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한국춤비평가협회 4개국 국제 포럼 : 다시 최승희를 본다 (2)
최승희 연구 선구자 무용학자 고 정병호, 이애순 추모모임

□ 최승희 연구 선구자 무용학자 고 정병호, 이애순 추모모임

< 순 서 >

고 정병호교수의 최승희 연구열정 회고 _ 이병옥(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
무용을 향한 스승의 집념 _ 박해영(중국 연변대학교 예술대학 강사)
감사의 글 _ 진철수(이애순 교수 부군)


사회: 이 종호 (춤 비평가)

 │고 정 병호 선생님


 

 

< 약 력 >
전남 나주 출생 1927
광주농업고등학교 1946
조선대학교 체육 학사 1955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
香港華僑대학 문학박사
서라벌예대 무용과 강사. 고려대 출강 1961
서울대 사범대 강사. 단국대 체육과 조교수 1962
중앙대 무용과 교수 1963~1992
문화예술진흥원 무용교원심사위원 1976    
전통무용연구회 회장 1977~1985
민속학회 상임이사 1978    
국제극예술협회(ITI)한국본부 상임위원 1978    
문화공보부 문화재위원 1981    
문화체육부 문화재위원
국립극장 운영위원. 무용분과 레퍼터리위원
한국춤평론가회 입회 1992
이화여대 숙명여대 세종대 한양대학원 등 출강
중앙대 명예교수
탄생90년 최승희국제무용축제 조직위원장 2002

< 상 훈 >
전라남도 문화상
한국무용협회 학술분야 문화대상
한국출판협회 올해의 책 『한국춤』 『농악』 선정
옥관문화훈장 1997
대한무용학회 올해의 학술상 1999
화관문화훈장 2008

정병호(鄭昞浩/ 1927년 1월 1일, 전남 나주) 무용학자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대학원 석사, 香港華僑대학에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갓 20세가 넘어 신문화에 대한 열망으로 상경하여 조선교육무용연구소의 3기생으로 춤에 발을 들여놓았다. 함귀봉, 문철민 등으로부터 당시의 신무용과 이론을 접하였고, 격동의 해방공간에서 활동했던 무용가들의 면면과 당시의 무용 문화를 면면을 보았다. 1960년대에는 주로 교육무용, 세계의 민속무용 분야에서 활동하고 집필하다가, 1970년대에 전국의 민속춤들을 발굴 소개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했다. 1976년에 신창균, 조동화, 최현, 허규, 박진주, 임동권 등과 함께‘전통무용연구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맡았고, 전국의 전통춤 발굴작업의 성과를 1976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하여 1979년에 처음 개최한 ‘명무전’은 1980년대 한국명무전의 시초가 되었다. 이러한 성과는 『춤사위』, 『한국춤』,『농악』,『한국의 민속춤』,『민속기행』등으로 남았다. 문화재위원으로 다년간 활동했으며, 중앙대학교 무용학과를 정년퇴임한 후, 1990년대에는 최승희의 행적을 쫓아 방대한 분량의『춤추는 최승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최승희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의 저서는 일본에서 『韓國の民俗舞踊』,『世紀の美人舞踊象 崔承喜』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한국 전통춤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한국무용의 미학』에서 한국 전통춤의 미적 원리를 독자적인 관점으로 정리해냈다. 한국춤계에서 선생의 강의를 듣지 않은 인사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그의 이론적 영향을 받지 않은 저작도 없을 것이다.


 

 │추모의 글

고 정병호교수의 최승희 연구열정 회고


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 이 병옥





1.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의 최승희 연구하면 정병호교수를 먼저 떠올린다. 물론 정병호교수는 한국의 전통춤 연구의 대가로 많은 현장연구 업적을 후학들에게 남긴 민속학자이며, 무용학자이다.
그리고 항상 열정적이었고 신명이 넘치고 마음 따뜻한 분으로 제자사랑이 남다른 분이었다. 이러한 사랑의 열정이 민속춤을 연구하는데 정열을 받쳤고, 최승희 연구에 생을 받쳐 소중한 자료를 유산으로 남겼다.
정병호교수가 최승희 연구의 열정의 배경은 중학교시절 최승희 춤을 보고 나서부터 였다고 술회하였다. 원래 열정이 많은 정교수는 사춘기에 접한 최승희 춤에 반하여 평생 무용학의 길을 걸어가는 에너지가 되었고, 정년퇴임 후 최승희 사진 한 장, 관련조언 한마디를 수집하느라 한국, 일본, 중국 등 어디든지 찾아 다니셨고, 집중적인 연구활동으로 최승희 관련 자료수집과 최초의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최승희를 그토록 사랑한 분이 최승희 탄생100주년이 되는 해에 최승희가 가있는 저 세상으로 가셨다. 우리는 슬플지 몰라도 정병호교수는 행복할지도 모른다. 최승희와 해후하여 회포를 풀고 신명의 춤을 추며 지내는지도 모르겠다.



2. 정병호교수의 최승희 저서와 목차

정년퇴임 후 본격적으로 연구에 몰두한 결과 1995년 최승희에 대한 최초의 저서가 출간되었다. 최승희 저서의 제목과 목차, 그리고 2002년 최승희 탄생 90주년 국제심포지엄에서 발제한 정병호교수의 제목과 목차는 다음과 같다.

춤추는 최승희-세계를 휘어잡은 여자』(1995, 뿌리깊은 나무, 446쪽)
제1부 평전
소녀시절(1911~1928)
경성생활(1929~1933)
마침내 일본에서 우뚝 섰다(1933~1937)
세계를 누비며(1937~1940)
어두운 시절의 행적(1941~1944)
북한생활(1945~1957)
비극적인 종말(1957~?)

제2부 최승희를 논한다
1 그 여자의 인품과 성격
2 그 여자의 욕망
3 그 여자의 인기
4 그 여자의 실존
5 그 여자의 예술
6 그 여자의 평가

「한국근대무용의 선구자, 최승희의 예술과 생애」(<춤저널>제16호, 2001발간 수록내용)
1. 서론
2. 최승희의 인품과 성격
 1) 무대 위에 빛나는 아름다움
 2) 자존심으로 무장한 구두쇠
 3) 마음속의 저항심
 4) 신비성과 사치
 5) 남자기질이 있는 거인
3. 최승희의 예술적 열정
 1) 세계를 넘보게한 힘
 2) 예술의 세습화
 3) 정치와 예술의 분리론자
 4) 최승희 집념과 욕망
4. 최승희 예술적 인기
 1) 동양적인 매력
 2) 가련한 조선의 여자, 희망을 주는 민족의 꽃
5. 최승희 예술의 몇가지 특징
 1) 안막기획, 최승희춤의 특징
 2) 동서양을 넘나든 작품들
 3) 최승희 춤의 특징
6. 최승희에 대한 평가
 1) 두가지 고정관념
 2) 근대한국무용에 남긴 발자국
 3) 세계가 알아준 동양 춤꾼
7. 결론
최승희는 한마디로 전설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그 평가는 흑백의 논리로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최승희라는 인물을 놓고 생각한 것이 그녀는 친일적 인물, 월북예술가라는 약점을 가지고는 있지만, 좀더 깊이 추적해 보면 일상생활이나 예술을 하는 동안에 노출된 행각은 반일 반사회주의적 행위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는 등 위선적인 면이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의식적으로 정치를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 자체는 모두 예술에 대한 광기(光氣)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보면 최승희는 분명히 궁극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그녀는 분명 우리민족의 사기(士氣)를 올려놓았고, 기생춤에 민족적 정신을 넣어서 예술무용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무용을 위해 치열하게 예술혼을 불태우는 열정을 보였으나 결국은 민족비극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최승희는 연구하면 할수록 그녀는 전설적인 인물답게 많은 점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낀다는 점이다. 여기서 최승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일면들을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①이름에 있어 일본발음 “사이쇼오끼”의 해석과 창씨개명 문제, 의상에 있어 양장하거나 한복만 착용한 이유
②노벨상 수상자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를 비롯하여 일본의 명사와 최고의 예술가들, 좌파적인 개조사(改造社)사장 야마모도 노리히코(山本實?), 한국의 여운영, 송진우 등이 참여한 최승희 후원회의 정체
③세계순회 공연 때 지역에 따라 재페니스 댄서, 또는 코리안 댄서로 행세한 뒷이야기
④이른바 일본군의 문시에 나타난 특원과 공연내용
⑤태평양 전쟁 종전 후 이시이 야에코(石井八重子)의 증언과 노가(露木)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아사이 신문(朝日新聞)에 발표한 “최승희 일본탈출”이라는 기사의 내막
⑥8.15해방 후 안막과 최승희 귀국의 수수께끼
⑦친일파를 싫어하는 매란방(梅蘭芳), 주은래(周恩來)수상, 정율성(鄭律成), 모택동(毛澤東) 시를 중심으로 작곡활동을 한 한국인과의 친교배경
⑧공산당원이 아닌 특권과 개인 우상화 배경
⑨최승희를 숙청한 배경
⑩김일성(金日成)수령의 회고록에 최승희가 다루어진 이유
⑪김대중 대통령 방북시 만수대예술단이 보여준 최승희와 안성희의 작품, 그리고 복권소식
최승희가 우리나라 근대무용의 선구자로써 많은 활동과 업적을 남겼음에도 위에서 제시한 문제들은 아직 풀리지 않는 사항들로 남아있다. 이는 분단이라는 현실상황이 안겨준 최승희 연구의 한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이 있다해도 최승희가 우리나라 근대무용의 가장 앞선 선구자라는 사실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 하겠다.



3. 맺음말- 최승희의 인물론


1985년 남북이산가족 재회시 50년 만에 접한 남북한 예술의 격차가 너무나 심해 충격적이었다. 그 때 정부의 부름을 받고 북한무용 연구로 통일원 특수자료실을 허가받아 삼엄한 관리 속에 북한무용 연구에 몰두하였고, 정교수님은 최승희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1990년 전후로 북한무용과 최승희에 대한 연구에는 많은 장벽이 있었다. 모두가 불온문서에 해당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접할 수 있었던 북한자료관의 무용문헌과 월간 조선예술 30년(1960년대 이후) 자료를 조사할 때 최승희에 대한 언급은 한 글자도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북한무용 거의 모두가 최승희 숨결로 잔재되고 이루어진 무용들이었다. 그리고 북한에서의 행적 등을 제대로 알 수 없는데서 오는 미스테리와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국내 비판론자들과의 전쟁 아닌 전쟁을 치루면서 정병호 교수는 천신만고 끝에 옥고를 다듬어 출간하였다. 나 역시도 그 어려움 속에서 『북한의 공연예술Ⅱ』(1991. 고려원,공저: 정병호, 이병옥, 최동선)를 출간하였다.
그 후로도 최승희에 대한 비판여론 때문에 어려운 사정도 많았지만 굴하지 않는 신념으로 맞서 대응하여왔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다. 후학들이 하나 둘 나타나 최승희 연구에 열정을 바치고 저서와 논문들을 발표하여 동조하는 모습들이 보여서 말년에 외롭지는 않았다. 최승희는 우리민족사의 가장 큰 전환기에 탄생하여 가장 굵게 살다간 무용가이다. 그러나 보니 불모지에서 한국무용계를 초석과 터전을 만든 무용인임에는 틀림없다. 과거 전통시대에서 현대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격변하는 세계사의 소용돌이와 비극적인 민족의 역사현장에서 꿋꿋이 한국무용을 개발하고 지켜온 역사인물이며 길이 남을 무용가이다.
이제 최승희의 색깔논쟁은 부질없는 일이다. 진정성을 가지고 최승희를 조명하는 일만이 후학들이 노력해야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정병교수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최승희에 대한 연구 내용들을 통해 그녀의 무용사상과 예술세계를 조명해볼 때 시간관계상 간단하게 직함식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본다.

1. 세계주의 무용가(글로벌리즘, 시각- 한국춤의 세계화)
2. 범아시아 무용가(오리엔탈리즘, 아시아춤의 정립)
3. 민족주의 무용가(한민족의 민족무용 종목개발)
4. 자유주의 무용가(사회주의 무용가가 아님, 숙청)
5. 사실주의 무용가(리얼리티 무용)
6. 근대무용의 선구자(신무용시대 대가, 조택원, 배구자 등과 함께)
7. 북한무용의 효시자(현재 전승되는 북한무용의 뿌리)
8. 여류무용가(페미니스트, 남존여비시대에 여성지위 향상)
9. 현대무용가(현대무용가 이시이바꾸 제자)
10. 한국창작무용가(탈전통의 무용창작)
11. 퓨전무용가(한국무용과 서양무용의 접목, 크로스 오버)
12. 교육무용가(아동무용기본, 조선무용기본 지도서 저술, 무용학교 설립)
13. 민속무용 연구가(한성준춤, 봉산탈춤, 검무 등 연구정립, 저서, 학자)
14. 민족무용극 창시자(사도성이야기, 칠석의 밤, 보현보상, 천하대장군...)
15. 독무무용가(솔리스트, 나중에 군무 안무)
16. 스타 무용가, 탈랜트, 만능엔터테이너(모델, 영화배우)
18. 대중무용가(한중일 모든 국민들 대상)
19. 관능적인 무용가(Sexuality, 한국춤=감춤의 미학, 보살춤=노출의 미학)



 │고 이 애순 선생님


 

 

< 학 력 >
李愛順 (1958. 12. 15-2011) 조선족 중국 길림성 용정시에서 출생.
1975년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학과 졸업
1989년 중국 예술연구원 무용이론 석사
1999년 연변대학 朝-韓학원 朝文학과 朝鮮言文 박사

< 경 력 >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학과 교수 및 학과주임
예술연구원 소장
중국소수민족예술학과 초빙 학과장
중국무용가협회 위원
연변무용가협회 부주석
국제 高麗學會 문화예술부 위원장
중국 국가교육부 예술부분 음악무용교수지도위원회 위원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구처 처장
중국 중문 핵심간행물 “東疆學刊”, “문학과 예술” 편집위원
한국 “무용예술학” 해외 특별초청 편집위원

< 주요 硏究著書 >
「중국조선민족예술교육사」(合著) 중국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2년
「중국조선민족무용예술사-무용사」(合著), 중국북경 민족출판사 1994년
「한국백과전서」-‘音樂章, 舞蹈章’ 중국흑룡강 조선민족출판사 1999년 12월
「조선-한국 20세기 무용발전사연구」1997년-2000년
「최승희무용예술연구-20세기예술문화와의 관련 속에서」2001년 4월
「최승희무용예술문집」한국 국학자료원 2002년 9월
「남북 조선문화교류와 조선의 조선학연구」(合著) 한국백산서당 2004년 6월

< 주요 연구논문 >
<중ㆍ한 고전무용 비교문화 고찰> 중국 '문확과 예술' 1983년 3월
<중국조선민족무용미학특징에 대한 고찰> 한국무용가협회 '무용세계' 1991년 4기
<중국조선족무용특징에 대한 고찰> '예술세계' 1992년 2기
<민속무용문화실태반성> '예술세계' 1992년 4기
<정예무용문화의 곤경과 자아완성> '길림예술학원연변분원 학보' 1993년 1기
<조득현무용사상종합투시> '문학과 예술' 1993년 5기
<무용 "강과 새의 마음"에 반영된 문화의 초월의식과 창조의식> '예술세계' 1994년4기
<다시 피여 난 무극의 꽃 "봉선화"> "예술세계" 1997년 4기
<"전형기"에서의 무용학과에 대한 사고> "예술세계" 1998년 2기
<중국조선족창작무용실태관조> "예술세계" 1998년 3기
<다원구조 속에서 본 무용시 "장백의 정"> "예술세계"1998년 5기
<중국조선족창작무용실태관조> '예술세계' 1998년 3기
<21세기 중국무용교육과 발전대책> 중국 '북경무용학원학보' 1999년
<中ㆍ朝ㆍ韓 삼원구조에서의 "長白情"> 중국 "연변대학학보" 1999년 2월
<중국조선족무용50년의 반성과 새 세기전망> "예술세계" 2000년 1기
<중국조선족무용50년의 반성과 새 세기전망> "예술세계" 2000년 1기
<중국 조선족무용 50년의 반성과 전망> '藝術殿堂' 2000년 1월
<최승희무용실체연구> (1) '예술전당' 2000년 2월
<예술자원과 연변지역의 발전> '兴边富民과 少數民族의 발전' 2001년 10월
<當代 연변조선족 사회발전대책과 분석> 2001년
<중국조선민족무용발전과 그 속의 인물들> 한국 "몸"(댄스매거진) 2002년 12기
<전통문화의 현대화과정에서 생성된 실체-중국조선민족무용실체조명>한국무용예술학회 "무용예술학연구" 2002년 가을호
<중국조선민족무용발전과 그 속의 인물들> 한국 "몸"(댄스매거진) 2002년 12기
<전통문화의 현대화과정에서 생성된 실체-중국조선민족무용실체조명> 한국무용예술학회 "무용예술학연구"
<赵得贤선생의 인생, 예술, 학문> 艺术殿堂 2003년 2기
<중국고전무용의 역사발전 및 그 특징> 艺术殿堂 2003년 3기
<중국무용이론 평론 현황 소견> "중국무용 '荷花奖(연화컵)' 이론평론 연구토론회" 2004년
<중국 조선족무용 훈련체계의 이론적 고찰> 북경무용학보 2006년 2기
<무극화방안과 전략> '藝術殿堂' 2007년
<20세기 동아시아무용의 전승과 변형> '한국무용사학' 2010년 11호
<송대악무가 고려에서의 전파 및 변천> 한국 선전학 국제학술회 2010년 2월

< 최승희무용과 관련된 주요 연구논문 >
<최승희와 그의 무용예술> (漢文) "길림예술학원연변분원 학보" 1990. 1,3기
<중국무용에 준 최승희의 영향> (한국 "예술세계" 1993년 1기)
<최승희무용특징에 대한 고찰 1, 2 > (한국 "예술세계" 1993년 5기, 7기)
<최승희무용체계 특징연구>(1) "예술세계" 1993년 2기
<최승희무용실체연구-작품> (2000년 "艺术殿堂"1기)
<최승희무용기존연구반성> (2000년 "艺术殿堂"4기)
<최승희무용“기본”실체연구> (2003년"艺术殿堂"6기)
<최승희무용연구반성> "文化山脉" 2001. 6
<당대조선-한국 초점인물: 저명한 조선민족무용가-최승희> 중국사회과학원 '당대한국'2003
<최승희와 중국무용> 북경무도학원 학보 2005년 4월
<중국무용 현대화에 준 최승희의 영향> 한국 '최승희탄생 100주년 포럼' 2009년 2
<최승희와 동방무용>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무용가 최승희 국제포럼' 2009년 11월
<20세기초 최승희무용예술의 접수와 변용양상> '국제학술회의' 한국무용사학회 2010년 5월
<조선무용 연구성과의 역사적 고찰> '북한연구국제학술회의' 한국무용연구회 2010년 5월
<최승희무용예술 및 당대실천의의> 북경무도학원 '전문가 특별강좌' 2010년 6월 9일 , 연변대학 '전문가 특별강좌' 2010년 7월
<최승희 무용예술의 동아시아적 시각> '중국상해연극대학 무용대학', 한국무용연구회 주최 '국제학술회' 2010년 10월

< 주요 수상 >

논문 <조선민족무용 교과목 체계 개혁의 연구와 실천> 중국 길림성 고등교육기관 교수성과 특급상 2004
<조선민족무용 교과목 체계의 개혁과 연구> 중국 국가교육부 교수성과상 은상 및 省 특급상 2005
중국무용 최고 전문가상 <荷花獎(연꽃컵)> 연구논문 은상 2005
중국 연변대학 특급교수상 2006
제9차 길림성 특수공헌 청년 전문가상 2006
중국 길림성 제2차 창조적인재상 2007
교육부 고등교육기관 예술부분 음악, 무용교수 지도위원회 위원 명예 칭호 수여 2007

< 연구과제 >
중국 <예술과학>중점과제: <조선민족예술문화연구> 등


 

 │추모의 글

무용을 향한 스승의 집념
 


중국 연변대학교 예술대학교 강사 박 해영

2011년8월30일, 조선민족무용의 발전을 주도하고 있는 중, 조, 한 3국을 중심으로 최승희선생100돐 탄생기념활동을 열렬하게 추진하고 있을 무렵, 저희는 평생을 최승희 무용예술과 더불어 살아오신, 또한 전반 조선민족무용의 발전만을 위하여 심신을 바쳐 오신 이애순선생님을 영원히 보내드려야 하는 비통과 아픔을 겪게 되였습니다.

1999 년, 박사학위 논문을 계기로 시작된 이애순선생님의 최승희 무용예술연구는 그 분의 예술연구생애에서의 새로운 발자국 이였고 저서<최승희 무용예술연구>는 중, 조, 한 무용학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 연구 령역을 넓혀가게 된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1년11월30일-12월1일, 국제고려학회, 문화예술분회, 연변대학교 예술연구소의 주최로 연길에서 열린 <제1차 최승희 무용예술국제학술회의>(이애순선생님께서 사회를 진행) 를 발단으로 최승희 무용예술은 본격적으로 그 연구범위가 국제적으로 확대되면서 중, 조, 한 3국의 조선민족무용의 발전을 위한 교류도 빈번히 이어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고 지난 8월3일, 연길에서 열린 <당대 조선족무용 발전 론단>학술회의는 이애순선생님께서 3년 남짓이 계획을 하시고 추진하신 전국적인 학술활동 이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친히 사회를 보셨고 학술회의는 중국유명학자들의 인정과 과찬을 받았습니다. 너무 아쉬운것은 <최승희 무용예술 및 당대실천의의>이라는 론문의 발표가 이애순선생님의 연구생애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였습니다.

중국 무용예술 령역에서 첫 박사로 인정을 받은 이애순선생님의 30여년의 학술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최승희 무용예술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당시 력사적인 원인으로 하여 최승희 예술행적 및 업적이 오래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매몰 되여 있는 상황에서 펼쳐낸 저서 <최승희무용예술연구>는 바로 이런 공백을 메우는 학술저서로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최승희의 생평,세계관과 예술활동에 대한 총체적이고 계통적인 연구에서 출발하여 무용실천의 본체에로 접근하였으며 나아가서는 민족무용에의 삼원전파, 동방무용에로의 다원전파 등의 연구 면을 확대함으로써 학술적인 큰 의의를 가졌고 론문 집필과정에서 중국각지와 한국, 조선을 여러번 다녀오시면서 많은 미공개자료들을 발굴하는 등 자료적인 돌파를 가져옴과 동시에 많은 학자들의 연구에 유익한 연구 자료를 제공 할수 있었던 점에서 더욱 큰 의의를 지니지 않았을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서의 서문에서 원 연변대학교 총장이시며 이애순선생님의 지도교수였던 정판룡 교수님께서는 <리애순은 연박한 지식과 과학적인 방법론, 두려움 없이 진리를 탐구하는 학술정신과 진취정신, 그리고 비상한 의력과 분투정신을 가진 젊은 학자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끝내 학술고봉에 돞아오르고야 마는 승리자로 되였으며 학술상의 진정한 강자로 되였다. 나는 리애순과 같은 제자가 있는 것으로 하여 무한한 자호감을 느낀다.>라고 평가를 해주셨답니다.

학자로서의 이애순선생님은 학술을 위한 일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 하셨고 정당한 주장이라면 한 치의 양보도 하시지 않는 강인한 성격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쌓으신 연구들을 모아 보면 주로 최승희 무용예술 관련연구, 무용사연구, 인물연구, 비교연구 등으로 분류를 할수 있습니다. 최승희 무용예술 관련연구에서는 주로 기본실체, 창작실체. 리론 실체에 대한 계승과 창조, 그리고 무용본체의 문화적 함의에 대하여 총체적이고 계통적인 연구를 진행하여 왔습니다. 인물연구는 주로 최승희론, 중국조선민족무용발전의 선구자이시며 중국조선민족무용교육의 정초자로 불리 우는 조득현 론, 박용원 론 등을 들 수가 있겠고 무용사연구는 조선민족예술문화연구, 중국조선족무용사 등을 들수 있으며 비교연구는 中,朝,韓 조선민족무용발전실태에 관한 비교연구, 중한고전무용비교연구 등으로 들 수 있겠습니다. 연구에 있어서 이애순선생님께서는 넓은 시각과 다양한 방법론의 응용을 많이 강조하셨고 그 또한 그분의 론문과 연구성과 들에서 명확히 체현이 되였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선생님께서는 넓은 시각과 방법론의 응용은 보다 전면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고 보다 공정한 평가를 내리기 위한 것이라고 자신의 초기연구로부터 줄곧 한 번도 이 점에 홀시 한 적이 없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육자로서의 이애순선생님은 제자들한테 항상 엄격히 요구를 하셨고 또한 제자들 앞에서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보이신 적이 없는 분이셨습니다. 하여 제자들은 선생님을 마주 할 때면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는 긴장감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을 존경하고 선생님을 많이 좋아하였습니다. 특히 저는 선생님의 수제자라는 이유로 저한테는 엄격하셨습니다. 13살에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여 춤만 배워오던 저한테 제자로 인정하시고 리론 지식을 하나하나 가르치면서 어처구니없는 일들도 여러 번 발생하였고 저 또한 힘든 리론 공부를 접수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선생님께서는 한 번도 포기를 하시지 않고 저를 이끌어주셨습니다 . 그러한 반면에 선생님께서는 겉으로는 엄격한 모습만 보여주셨지만 마음은 뜨거운 분이셨습니다. 제자들의 자그마한 성과에도 동료들과 그 기쁨을 함께 나누시면서 내내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셨고 건강이 악화된 상황에서도 제자들의 론문 들을 꼼꼼히 지도하셨으며 새로운 자료들을 내내 제공해 주시 군 하면서 보다 많은 지식을 제자들한테 전수하려고 노력을 하셨습니다.

지난 8월3일, 연길에서 진행한 <당대 조선족 무용발전 론단>학술행사가 선생님의 마지막 발걸음이 되실 줄은......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강인한 의력으로 그동안 몇 차례의 힘든 수술과 방사선치료를 받으 시면서도 견뎌 오신걸 보면서 선생님한테는 운명의 기적이 생길 줄만 알았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무서운 병마 앞에서는 선생님께서도 어쩔 수 없으셨나 봅니다. 운명하시기 전 며칠간,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그동안 쌓아온 연구들을 정리하시려고 하면서 앞으로의 연구방향에 대하여서도 제시를 주셨습니다. 그 하나는 그동안의 연구성과들을 모아서 논문집을 출판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최승희 무용예술 실체 중 작품실체, 기본실체, 리론실체를 계승, 발전함에 있어서 더한층 연구에서의 비약을 가져오려면 최승희 선생님의 무용예술시각을 예술무용, 민족무용에만 국한 시킬 것이 아니라 동아시각으로 확대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마지막으로 발표를 하신 <최승희 무용예술 및 당대 실천의의>론문이 선생님께서 최승희 무용예술의 발전맥락을 재차 짚어보면서 총화하신 결론인 듯 싶습니다. 최승희先生의 예술관은 일본에서 배운 현대무용으로 시작 되여 본토의 민족무용으로 , 동방발레를 창조하려는 추구에서 남방무용과 동방의 중심지인 중국무용 등을 흡수하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최승희선생의 세기를 뛰여 넘은 의식이라면 바로 일본의 색, 중국의 형, 조선의 선을 갖춘, 또한 조선-한국, 중국, 일본의 융합일체의 예술실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라 의식을 하셨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예술실체를 실현하려면 반드시 넓은 시각을 갖추고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과학 등을 포섭하면서 다양한 방법론을 섭취하여야 한다고 재차 강조하셨습니다.

지난 8월30일 운명하시기 두시간전, 제가 선생님의 얼굴을 본 마지막 모습 이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마지막까지도 흐트러짐이 없이 고우셨습니다. 그리고 학술을 얘기하시면서 눈에서는 반짝반짝 빛을 보이셨습니다. 학술의 힘이 선생님한테는 모든 고통과 통증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동력 이였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자료들을 정리하면서 평생을 최승희先生과 한 몸으로 사셨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연구에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투입을 하셨고 최승희 무용예술이 오늘날까지 널리 계승이 되고 연구가 이루어 질수 있는 데는 이애순선생님의 피와 땀, 그리고 그 정신이 동반이 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최승희 무용예술연구 즉 조선민족무용의 발전에 지워 버릴 수 없는 공헌을 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더 한층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떠나셨습니다. 많은 연구업적과 또 많은 연구과제들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유언에 좇아 명년 8월, 1주년을 기념하면서 이애순선생님의 론문집을 출판을 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남기고 가신 서적과 연구 자료들을 정리를 하여 학교에 기증을 하여 모든 학자님들과 공유를 하면서 연구 자료로 널리 씌여 지기를 선생님께서도 바랐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감사의 글

이 애순 교수 부군 진 철수


오늘 최승희탄생 100주년 기념활동에 참석하게 된데 대하여 저한테는 큰 영광으로 생각 합니다. 그것 또한 이애순선생이 최승희를 생전에 연구했었기 때문에, 원래 이 자리를 더 크게 빚내자면 남편으로서 제가 생전에 더 잘 보살펴드리고 몇 달만 더 견더냈더라도 그는 오늘 꼭 이 자리에서 섰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최승희연구가 그의 일생의 전부라고 말하면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초청해주신 장광열교수님, 그리고 지인 여러분께 가족을 대표하여 충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여러분들이 생전에 학술적으로 많은 지지와 성원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이애순선생의 연구가 없었을 것이고 병마에 시달리던 대부분 시간들은 한국에 머무르는 기간 이였기에 여러 지인들의 물심양력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마지막 한국과 중국을 오가면서 16차례 진행한 학술생애가 없었을 것이고 또한 사형선고를 받은 후 3년 8개월을 지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학술연구에서는 국학 자료원 선생님들, 연구실을 제공하신 정재연구원, 그리고 여러대학 동문교수분들과 한국무용방면에 여러 무용학회 등, 치료에서는 연세대 세브란스 교수님들, 정신적으로는 김영숙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선생님들, 그이 한테는 큰힘이 되었고 병마와 싸우는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최승희 연구는 1989년 중국 예술연구원에서 석사과정을 할때에 우연이 재료 수집중 51년에 출판한 고예문의 (조선무용가 최승희>란 소책자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94년한 KBS해외 동포 상을 받으신 연변대 총장 정판룡 교수님의 문학박사에 입문하면서 박사 론문을 최승희 무용예술연구로 인정해주신 은사님의 그 넓은 한양이 그로서 후에 심도 깊은 최승희연구를 진행하게된 큰 계기로 되였습니다. 그는 생전에 남긴 글에 < 은사 고 정판룡 교수님으로부터 조선족예술분야에서 처음으로 되는 중국무용계의 첫 박사연구생으로 선정되어 제자호적에 입적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언 십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직업인 더우기는 은사님의 기대가 있었기에 어깨에 넘쳐나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힘겹게 걸어왔고 오늘도 열심히 정진하고있다. >

그는 또 학교 학부장에게 보낸 메일에서 《원래 이번 학기에 제 시간에 학교에 가려했는데 아직은 끈은 놓고 잇지 않다만 전혀 방도가 없으면 이렇게 휴식을 잘 하는것도 점점 나빠만 지는데 아예 모든 치료를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내 할 일을 하고 싶소.》 그는 3년전부터 계획해 오던《당대 조선족 무용발전 론단>개최가 임박했기 때문에 비행기편으로 연변에 도착한 즉시로 두만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요양원에 향했습니다. 자기도 병이 차도가 없고 하루하루가 못해지는 것이 알렸기에 7월8일 아들 잔치를 급히 치루고 요양원 원장들과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저녁 늦게까지 론문심사와 행사준비에 착수 하였습니다. 밤낮으로 되는 피로와 로고에 끝내 27일에 복수 가 왔었고 그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 하고 전간이식 하는데 동의 했습니다. 그것도 이번 행사가 끝난 뒤로 천진에 갈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8월3일 행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집으로 행했고 그로부터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뜻 깊은 최승희 탄생100주년 기념행사에 이애순선생의 추모도 같이 해주신 여러 선생님께 대단히 고맙다는 인사를 재차 올리면서 앞으로 최승희 연구가 삼국에서 더욱 활발이 전개되기를 미리 축복을 드립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위 내용은 한국춤비평가협회와 한국춤정책연구소가 공동 주관하는 2011년 포럼의 자료로 승인 없이 인용 및 복제할 수 없음. 국제학술포럼 발제문은 '춤웹진 제29호 학술-포럼'란을 참조.

2012.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