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홍신자의 춤인생 40년 기념 공연 〈네개의 벽〉
개념에서 벗어난 휴식 – 벽에서 나온 ‘춤’
이지현_춤비평가

 이 춤은 이런 설명과 함께 시작된다.
 
“순도, 이수도 지나 망백이 되니 시력의 한계로 년수를 세는 버릇이 생겨 깨알 같은 활자보다는 화집누보 인물첩을 손쉽게 펼쳐 보게 되는데, 그 중 홍신자의 작품집인 <입에서 꼬리까지>는 육신의 언어로 된 인간탐구와 수도의 길을 보는 듯한 보람을 느껴서 책상 앞에 가까이 두고 있다. 더구나 1973년 가을 서울에서 공연된 홍신자의 데뷔작 ‘제례Mourning’는 500년 유교 사회의 고루한 껍질을 벗겨 역사의 시간을 각인한 한반도 전위무용의 규범이 될 만 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74세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번 40주년 기념공연에서 새롭게 선보일 ‘아리아드네의 실’이란 작품을 기대하며 역사적 시간의 뜻을 다시 한번 환기시켜 주었으면 싶다.” (2013년 6월 예술평론가 박용구- 홍신자 춤인생 40년 기념공연 프로그램 인사말 중에서 전문)

 올해 100세를 맞으시는 박용구 선생님은 글에 써있듯이 1973년 수행으로부터 돌아 온 홍신자의 춤 <제례>를 보시고 “500년 유교 사회의 고루한 껍질을 벗겨 역사의 시간을 각인한 한반도 전위무용의 규범”이라고 평가하고 증언하셨다. 


 100, 1973, 40, 500, 74 그리고 역사의 시간을 각인하고 환기하라….
 ’망백(望百-백살을 바라봄, 보통은 91세를 뜻함)이라고 쓰셨으나 100세의 비평가가 1973년 첫공연을 기점으로 ‘춤인생 40년’공연을 하는 홍신자씨에게 그때의 춤이 500년 유교사회의 고루한 껍질을 벗겼으니 다시 신작으로 역사적 시간의 뜻을 환기시키길 바라신다.
 나는 하나의 춤에 이렇게 많은 시간의 켜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버릇처럼 시간과 공간의 틀을 신봉하는 습성에 젖은 이 몸으로 그 춤을 만나기 전에 난 이미 시간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헛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나는 요즘 내가 기억하기에 내가 산 세월도 결코 적은 양이 아니라는 것을 시시각각 감지하면서 지낸다. 그렇지만, 그래 봤자, 난 박용구선생님의 반 밖에 안되는 이제 겨우 50에 불과하다. 그렇게 밖에 안된 나의 몸이 상상되지 않는 이 숫자들 앞에서 현기증을 동반한 헛구역질을 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네개의 벽 (Four Walls)>은 1944년 초연된 존 케이지의 무반주 피아노 솔로를 위한 곡이다. 초반 8개의 신(7개의 신이지만 3번째 신은 무음으로 2분 39초 진행되고, 4번째 신은 춤을 위한 반주로 되어 있다) 이 1악장, 9번째 신에서 15번째 신까지의 7개의 신이 2악장으로 구성된 약 1시간 정도의 길이로 - 머스 커닝햄에 의해 개념화된 어떤 한 가족의 사이코드라마를 담고 있는 - 공연작품을 위해 작곡된 곡이다. 이 작품은 소리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흰 건반만 사용하도록 작곡되었으며 그렇게 많은 기량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단 한번의 공연으로 끝난 1944년 초연공연에서는 케이지나 커닝햄조차도 몰랐을 정도의 무명 피아니스트에게 연주가 맡겨졌으며 이런 모든 상황이 모아져 이 피아노곡은 중간중간의 침묵의 시간과 단순하게 변주되는 집요한 리듬으로 신비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고 무언가를 연상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작품이 되었다. 홍신자씨는 1985년 댄스 드라마 형식으로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 공연했으며, 27년만인 2012년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존 케이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공연하였다. 아쉽게도 난 그때는 공연을 보지 못하였다.
 홍신자의 <네개의 벽>은 무대는 어둠이고 작은 불빛만으로 피아노 연주(마사미 타다)가 시작된 뒤 조심스럽게 들어온 조명 앞에 앉은 홍신자가 몸에 붙은 무엇인가를 떼어내는 손짓과 표정으로 부터 시작된다. 프로그램의 설명에 의하면 이 댄스 드라마는 “1부는 길을 찾지 못해하는 방황, 2부는 희망의 빛을 따라 찾아 나와 종국에는 자유의 축제에 이르러 환희를 드러낸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존 케이지의 성향상 4개의 벽이란 제목은 동양의 고사성어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면초가’에서 차용한 듯하고 이 곡을 작곡한 당시 33세인 존 케이지가 정신분석가로의 전향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고 하니 벽에 갇힌 심리와 그것을 극복해낸 것을 담고 있는 작품을 가지고 홍신자가 새롭게 해석하여 댄스드라마로 재탄생 시킨 작품이다.

 



 무대가 다시 어두워지면 등받이가 없는 단순한 스툴의자 하나를 어깨에 메고 들어 와 그 위에서 두 다리를 모아 펴거나 다리의 기둥을 발바닥으로 감지하면서 올라 낮거나 올라 앉아 엉덩이만으로 체중을 지탱한 채 팔 다리를 모두 사선으로 쭉 편 채 들고 있는 동작들, 혹은 엎드려 배 만 의자에 댄 채 팔, 다리를 들어올린 동작으로 춤은 진행된다. 어느 덧 음악은 리듬이 피아니스트의 엉덩이를 들었다 놔야 할 만큼 강해지고 심리적 드라마는 고조를 향해 달려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모든 진행은 시간이 흐를수록 묘한 세계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일단은 케이지의 음악은 리듬이 거칠더라도, 건반이 부서질 정도가 되더라도, 그것이 단순하게 고조되는 것이 아니라 묘한 긴장감과 복합적인 감정적 톤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공기 중에 만들어 놓는다. 그것은 이미 음들의 조합이 기존의 관습에서 완전히 벗어난 어떤 지점에 있으며, 그에 의해 통찰되고 발견되어져 전혀 다른 감각을 자극하고 지각되는 소리가 되어 우리 앞에 놓인다. 그 위에 홍신자의 춤 역시 우리가 춤이라고 알고 있는 리듬과 속도, 힘의 배합을 훌쩍 벗어나 무(舞)라 하기에는 무위(無爲)이고, 무위라 하기에는 무(無)가 되어버린 언어로는 감지 될 수 없는 지점의 춤을 섞어 놓는다.

 



 그 공연에서 나의 몸은 오랜만에 개념에서 벗어난, 관습에서 벗어난 세계가 있음을 알아 차렸고 그 속에서 휴식(休息)하였다. 네개의 벽에 갇혀 있다 빠져 나온 춤이 미로 속에서 하나씩 탈각되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시간의 쳇바퀴 속에서 나의 몸과 정신을 끄집어 내었다. 

2013. 07.
사진제공_E-won Art Factory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