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지난 시간들이 춤에 도달하는 몇 개의 길
메타-기억, 정서, 오브제 그리고 몸
이지현_춤비평가

 인간은 현재의 매 순간을 살아 나가고 그 순간들은 허공 속에 사라진다. 하지만 인간의 몸 속 어딘가에 저장되는 현재에 대한 ‘기억’은 그 순간을 사라지지 않은 명징한 것으로 부여잡게 하거나 그것에 기대어 다시 현실의 순간을 만들어 나가도록 해준다. 그렇게 과거는 기억을 통해 현재를 이어나가게 하는 고리가 되고, 심지어 현재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필터가 되면서 큰 영향력을 갖는다. 그것이 망령이든 추억이든….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기억이 있고 그 기억은 몸에 머문다.

 춤추는 자의 몸은 한 개인 이력(履歷)의 이동식 저장고이자 그 저장된 것들을 언제든지 춤이라는 것으로 길어 올려 쏟아 낼 수 있는 출력기이다. 요즘의 춤에서 눈에 띄게 관찰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관심을 다루는 진지함이다. 언제든 예술은 그런 기능을 해왔음에도 우리의 현대춤에 있어서 한동안은 인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것의 한 부분인 ‘정서’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통찰보다는 ‘정서에의 매몰’에 근거한 춤들이 많았다. 그런 춤들은 초기 현대무용에서는 쉬크한 감성이긴하나 천편일률적이어서 클리쉐가 되어버렸고 결국 현대춤은 그런 정서의 톤에 오랫동안 갇혀있었다. 그런 춤들은 진지함이 아니라 웬지 모호하여 무겁고, 그 모호함 덕에 답답해지게 되는 시절이었다.
 아직도 정서로부터 출발하여 한 발짝도 길을 나서지 못하고 정서로 끝나버리는 춤들이 있고 ‘그것이 춤 아닌가?’ 하는 통념도 있지만, 반갑게도 얼마 전부터 현대춤들이 거기에 머물지 않고 정서적으로는 보다 쿨cool 해지면서 인간의 내면에 대한 본격적인 탐색들을 시작하고 있는 모습이 관찰된다. 그리고 거기서 가장 중요한 고리로 무용수들의 몸, 그들의 기억이 저장된 몸에서 출발하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숨쉬는 껍데기 Ⅰ·Ⅱ〉 댄스컴퍼니 미디우스 이광석 안무 (성균소극장, 2013. 7. 5-7)
 

 이광석은 오랜 시간동안 국내, 외에서 무용수로 화려한 활동 경력을 갖고 있는 40대의 중진 무용수이다. ‘육완순 현대무용 50주년’ 무대에서 이광석은 <숨쉬는 껍데기>를 솔로로 보여주었고 그 도입부분에서의 긴장감과 압도력은 무용수로써의 경륜과 의지가 나이를 추월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으로 각인시켰다. 그는 발레로 다져진 클래식한 정교함에 힙합의 감성을 담을 수도 있는 다양한 변용력을 가졌고 그것은 안무가들에게 상당한 시간과 무대를 안정되게 채워줄 수 있는 신뢰를 갖게 했다. 그리고 이광석은 어느 무대에서나 겸손하게 자신이 할 바를 충실히 해내면서 90년대부터 현재까지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몇 안되는 전천후 무용수이다.
 그런 그가 이번 <숨쉬는 껍데기 Ⅰ• Ⅱ>에서 안무가로써 자신을 실험하고 나섰다. 이 작품은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오랜 시간 동안 부분적으로 발표해 오며 작품을 단계적으로 완성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작품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지난 번 솔로공연과는 달리 자신의 솔로는 도입부분과 말미를 장식하는 정도로 줄이고 5명 무용수들의 춤으로 주로 구성이 되었고 드로잉과정과 텍스트를 영상으로 첨가해 작품의 주제에 보다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채워가고 있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숨쉬는 껍데기’는 인간의 겉모습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는 동시에 껍질이 아닌 그 안쪽으로 들어가 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리플렛에 의하면 그는 공포에 대한 물음을 융의 집단무의식으로 해석하고 그 무의식을 “의식 속에 등장”시키면서 그것을 대면하는 과정뿐 아니라 ‘하나되어 돌아오다’(장면 3-7)와 ‘단단해짐’(에필로그)으로 귀결됨을 보여주고자 한다. 충분히 자전적인 경로를 밝히고 있는 이 작품은 기억으로 시작해 ‘아프고, 쓰리고, 버겁고’(장면 3-1)한 과정을 거쳐 유기되고, 갈등하고, 반성하고, 다시 자신으로 돌아와 그간의 것들을 통합하는 순차적인 경로로 진행된다.


 



 이 작품에서 전반적으로 주목을 끈 것은 그가 이런 주제를 다루는 과정 과정에서 관습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것이라 볼 수 있는 영상과 군무라는 장치들을 자신의 이야기를 담는 그릇으로 작은 부분도 애지중지한 것이 느껴진다. ‘힘겹게 걸어온 길’(프롤로그)에서 무대의 한편에 스크린에 내면을 향한 질문이 텍스트로 쓰여지고 한 남자의 모습을 드로잉 하는 과정이 보인 후에 한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깊은 숨을 쉬는 것으로 응축한다. 이런 과정은 안방스타일의 성균소극장의 작은 무대에서 더욱 고백적인 것으로 진하게 다가온다.
 이어진 장면에서는 가벼운 군무로 기억으로 도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김민경, 홍민진, 김지현, 권우연, 김희중이 보여주는 군무는 경쾌한 리듬으로 유쾌하게 진행된다. 동작은 directional spoke-like movement 로 대부분 몸의 중심에서 뻗어져 나가면서 사지의 관절을 굽히고 펴는 동작으로 간결하면서도 중심 밖으로 흩어지지 않는 야무짐을 보여준다. 이런 동작과 늘어지지 않는 속도, 짧게 rondo 되는 동작 구절에 힘입어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정서적 과잉은 제거되고 춤은 명확해진다.
 뿐만 아니라 연습의 축적이 보이는 듯 매끄럽게 진행되어 춤의 어떤 맛을 통해 충실히 작품에 몰두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무용수들 각자는 동작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 꼼꼼히 동작 속에 자신을 채워 넣었고, 그것은 극장이라는 공간에 깔끔하게 맞아 떨어져 정말 오랜만에 춤을 보면서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젊은 무용수들의 섬세한 연기와 표현이 신선하고 매력적이어서 극의 구조를 담아내는 댄스 씨어터가 아니라 연기력으로 충만한 댄스 씨어터의 가능성은 이렇게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무의 과정에서 장면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설정했으나 각 장면간의 구분이나 형상의 층위는 그 자체의 차이를 잘 전달시키지는 못하였다. 즉, 표현할 것을 정하고 표현하려고 했다는 접근의 성실성은 높게 인정하나 그것을 어떻게 드러낼 것이냐는 앞으로 안무가 이광석의 과제가 될 것이다.
 무용수가 안무가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 댄서로써의 수명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 전이과정에서 본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성공적이기 쉽지 않다. 무용수로써의 강한 이미지 때문에 안무가로써의 기대를 예측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이광석의 경우 오히려 무용수 출신 안무가들이 자신의 춤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을 뛰어넘어 동작에 대한 안무도 본인의 평소에 익숙한 동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필요한 것으로 새롭게 구상하고 섬세하게 계산 한 것으로 보여 높은 충족감을 주었다. 드문 일이다.
 내면을 다룰 때 기억과 정서는 밀접하게 얽혀있고, 게다가 대부분의 감정은 우울함을 동반한 어두운 정서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보통은 기억을 마저 다 챙기기 전에 감정에 빠져 기억은 뭉뚱그려 다뤄지게 된다. 이광석의 경우 약간의 그런 흔적은 보이지만 그 지점은 그가 안무라는 것에 더 깊이 천착하면서 시간을 보낸다면 쉽게 극복 될 것으로 보인다. 현대춤속에서 의외로 이광석 춤의 정서는 그리 무겁거나 우울하지 않다. 게다가 그냥 개인적 감성에 충실해 움직임과 여러 장치들을 다루는 소박함과 섬세함이 일관적으로 보여 희망적이다.


〈개와 그림자〉 국립현대무용단 홍승엽 안무 (CJ토월극장, 2013. 6. 28-30) 


 메타-기억은 기억을 들여다 보는 일이다. 수 많은 저장고 속의 기억들을 혹은 저장된 정보들을 다시 인지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무엇을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하는지, 주로 어떤 방식과 틀로 기억을 만들어 나가는지를 알고 그것을 통제하거나 조절하는 방식을 터득하기 위한 행위이다. 기억을 다루는 방법을 넘어서 바로 얼마 전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와 미국의 MIT가 공동으로 설립한 ‘신경회로유전학센터’ 연구진은 뇌에서 학습과 기억 등을 담당하는 부분인 해마에 가짜 기억을 심는 쥐를 통한 실험(마우스셉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환경과 연결되어 있는 기억에 빛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첨가시켜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그것을 과거의 기억에 통합시키는 것에 대한 성공 보고이다.
 이는 영화 인셉션이나 토탈리콜에서 본, 기억을 심거나 조작하는 일과 심지어 그것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직업이 생겨나는 것이 상상만이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가능해졌음을 알려준다. 동시에 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나중에 다시 모여 그 경험을 나눌 때 우리는 그것이 얼마나 다른 지 알고 놀라워할 때가 많다. 그만큼 기억은 주관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인 틀에 따라 조합되는 산물일 뿐 아니라 그것이 개인에 미치는 영향은 개인의 조건에 따라 더욱 달라져 같은 경험이 긍정적으로 남느냐 부정적으로 남느냐는 얼마든지 개인이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지영역에서의 결론이다.
 요즘 본 기억을 다루는 몇몇 작품들을 보면서 우리 안무가들이 자신과 인간에 대한 통찰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기억이고, 그 기억을 통해 내면의 풍경을 그려내는 일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주제를 다루어 가는 여러 방식이 있지만 보통은 기억이라는 장치보다는 서사적 구조와 정서적 구조 중 하나를 중심으로 택하거나 그 두 가지에 기대어 춤으로 형상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기억으로 접근하는 것은 보다 내면의 심리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그러나 기억을 오래 지켜보고, 끌어 올리고,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의식을 넘어서는 일이 되기도 하고, 깊은 감정과 만나는 일로 많은 집중과 마음의 힘을 요구하는 작업이기에 쉬운 일은 아니다.


 



 국립현대무용단의 <개와 그림자>는 홍승엽 예술감독이 3년 임기를 마무리 하면서 올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먹이를 문 개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것마저 탐내다가 입에 문 것마저 놓친다는 우화의 상상력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내면을 통찰하는 것으로 확장된 작품이다. 그리고 그것의 출발점을 기억으로 잡는다. 무대 뒤편의 솜털이 들어 있는 투명 아크릴 상자들이 전면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첫장면에서, 기억은 그것의 무중량감을 표현한 오브제들- 깃털, 탁구공, 솜털-이 들어 있는 투명한 아크릴 상자들로 뒷벽에 쌓여있다. 그리고 이어 기억은 편린으로 무대에 산재(散在)되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깃털을 입으로 불어 올리면서 등을 바닥에 대고 발로 밀며 무대를 횡단하는 작은 소요가 일어나는 가운데, 여자와 빨간 구두, 탁구공으로 거북이가 알을 낳는 장면에 대한 기억이 지나가고 조각난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았던 순간처럼 반짝이나 거대해지고 왜곡된 낯선 모습에 대한 기억이 LED등으로 치장된 모습으로 무대의 한 켠을 스친다. 그 후 “거울과 사진, 벽 등을 상징하는” 키높이의 정사각형 검은 판들은 기억으로부터 나왔으나 춤의 오브제가 되어 무용수들이 끌거나 밀면서 가림막을 만들고 해체하고, 벽을 타고 오르며 검은 판 밑의 공기를 압축하고 빼내면서 체중이 떠오르는 느낌의 장면들이 이어진다. 기억의 상자들이 무너지고, 한때는 존재를 지탱시키는 시간의 그물망이었으나 삶의 무대 밖으로 밀려나 먼지가 되어버리는 찢어진 그물 같은 기억들….


 



 홍승엽의 이번 작품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자신을 지켜나가고 있으며 그래서 그 과정에서 길어 올린 장면들이 움직임에 강박하고 그러느라 놓쳐 버렸던 그간의 작품에서의 허전함을 충족시켜주었다. 기억이라는 절대적인 추상을 몸이라는 절대적인 구상과 한 무대 위에 올려 놓는 다는 것은 그 자체로 강도 높은 실험이다. 특히 홍승엽이 택한 방식은 기억을 다루는 과정에서 정서를 증발시키면서 극단적 추상인 무대 위에서의 춤의 장면들로 바로 이월시키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그 간극과 증폭감은 더 커질 수 밖에 없는 위태로운 실험이었다.
 그 두 가지의 극단이 충돌하거나 불화하는 것을 견디며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기가 그 위험의 강을 무사히 건너게 하고 잔잔하나 파장이 있을 뿐 아니라 전에 없는 새로운 장면들을 우리 앞에 펼쳐 주었다. 그러나 전반부와 후반부가 추상과 구상, 무의식과 물질의 세계로 나누어 지려는 끈질긴 관성은 잘 막아내지 못했고 전반부와 기억이 담벼락처럼 무너지는 장면 이후의 충격을 몇몇 건조한 웃음을 주는 경쾌함으로 이어 가려 했으나 그저 사족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작품의 끝에서 어떤 마침표를 찍지 못한 것은 아직 이 작품에 비어있는 지점이나 추상과 구상, 물과 기름과 같은, 의식을 몸으로 보여내는 것을 다루고자 했고, 철학적 출발점을 놓치지 않는 힘으로 오브제의 화려한 사용을 통해 시각적인 퀄리티의 다양함과 창의성 높은 장면들 건져냈다는 것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덕목임이 분명하다.


〈오래된 이별〉 무브먼트 당당 김민정 안무 (문화역서울 RTO, 2013. 7. 5-7)
 

 <오래된 이별>은 김민정이 2009년부터 시작한 ‘기억의 몽타주’ 시리즈의 하나로, 그때 ‘다큐 퍼포먼스’라는 형식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사람들)’를 다루기 시작했고 2009년에 초연했던 작품을 이번에 다시 개작하였다. 1937년 러시아 한인이주의 역사를 돌아 보고 그것을 오늘의 무대로 가져오는 일에 강한 애정을 느낀 김민정은 그간 방송된 다큐 영상과 텍스트로 시각적 도움을 받고, 배우들의 입을 통해 무수히 들춘 참고자료와 책들에서 건진 문장들을 나레이션하면서 가능한 한 이 문제를 무대 위에서 현재화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스스로 기록하였듯이 그들은
“민족이나 국가를 넘어 디아스포라의 거대한 개념으로 스며들어 길을 잃었다. 더구나 우리들은 불행하게도(?) 직접적인 디아스포라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중략)… 우리는 이 공연에서 어떤 정리도 결론도 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고백한 것처럼 스스로의 상태를 알게 되면서 이내 벽에 부딪혔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배우들의 가족 역사를 뒤지고, 디아스포라와의 직, 간접 인연을 찾으며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까지 디아스포라에 포용시켜 배우들이 “무작정 가리봉동으로 광희동으로 혜화동으로 안산으로 발걸음을 향했고 동포들의 상점에 들어가 물건을 사고, 머리를 자르거나 낯선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럽고 투박하게 그들에게 말을 걸” 도록 하는 것으로 그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들을 인터뷰하고, 그들의 모습과 소리를 기록하고, 그들의 언어와 노래를 배우는 시간도 가졌다. 그렇게 만난 이들 중 몇몇은 우리들의 연습실을 방문했고, 자신들의 경험을 수줍게 나눠 주었고, 연락과 대화가 오가는 동안 우리는 친구가” 되는 과정을 거치며 작품은 조금씩 만들어 졌다.


 



 관객이 입장할 때부터 배우들은 무대에 혹은 객석에 자연스럽게 앉아 자신들의 옷과 소품, 그리고 입으로는 자신들의 언어로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객석과 거의 높이가 차이가 나지 않은 낮은 마루가 깔려 있는 정도의 무대 위에는 보따리와 가방들이 속의 물건들이 꺼내진 채 무대 전체를 덮은 채 놓여 있다. 영상과 더불어 역사적 상황이 소개되고 1937년 8월 스탈린에 의해 한인들이 어떻게 강제 추방당하게 되었는지 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고 작품은 ‘깨알같은 document’들이 생생하게 빼곡히 들어와 있어 디아스포라를 종적(역사적), 횡적(지역적)으로 충분히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다양한 그들의 삶의 이야기와 인터뷰 내용들이 전개되면서 자연스럽게 포착된 것은 그들의 정체성 역시 시간의 흐름 앞에서 서서히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리플렛에서 확인된 것처럼 다루고 싶은 주제에 대한 열망을 가지면서도 그것을 다룰 수 있는 현재적 조건과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성실하고 따뜻한 접근에 충실하고자 하는 방법이 얻어 낸 소득이다.
“이 공연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참여자 개개인의 사유와 인식으로 만들어 지기를 원했다. 이 작업이 우리들의 인식 이상의 것으로 포장되지 않기를 바란다” 고 했듯이 자신과 상대를 인정하고, 열어놓고, 부딪힌 것을 통해 얻은 것을 소중히 ‘담아내는 것’을 통해 주제에 대한 열망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스스로에 대한 억지나 압박을 가하지 않는 것은 작품만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자세와 궤를 같이하는 인간적인 온전함을 훼손시키지 않는 아주 뛰어난 방법으로 드러났다. 그래서 덤으로 의도하지 않게 그들이 스스로의 궤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었고, 그것이 관객에게 포착된 것이다.
 중얼거리던 배우들이 하나씩 자기 자리의 보따리를 향해 무대에 올라가고, 주섬주섬 쌓아 머리에 이고, 허리에 동여매고 등에 짊어진 짐과 가방을 들고 그들의 이주를 상징하는 기차여행이 시작된다. 무대를 둥글게 걷고, 밀리고 쓰러지면서 RTO 극장공간의 뒷문은 그대로 대합실의 문이 되고 간절히 올라타야 하는 기차의 문이 된다. 문화역 서울에 원래 스며있던 서울역의 역사의 더깨가 이 장면에서 공명(共鳴)하며 거의 사실에 가까운 현장성이 현현하였다. 이렇게 군무가 되어가는 ‘이주’의 장면에서 적절히 조절된 그들의 달림과 멈춤 속에서 떨어진 가방에 묻어 있는 이탈(離脫)의 상처와 그 가방을 다시 주워 올리면서 들어 올린 거짓 없는 민초들의 담박(澹泊)함을 김민정은 신파에 빠지지 않도록 하면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차분함과 냉정함으로 잘 포착해 냈다.


 



 작품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실제의 이야기들로 채우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근원과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되는 이주민들의 이야기에 초점이 맞추어 지고 이야기와 아무 관계가 없던 관객들을 서서히 각자를 돌아 보게 만드는 지점까지 이동시킨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document들이 다양한 매체로 나열되어 있어 산만해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으나 김민정은 결론에 도달하기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마무리 해야 할 지점에서 다행스럽게도 춤을 발견하고 춤의 힘을 사용하였고 여성 보컬과 섹소폰, 더블베이스의 연주에 맞추어 춤과 소리, 등장했던 오브제들을 다시 무대에 펼쳐 놓으면서 마지막 부분을 제의적으로 잘 승화 시켰다. 김민정이 택한 방식 속에서 관객은 억지 부담을 느끼기 쉬운 주제임에도 거리감과 평정심을 잘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일주일 정도 잠을 잘 수 없었던 김민정의 지구력과 열정,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 해내는 힘에 연원한 것일 게다.
 

전제_ 몸지 8월호

2013. 08.
*춤웹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