의 실내이다. 울프는 춤추기보다 배회하였고 그래서 춤 <울프>는 어느 면에서 퍼포먼스 성격이 짙다. 작품 도입부에서 울프가 거울 속 일렁이는 모습을 들여다볼 때, 거울 저편에 다른 제복 입은 사람(김윤아 출연)이 출현했다가 사라지는데, 울프의 분신(다른 자아)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됐어? 바로 이것이 황홀한 순간이야. 이제 끝났어”하는 울프의 독백은 <울프>에서 그가 과거에 묶여 있음을 벌써 도입부에서부터 강하게 나타낸다. 우리의 내면 세계가 사실은 과거의 내밀한 축적에 다름없음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설정은 <울프>의 흐름에서 적절해 보인다.
 <울프>에서 시종일관 냉랭하게 뱉어지는 독백이 갖는 비중은 매우 높다. 모자이크 조각마냥 수시로 허공을 가르는 울프의 독백에 좀 귀기울여보자. “이제 나는 괴로움을 손수건으로 싸려 해... 어느 쪽이 슬픔이고 어느 쪽이 기쁨이지? ...어떤 것에도 이름을 붙여서는 안 돼.” “달력에서 지나간 날을 찢어 꽉 비틀어 공 모양으로 만들자.” “한 아이가 놀고 있다... 우리가 너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미래의 시간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한 달 두 달 세월이 흐르면서 사물은 견고함을 잃어가지...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오늘 밤 죽음은 어디에 있지? 이 모든 것이 이야깃거리이다. 나도 하나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짜 이야기일까? 하지만 이야기가 없다면 어떤 결말이 어떤 시작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울프>의 어디에서도 울프의 의식이 닻을 내리는 정박 지점은 없다. 다시 말해 의식은 내면에 떠올리는(그리고 내면에 떠올려지는) 그 무엇에서도 계속 미끄러진다. 울프 역의 현지예가 서성대거나 주춤하는 움직임을 주로 해낸 것은 이를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헨델의 곡 ‘울게 하소서’는 여러 가지로 변주된 음향으로서 작품을 끌어가며, 헨델의 이 청아한 효과 음향은 <울프> 전반에 걸쳐 그런 여러 갈래의 내면이 유려하게 표현되도록 하였다. 반면에 그의 분신에 해당하는 김윤아는 어떤 지점에선 움직임을 아주 유연하게 단말마적으로 전개하여, 현지예와는 퍽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 갸름하며 청초한 얼굴에 생머리를 말아 올린 현지예는 내면을 관찰하듯 들여다보고 독백하며 내면 속을 맴돈다(이전 공연에서 현지예의 머리 스타일은 짧은 쇼트컷이었으며, 이번 공연의 머리 모습이 더 실감나 보였다). 강한 인상에 긴 쇼트컷인 김윤아는 내면의 어느 순간을 뿌리치려는 듯이 몹시 몸부림친다. 어떤 것에도 이름을 붙여선 안 된다는 울프의 독백처럼 그 내면은 정박하는 곳 없이 양극단을 왕래하였다. 일상인의 내면도 실상은 이럴지 모르겠다. 그렇더라도 일상인에 비해 울프는 현실에서도 정박할 지점이 없다.
 <울프>의 여러 부분들에서 공중에 매달린 여러 벌의 화려한 드레스들이 좀 오래 머물렀다 사라지곤 한다. 어느 지점에서 흰 셔츠와 검정 바지를 입은 김윤아가 상체를 숙이고 질주하듯이 드레스들 사이를 빠르게 헤쳐 나갔다. 의상 가운데서도 드레스는 사회적 의례의 중요한 절차일 것이므로 이 장면들은 내면과 대치되는 겉치레의 일상 속을 정신없이 헤매는 순간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속옷 같은 흰색 민소매 셔츠와 짧은 바지 차림으로 얼굴을 흰색의 길다란 천으로 휘감은 채 몸부림치는 김윤아는 벗어날 수 없는 외부 세계를 외면하려 하지만 여의치 않아 마구 헤매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그러나 김윤아의 이러한 몸부림은 소파를 배송하러 온 택배 기사 같은 남자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중단되고, 김윤아가 물건 수령 사인 행동을 하자 남자는 사라진다. 내면에 몰입한 사람과 일상 세계 외부인이 조우하는 그 순간 김윤아는 내면에서 깨어나고 여태까지의 <울프> 분위기는 돌변하였다. 택배 기사가 배송한 2인용 소파는 두툼하며 육감적인 붉은 입술 모양(앤디 워홀의 그림을 상기시킴직한 그런 입술)이다. 고백을 말하려면 입(술)이 있어야 할 것이고, 이 입술 모양의 소파는 상징성이 크다. 김윤아는 이 소파 가운데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입술 속으로 몸을 감추며, 곧 두 사람의 네 다리가 입술 바깥으로 삐죽이 불거져 나온다. 흑인 가수의 왁자지껄한 재즈 소리에 맞춰, 불거진 네 다리는 2분 가량 서로 이리저리 빠르게 뒤엉켰다 사라진다. 그러면 현지예가 얼굴만 내밀어 또 다시 독백하기를 “침묵이 떨어져 그 울림소리가 가장 멀리 있는 곳까지 휩쓰는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여기서 조용히 환기되듯이 입술이 침묵의 저장고인 것은 역설적이다.




 이 소파 부분은 그 앞과 뒤 부분에 비해 우선 분위기상 돌발적이다. 소파 부분 이후에 작품 분위기가 그 이전으로 되돌아간 점에 비추어, 소파 부분은 일테면 삽입구로 여겨지며 혹시 유머 있게 쉬어가는 코믹 부분으로 의도되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두 사람의 네 다리가 뒤엉키게 함으로써 두 사람이 결국 한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려는 장치로서 소파 부분이 설정되었을 듯한데, 하지만 관객으로선 어색한 느낌을 피하기 어렵다. 택배 기사 역을 맡은 류장현의 역할도 카메오에 그칠지라도 그가 재능 있는 춤꾼인 줄 아는 사람들의 기대에는 미흡하였다.
 의식 속의 기억과 현실이 혼재하며 서로 밀고 당기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그러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고, 그렇게 귀 기울이는 행위가 사치와 나약의 징후로 낙인찍히는 경우도 없지 않을 것이다. <울프>는 인간이라면 감당해야 할 내면 ‘의식의 흐름’을 처리한 춤으로서 눈여겨 볼 작품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출연진에서나 장치에서나 <울프>에 여성 취향이 있고 그래서 여성들에게 더 호소력이 있을 듯하지만, <파도>와 마찬가지로 <울프>도 성별을 초월한다. 소설 <파도>는 삶의 무상성(無常性)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그렸다. 춤 <울프>는 이러한 점을 저변에 깔면서 의식의 흐름에 밀려가는 울프의 모습을 소설과는 또 다르게 형상화하였고 호소력이 컸다. 

   <울프>에서 음향 효과로 사용된 파도 소리가 단편적이고 미약했던 것은 <파도>와 다른 점이었다. 그러나 <울프>는 <파도>의 춤 버전이되 수동적 해석본이 아니었다. 운명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울게 하소서’의 청아한 곡조나 품격 있는 틀 속에 설치된 거울, 허공에 매달려 번득이며 중압감을 더하는 화려한 드레스들은 <울프>에서 내면 지향의 감성에 다채로움을 더하였다. <울프>는 춤으로 행해질 춤 독백(dance soliloquy)으로서 독특한 호소력을 갖는 동시에 현대춤 작업의 개성 면에서 기억할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김윤정은 신작 <완벽한 사랑>을 함께 올렸다. 인터넷 시대 아니 모바일 시대의 사랑 풍속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완벽한 사랑을 질문하였다. 그런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완벽한 사랑>은 시작이 경쾌하였으며 이런 분위기는 작품의 기조를 이룬다.
 막이 열리면 스타카토 스타일로 톡톡 튀는 리듬의 밴드 음악이 반복해서 흐른다. 마치 나이트나 클럽 분위기의 리듬 같다. 그런 속에서 7명의 남녀 춤꾼은 색색갈의 캐주얼과 양말 차림으로 늘어서서 움직인다. 아이리시 탭 댄서들이 그러는 것처럼 4각형 내에서 두 팔을 허리 부위 몸통에 고정시킨 채 두 발을 지면에서 떼지 않고 한쪽 발을 번갈아 세워 접치며 앞으로, 옆으로, 뒤로 각자 전진하는 모습을 보인다. 각자 눈높이 정면을 주시하고 이동할 뿐 그들 사이에 접촉이나 교환의 기색은 전무하고, 그냥 음악이 흐르는 대로(음악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그들이 있는 곳은 레고 토이 랜드 같다. 왼쪽에 하얀 집이, 오른쪽에 하얀 놀이 기구가 있고 이것들이 놓인 4각형 바닥은 잔디 색깔이다. 그러고 보니 팔을 몸통에 붙이고 무릎만 굽혀 이동하는 그들은 마치 레고 랜드의 로봇 아이들처럼 보인다. 잔디가 깔린 마당에서 그들은 제각각 노는가보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 그들 사이에 감정이 전이되었는지 대열이 차츰 흐트러지며 팔놀림이 추가되고 또 다리를 올리며 비로소 서로 반응을 교환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둘만 남고 모두 퇴장하며, 남은 두 남녀는 서로 손을 뻗고 마주 보며 데이트 모드로 들어간다. 동시에 좀 어두워진 무대에는 모바일의 문자 메시지가 영상으로 중계되듯 비춰지고(‘너도 외로워?’ ‘응, 네가 외로운 만큼.’ ‘날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건 어제 한 말이지.’… … …) 두 사람의 엇나가기 마련인 대화는 힙합의 재빠른 관절 꺾음 움직임으로 다양하게 지속된다.




 <완벽한 사랑>은 오늘의 사랑을 여러 모습으로 스케치한다. 춤꾼들은 작품 도입부에서처럼 그 옷과 양말 차림으로 경쾌한 감각을 꽤 오래 선사한다. 무대 배경으로 밀집한 아파트 건물들 풍경이 비춰지고 예닐곱 쌍 그리고 몇 가지의 집단무가 전달하는 사랑은 일단 컬러풀하다. 사랑의 풍속첩이라기보다 사랑의 생태계로 안내하는 이 작품은 그러나 다소 회의주의적인 시선으로 사랑을 스케치한다.
 스피디한 도시의 사랑을 속도감 있게 스케치하면서 안무자는 완벽한 사랑을 제시하기를 유보한다. 표면상, 그들의 사랑은 끈적임이 없어 담백하고 스피디해서 깊이가 없다. 표면상 그렇다 하더라도, 표면의 배후에서 사랑은 여전히 실존적 현상일 것이다. 스피디하게 짧게 소개되는 이 사랑들도 매번 기로에 놓이게 된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성숙의 문이라 칭할 듯한데, 성숙한 사랑마저 실존적일 수밖에 없기는 마찬가지다. <완벽한 사랑>의 초점은 여기로 모아진다. 한참 후 이어지는 문자 메시지들과 독백은 점차 길어지고 되새길 거리를 던진다. 그 중에서도 짧은 어느 독백은 이렇다.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흔들리고 있는 그것을 나는 모른 채 너의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공연 출연진들의 움직임과 춤 구도는 사랑의 모습들만큼이나 변화가 있었다. 그들의 날렵한 움직임들은 특히 2인무들에서 강력하면서도 짜임새를 발휘하였으며 얽힘과 안아올리기처럼 아크로배틱한 기량으로 강조되는 부분들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도 최우석과 김주희의 춤 연기력은 시선을 끌었고, 김주희는 끝자락의 독무에서 사지를 고루 사용하는 에너지 넘치는 춤으로 (사랑의) 외로움을 아주 밀도 높게 표출하였다.
 더욱이 팝핀현준의 힙합은 <완벽한 사랑>의 레시피에서 잘 어울리는 소스 구실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출연한 여러 부분들 중에서도 동성 간의 사랑을 묘사한 부분은 약간의 소개를 요한다. 최우석과 배민우가 연기한 이 부분은 사실 동성 간의 사랑과 이성 간의 사랑 가운데 어느 쪽을 묘사한 것인지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절제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관객은 그들을 게이 커플로 받아들였을 텐데, 어느 쪽을 묘사했든 남성 간의 우정 또는 애정을 느끼게 하는 춤이다. 두 사람의 춤이 진행되는 동안 팝핀현준은 지붕 위에 걸터앉아 제3자적 시선으로 거리를 두지만, 그 역시 복장도착증 같은 증세를 이미 노출하고 있었다. 흰 셔츠-검은 바지의 그는 빨간 하이힐을 신고 다리를 한가롭게 건들거리며 그들을 지켜보다가 느낌이 통했는지 지붕을 내려와 그들의 춤에 열심히 동참한다. 그들이 사라지면 현준은 그 하이힐을 신은 채 춤 연기를 펼치는데, 그의 플로어 동작은 매우 리드미컬하였고 마침내 그는 팝핀과 웨이브뿐 아니라 플로어 동작까지 구사하며 하이힐 춤을 현란하게 펼쳐갔다.
 이것이 이번 공연에서 특기할 춤이라면, 현준의 기량과 아울러 그에 내포된 의미 역시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장 도착이 뜻하는 바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현준이 춤 연기를 펼친 후에 벗은 하이힐을 두 손에 쥐고 바닥에서 또는 몸 웨이브를 섞어가며 열심히 노는 장면의 의미는 복합적으로 보였다. 이 부분은 하이힐을 신거나 갖고 노는 행위를 복장도착증으로만 받아들이기를 일단 정지시키는 효과가 크다. 다시 말해 동성애에 몰두하는 상황, 아니면 이성(또는 동성)이 떠나가버린 상황, 이도 저도 아니면 진행중이거나 다가올 사랑을 상상하는 상황 가운데 어느 쪽을 상징하는지 단정하기가 애매해진다. 게다가 현준이 남기고 간 빨간 하이힐을 최우석이 자신이 안고 나온 이성 출연자 송보현에게 신기고 다시 둘 간의 외로운 사랑이 스케치된다. 이처럼 <완벽한 사랑>에선 타당한 해석들 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관객의 몫으로 돌려진 부분이 대부분이고, 마찬가지로 완벽한 사랑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판단권은 관객에게 맡겨진 편이었다.




 사랑의 생태계를 스케치하면서 이번 작품은 다양한 언어 텍스트를 동원하였으나, 텍스트는 좀 과도할 뿐만 아니라 산만해 보였다. 그러한 텍스트로 인해 작품 수용 과정에서 초점이 흐려지는 역효과도 있은 듯한데, 밀도 높은 춤들 덕분에 그러한 부작용은 감소되었다. 아무튼 <완벽한 사랑>의 스케치는 신선하다. 이 작품은 사랑에 관한 다양한 단상을 열거하며 젊은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였고, 관객은 혹시나 풀리지 않을 이런저런 사랑을 새삼 살펴볼 기회를 상큼하게 가졌을 법하다.

2013. 05.
사진제공_코르 코르디움(Cor Cordium)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