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현장

한국춤비평가협회 4개국 국제 포럼 : 다시 최승희를 본다 (1)
영상으로 만나는 최승희, 초청 강연

한국춤비평가협회는 무용가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국, 중국, 일본, 미국의 관련 인사들이 참여, 학술포럼, 강연, 추모 모임, 감상회, 대화 모임, 축하연 등을 통해 예술가 최승희를 다각도로 조명하는 국제 포럼을 마련하였다.

■ 일시: 2011년 11월 18일(금) 11시- 20시
■ 장소: 한국-예술가의 집(다목적홀, 영상감상실, 세미나실)
■ 주최: 한국춤비평가협회
■ 후원: LIG문화재단, 한국춤정책연구소
■ 협력: 국립예술자료원

 

 

 


 

 


□ 영상으로 만나는 최승희


최승희 주연 영화 <사도성의 이야기>
최승희 <조선민족무용기본>
아리랑 TV제작
탄생 90주년 <최승희 무용축제 실황>
<세기의 무희 최승희> (제작 및 해설: 정수웅, 영상 다큐멘타리 작가)

 

 

 


2011. 11. 18. 11:00-16:00
대학로 예술가의 집 1층 영상자료감상실

 

 

 


□ 초청 강연

최승희 탄생 100주년 일본전에 부쳐


하정웅 _ 광주시립미술관 명예관장
(조선대학교미술학명예박사)


세계의 문화예술인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반도의 무희>로 불린 무용가 최승희 여사의 생애는 조선과 일본 역사에 휘둘린 비극의, 그리고 전설의 무희이다. 최승희(1911.11.24~1968.8.8)는 조선이 낳은 세계무용사상 유일무이한 꽃이었으며, 동양의 마음을 춤으로 표현한 혁신적이면서 유니크한 천재무용가였다.
올해는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여사와 관계된 많은 이벤트가 국제 각 도시에서 계획되고 있다.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 콜렉션 특별기획전 <불꽃처럼 바람처럼, 최승희 탄생 100주년 기념전>(2011.4.7~8.21)을 개최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 전시는 일본순회전으로서 10월을 최승희 달로 정하고 한국문화원, 재일한국역사자료관 공동주최로 개최(2011.10.18~10.28)하게 되었다.



― 기록사진수집―


가혹한 한국 역사 속에서 어떻게 세계에 기록될만한 예술의 경지를 개척했는가, 새로운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추구한 여사의 족적은 드라마틱하며, 많은 베일에 싸여있다. 전통적, 민족적 무용과 모던댄스를 믹스한 창작무용을 발표한 세기의 무용가의 기록사진(35mm포지와 네가)을, 최승희연구가 정병호선생이 수집한 것을 1999년, 나는 수집했다.
1997년 문예협회강좌(재일한국인문화예술협회주최)에 선생을 초청하여 <최승희의 예술과 생애>에 대한 강연을 부탁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선생이 수집한 최승희 관련 슬라이드 필름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 방대한 슬라이드를 본 후에 <선생님, 이 필름을 양도해 줄수 없겠습니까? 저의 기념실이 있는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최승희의 족적을 판넬하여 전시하고 싶습니다>라고 신청했다. 그러나 선생은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인지, 그때는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후, 1999년 백향주무용공연 때 부인과 함께 일본을 방문했다는 연락이 있어 동경에서 만나게 되었다. 거기서 <최승희의 존재와 족적을 알리고 싶다는 하선생의 말씀의 의도와 취지를 알았다. 수집한 필름을 선생에게 양도하겠다>라고 하셨다. 나는 잊어버리고 있던 일이 생각지도 못하게 이루어지게 되어 선생의 이해에 감사하며 기뻤다.



― 무희, 최승희 사진전 ―


이 기록사진은 70~80년전의 것으로 당시의 여사를 기록한 얼마 안되는 귀중한 것이다. 이 필름을 인화지에 프린트하여 작품화, 광주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그리고 <무희, 최승희사진전(2002.8.1~10.20)>을 개최했다.
이 전시회를 본 동경도정원미술관학예과장 요꼬에 후미노리씨는 이렇게 평했다.
“전시회장에 들어가자 압도되었다. 최승희의 육체가 우주를 춤추고, 그 표현력이 쉽지 않은 것을 순간에 느낄수 있었다. 그녀의 균형잡힌 육체, 거기서 분출되는 약동적인 리듬은 보는 사람을 최승희 춤의 세계로 유혹했다”
1935년경, 최승희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고, 은사 이시이 바쿠는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보통 사람의 2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고 했고, 가와바카 야스나리는 ‘다른 누구를 일본 제일이라고 하기 보다는 최승희를 일본 제일이라고 하는 게 쉽다. 우선, 훌륭한 육체이다. 그녀의 춤의 크기이다. 힘이다. 더욱이 가장 춤추기 왕성한 나이이다. 또한 그녀 한사람에게서 분명한 민족의 냄새가 있다’고 쓰고 있다.
문자만으로는 상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실감하지는 못한다. 사실, 그것은 영상을 통해 여실히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최승희의 존재의 중요성은 그보다는 더욱 높은 차원에 있으며, 실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걸어온 것을 가르쳐 주었다.”



― 명예와 자존을 위해 ―


2003년 2월 9일, 조선중앙통신이 “조국의 광복과 부강한 영광을 위해 성스런 위업을 다한 22인 열사의 유해가 애국열사능에 새롭게 안치되었다”고 하여 생사불명이었던 최승희의 이름을 전했다. 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위원장, 그리고 인민배우라는 글과 함께 <1911년 11월 14일생, 1969년 8월 8일 몰>이라고 애국열사능의 최승희묘비에 기록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때까지는 숙청설이 떠돌았지만 수수께끼였다. 그렇지만 최승희가 북한에서 34년만에 명예회복되고, 여사는 동아시아에서 재평가가 진행되며 내외에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승희의 이름은 나의 고향인 아키타에서도 알려져 있으며, 나 자신 어릴적부터 자랑스럽게 듣고 자랐다. 그것은 최승희가 아키타줄신의 이시이 바쿠 문하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1939년(내가 태어난 해) 6월 24일 아키타시에서 도미고별공연, 다음해 1940년 8월 16일에는 귀조공연이 열렸고, 그 기억은 아키타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승희의 해방(종전)후를 둘러싼 에피소드는 동서냉전, 한일, 한일과의 역사적인 관계로 운명이 왜곡되고 비극으로 채색되었다. 불행한 역사에 휘말린 그 모습은 재일교포로 살아가는 나는 공감과 슬픈심정을 품지 않을수 없는 애틋한 인물의 한 사람이다. 그녀의 명예를 위해, 자긍을 위해서도 그녀가 살았던 시대와 그 족적을 검증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동시대를 산 우리들의 명예와 자존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 <장고춤> 그림 ―


최승희에 관해서는 일본의 저명한 문인, 화가, 조각가가 기록한 회고록이 많이 남아있다. 이 사진전에 이르기까지 최승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일교포’의 마음의 궤적이나 동기의 일단을 읆는다.
지금부터 40년전(1960년대)의 일인데 나는 회가가 되려는 청운의 뜻을 품고 붓을 잡고 있었다. 그즈음 사이타마현 오오미야시(현재 사이타마시) 미야마치에 산수원이라는 고기집이 오픈했고, 나는 그것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받았다. 가게는 한국풍 인테리어로 장식되었다. 가게주인인 임청철(고인)씨가 “하선생, 이 가게에 그림이 한 장도 없어 허전하다. 무언가 민족적인 분위기의 그림을 그려줄수 없겠는가” 해서 부탁했다. 당시 고기집에서 유화를 걸어놓는 것은 드문일이었으며, 무명의 나에게 의뢰한데는 더욱 놀랐다. 나는 그 때 조선화보에 실렸던 최승희의 사진에서 <장고춤>을 그려줄 것을 약속했다. 10호 작품을 완성했을 즈음, 임씨는 매우 맘에 들었던 듯 “5만엥의 그림값을 지불하고 싶지만 개점한 직후라서 3만엥으로 이해해달라”고 하여 3만엥을 줬다. 당시 내 월 수입은 1만엥, 더욱이 무명의 나에겐 파격적인 그림값이었다. 그래서 더욱 공부하여 장래에 이름있는 화가가 되라는 격려를 받고, 그 마음씀씀이를 고맙게 생각했다. 나를 인정해준 그 기쁨은 내게 큰 힘이 되었다.



― 회화 콜렉션 ―


나의 수집품 가운데는 최승희를 그린 유화 2점과 판화가 있다. 나는 신오오쿠보역 근처에 있는 ‘치롤’이라는 가라오케 스낵에서 잘 놀았다. 마마는 존경하는 백옥선씨. 20수년전(1980년대후반)의 일이다. ‘치롤’가게의 벽면에 한 장의 그림이 무작위로 걸려 있었다. 담배연기로 찌들은 것인지 조금 더러웠고, 조명이 있는 가게에서 그 그림은 잘 보이지 않았다.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지만, 어느날 가까이서 보았다. 저고리를 입고 장고를 맨 상반신의 무희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10호의 유화로 1960년대에 내가 그린 최승희의 <장고춤>과 구도(내 그림은 전신그림)와 비슷했다.
“백씨, 이 그림을 저에게 주세요”라고 부탁하자 “네 그러세요”라고 하여 간단히 승낙했다. 더러움을 제거하고 사인을 보았는데, 한글로 ‘김창덕 1967’이라 쓰여있었다. 그것은 1960년대 초, 내가 소속했던 문예동(재일조선문예예술가동맹)의 미술부장 김창덕(일본명, 다카하시 스스무 1910~1983)이 최승희의 <장고춤>을 그린 작품이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매우 진한 인연을 느낀 그림과의 만남이었다.  

또 한 장의 유화는 송영옥(1917~1999)의 작품이다. 작년, 백내장으로 고생한 송영옥은 딸과 함께 내 집을 자주 방문했다. 수술이 성공하여 건강해졌다고 기뻐하며 가져온 것이 최승희의 <장고춤>(1981년작)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김창적의 <장고춤> 구도와 비슷했다. 어느 쪽도 상반신의 장고춤을 그린 것이지만, 얼굴방향이 좌우로 달라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구도였다. 최승희를 마음에 담고 동경하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일 것이다. 송영옥의 무겁게 가라앉은 화풍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화려한 세계이며 구원받는 듯한 작품이었다.
판화는 마츠다(1898~1941, 본명 마사오)의 1940년작, <승무>와 <검무> 2점이다. 선전에 참여하게 되어 제전, 문전에도 출품했다. 강서쌍영총벽화 모사가 이루어지고, 국민총력조선미술협회이사가 되었다. 선전초기 이래의 작가이다.
이 당시 칭찬을 받았던 최승희를 야스이, 고기시, 우메하라, 토고우, 아리시마, 마츠무라 등이 경쟁하여 그림을 그렸다. 마츠다도 최승희를 모델로 하여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판단한 나는 이 그림을 수집했다.
사진은 기무라(1901~1974), 호리노(1907~2000), 와타베(1907~), 쿠리하라(1913~2007), 요시다가 남아있다.
조각작품은 후지이(1882~1958)의 <최씨보살> 그1과 그1의 동상이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멕시코 여행 ―


나는 시케이로스와 교류가 있던 기타가와의 그림을 좋아했다. 1998년, 나는 아내와 멕시코여행을 떠났다. 고대 멕시코문명, 아스테가•마야문명의 유적에 흥미가 있었지만 기타가와의 화풍에 영향을 끼친 시케이로스의 벽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장 시케이로스는 1913년 맥시코혁명에 참가했다. 유럽 현대미술과 멕시코의 토속적인 전통을 결합한 국민(민족)적 예술을 주장하여 힘있는 사회적 표현을 한 멕시코 화가이다.
멕시코 시티의 아라메다 공원 동쪽 끝에 있는 국립예술관을 방문했다. 흰대리석 건물 외관은 네오 클래식과 아르누보, 내부는 아르데코 양식을 절충한 양식으로 1934년에 완성한 것이다. 2층과 3층 벽면에 있는 시케이로스의 거대하며 힘있는 작품과 만났을 때 숨막힐듯한 감동을 받았다. 거기에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화가, 타마요, 리베라, 오로스로 등의 작품도 전시되어있어 생각지도 않던 작품과의 만남을 기뻐했다.
안내해준 미술원의 학예원에게 나는 일본에서 온 한국인이라고 인사하자 “이 건물에는 3500명 수용의 극장이 있다. 1940년에는 최승희 공연이 있었다”고 소개했다. 그때 시공을 초월하여 고전적이며 현란한 그 극장에서 민족의 춤을 추고 있는 최승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뜨것운 것이 올라왔다. 타국의 멕시코인이 최승희를 알고 있다. 잊지 않고 기억해주고 있던 것만으로도 감격하고 말았다. 멕시코 여행은 뜻하지 않게 최승희의 족적을 방문하는 인상 깊은 여행이 되었다.



― 조선민족무용기본―


최승희 저 <조선민족무용기본>(1958년 평양조선예술출판사간행)에 기록된 글에서 여사의 인격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조선무용예술도 오늘날, 세계무용예술의 최고봉에 설 수 있는 영광을 보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선조가 남겨놓은 아름다운 무용예술을 계승하여 세계무용예술에서 가치있는 것을 널리 받아들여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으로 우리는 조선무용예술의 신시대를 열 수 있다고 나는 보고 있다.”
여기서 발표하는 무용기본들은 내가 30여년간 무용생활을 하면서 우리 무용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아내고, 약한 것은 강하게, 없는 것은 상상함으로써 우리 조선무용예술의 부흥을 가져오고자 염원하여 만들어 본 것이다.
자랑스러운 우리 인민들은 내가 이 기본을 만드는데 있어서도 훌륭한 교사였으며, 또한 세계인민은 훌륭한 방조자였다.
나는 우리나라 방방곡곡과 전 세계 수십 개 나라들을 다니며 광대한 인민들 속에서 무진장한 무용의 보물고를 보았으며 나는 그것을 마음껏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발표되는 무용기본이 우리나라 무용예술의 보다 찬란한 앞날을 위하여, 나아가서는 세계 무용예술의 큰 발전과 다양성을 위해 조금이라도 기여하게 된다면 우리들의 크나큰 행복이 될 것이다.”
양반의 고귀한 자존심, 천재적인 문학, 음악의 천혜가 빛난다. 예술지상주의자 정치와 예술의 분리론자, 동양무용론자로서의 강고한 사상이 근저에 있다. 한국무용의 기본동작을 만들어 정하고 한국의 근대무용과 현대무용을 결합하여 조선의 전통에 구속되지 않는 이상과 방법으로 새로운 무용예술을 창조하여 확립한 근저가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 예술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다 ―


화려한 무용의 뒤에는 피를 흘리는 수련과 정진이 있다. 최승희 춤에는 기쁨속에도 일말의 애수가 서려있다. 거기에는 조선민족의 냄새와 생활감정이 나타난다. 낡은 것을 새롭게하고 약한것을 강하게 하며, 멸한 것을 되살리고, 동양의 위대한 민족성을 한층 자랑스럽게 생생한 숨결을 과시하고 있다.
예술은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다. 최승희는 세계적인 예술가임을 재확인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의미있는 일이다. 최승희의 세계동포주의를 이해하고, 식민지시대라는 고난의 시대를 살았던 조선인의 자존심을 높인 여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
최승희 예술활동의 족적과 여사가 살았던 시대와 민족사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다.
최승희 예술에는 미래에 계승해나가야 항 민족적인 정신과 지표가 있다. 재일교포로 살고 있는 나의 지표는 세월에 밀리지 않고 이를 뛰어넘은 여사의 자존심과 긍지가 동경이었기 때문이다.
한입합방으로부터 101년, 성찰과 반성, 회고하는 이 기념전이 여사의 족적연구와 현장을 촉진하고, 최승희를 모르는 젊은이들의 미래에 자랑과 꿈을 심어주는 장이 되었으면 하고 염원한다. 

 


위 내용은 한국춤비평가협회와 한국춤정책연구소가 공동 주관하는 2011년 포럼의 자료로 승인 없이 인용 및 복제할 수 없음. 국제학술포럼 발제문은 '춤웹진 제29호 학술-포럼'란을 참조.

2012. 01.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