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현대무용의 척추 역할을 해온 CCN(국립안무센터)이 설립 30주년을 맞았다. 지난 2월 19일 파리 샤이오극장에서는 기념공연이 있었으며(www.30ansdanse.fr 에서 녹화영상 관람가능), 올 한 해 동안 프랑스 전역에서 19개 CCN을 중심으로 기념행사가 줄을 잇는다.
CCN - 국립안무센터
CCN은 ‘Centre Chorégraphique National’의 약자로 ‘국립안무센터’라고 직역한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발레(ballet)’가 고전발레나 신고전주의 발레와 같이 장르를 지칭할 뿐 아니라 ‘무용(danse)’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안무’는 단순히 무용작품을 만드는 창작을 넘어 광범위하게 ‘무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더욱이 CCN의 성격이 국내의 국립 또는 시립무용단과 비슷하기 때문에 ‘국립무용단’이라고 그 역할을 이해해도 무방하다. 이렇듯 설립목적이나 역할을 감안할 때 ‘안무’라고 직역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1998년 출범한 국립무용센터(Centre national de la danse)와 구분하기 위해 그대로 ‘국립안무센터’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CCN 설립배경
전 세계적으로 경제가 호전되었던 1980년대를 기점으로 프랑스 예술계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1981년 미테랑 사회당 정부 출범 이후 문화정책이 많이 개선되었고, 무엇보다도 문화부 예산이 기존에 비해 두 배 가량 크게 늘어 그에 따른 결과는 기대 이상으로 빠르게 나타났다. 무용분야 역시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앙제 국립현대무용학교에서는 신진 안무가를 대거 배출했고, 바뇰레 안무콩쿠르, 몽펠리에 무용축제, 리옹 무용비엔날레, 메종 드 라 당스(무용의 집) 등의 무대를 통해 프랑스 현대무용 안무가들이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젊은 무용가들이 작품제작에 직면했을 때 갖게 되는 가장 큰 고민인 물리적 환경이 개선되자, 수준 높은 작품이 속출했다. 한 마디로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고, 제작과 유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면서 프랑스 춤은 르네상스를 맞았다.
http://concert.arte.tv/fr/les-centres-choregraphiques-nationaux-fetent-leurs-30-ans
이러한 성장의 중심에 1984년 출범한 CCN이 있었다. CCN을 설립한 장본인은 당시 문화부 장관 자크 랑(Jack Lang)이었다. 랑 장관은 예술지상주의자로서 문화예술 행정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과감한 정책 시도는 프랑스 문예진흥에 새로운 기틀을 마련했는데 예술가를 위한 사회복지, 연금제도, 의료보험, 작업실 건설 등 창작 활성화를 위한 정책들은 지금까지도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 정부로서는 재정적으로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영화와 시청각 분야에서의 공공관여 확대, 도서관 예산의 확대, 해외 문화교류의 증가, 수도 파리의 대형건물 건설 등에 투자를 집중하는 반면, 지방문화국(Direction régionale des affaires culturelles, DRAC)을 설립해 지방문화의 활성화에 주력하고 나머지 분야의 재정적 부담을 크게 분산시켰다.
이는 1982년 제정된 드페르법에 의해 제도화된 탈중앙집권화의 한 예로서 ‘중앙정부가 문화의 중심’이라는 관념이 사회 전반에 걸쳐 팽배한 데 대해 이를 정부가 직접 고쳐나가겠다는 의지의 적극적 실천방안이기도 했다. 중앙집권적 국가운영 체제에서 지방분권화로의 변화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CCN은 이렇듯 지방문화국의 설립과 더불어 랑 장관의 최첨단 현대예술을 지향하는 성향 덕에 그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구체적인 설립과정은 이렇다. 전체 CCN 중에서 75%에 해당하는 단체가 현대무용단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CCN’이란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발레 전공자들이었다. 1968년 12월 BTC(Ballet-Théâtre Contemporain)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포스터를 보면 ‘아미앵 국립안무센터(Centre Chorégraphique National/Amiens)’라고 적혀 있다. 이때 ‘CCN’은 지역개발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지역 이름 ‘아미앵’을 함께 썼다.
당시 이 공연에서는 장 바빌레를 비롯해 시릴 아타나소프 등 발레 스타들이 출연하고 주로 발레교사로 활동해온 프랑수아즈 아드레가 총연출을 맡았던 것으로 미루어 작품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현대무용 공연과는 무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행정능력이 부족하고 당시 국가행정 체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탓에 이 단체는 앙제를 거쳐 낭시로 이전되는 등 제대로 한 지역에 정착하지 못했고, 결국은 해산되었다. 지금의 로렌 발레단(Ballet de Lorraine)의 기원 정도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0년대 젊은 안무가들이 어려운 환경과 힘든 경쟁을 피하기 위해 파리를 떠나 지방으로 향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972년 펠릭스 블라스카는 그르노블에 정착했고, 그보다 2년 후에 자크 가르니에와 파리 국립오페라발레단장을 지낸 브리지트 르페브르가 라 로셸에 정착했다. 여기서 정착의 의미는 활동무대를 옮긴 것에 불과하고, 각각 1984년과 1986년이 되어서야 시의 지원을 받는 상주무용단으로 인정받았다.
현대무용 전공자 중에서는 도미니크 바구에가 가장 먼저 지방 상주안무가로 등장했다. 1979년 바뇰레 안무콩쿠르 대상 수상을 계기로, 모리스 베자르 20세기 발레단에서의 경력 등 발레 전공자가 아닌 현대무용 안무가로 인정을 받으면서 1980년 도미니크 바구에 무용단 전체가 몽펠리에 시에 정착했다. 공식적으로 CCN이란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즈음이다. 더 이상 ‘지역개발’의 차원이 아닌 ‘시립무용단’의 성격으로 용어의 의미가 부각되었다. 이 첫 걸음이 계기가 되어 1984년과 1986년 두 차례에 걸친 임명이 실행되었고, 지금의 구조를 갖춘 CCN으로서 드디어 발족했다.
앙줄랭 프렐조카주, 조제프 나주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프랑스 태생이 예술감독을 맡았다. 또한 각 CCN의 감독들은 1995년 그들만의 협회인 ACCN(l'Association des Centres Chorégraphiques Nationaux)를 발족해 좀더 적극적으로 CCN의 발전을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깡 CCN 예술감독을 지낸 카린 사포르타가 초대 회장직을 맡았으며, 그 후 레진 쇼피노, 장-클로드 갈로타를 거쳐 현재 에마뉘엘 보딘이 회장을 맡고 있다. 올 해 30주년 기념행사 또한 ACCN이 주축이 되어 진행중이다.
http://concert.arte.tv/fr/les-centres-choregraphiques-nationaux-fetent-leurs-30-ans
CCN에서 하는 일
지방분권화에 기반을 둔 CCN은 중앙정부는 물론 도,시의 지원금을 바탕으로 운영된다. 설립 당시, 기존의 무용단 4개 단체를 수용한 15개의 CCN이 창단되면서 안무가 중심의 행정체계를 갖추었으며, 현재 프랑스 전국에 걸쳐 19개의 CCN이 존재한다. 각각 예술감독을 임명하며, 상주안무가를 겸하고 있는 예술감독은 개인무용단을 보유한다. 전공별로 구분하면 5개의 발레단(Ballet Biarritz, Ballet de Lorraine, Ballet national de Marseille, Ballet du Nord, Ballet du Rhin)과 14개의 현대무용단이 있다. 발레단에 비해 현대무용단이 수적으로 3배 가량 되지만 예산 규모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CCN의 가장 큰 임무는 ‘창작’에 있다. 두 번째로 창작물을 지역은 물론 국가적, 국제적인 차원에서 보급해야 한다. 그러면서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세 번째 과제이고, 네 번째로 교육의 의무 또한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CCN이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고 있으며, 1998년부터 각각의 여건에 따라 타 무용단을 수용하고 공간과 프로젝트를 공유하며 그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CCN의 세대교체와 구조적 현실
CCN은 설립 이후 10년간 가장 큰 성장을 이룩했다.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독일의 표현주의의 그늘에 가려졌던 프랑스 현대무용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그 결과 초기에 ‘젊은 춤(Jeune Danse)’으로 불리던 새로운 경향이 ‘누벨 당스(Nouvelle Danse)’로 거듭났다.
CCN의 30년 활약과 그 업적을 되짚어 보는 일은 결국 프랑스 컨템퍼러리 댄스의 역사를 모두 다루어야 할 만큼 방대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고, 오히려 구조적인 현실을 직시하고 그 문제점을 미약하게나마 파악해보고자 한다.
1999년 비평가 필립 베리엘은 「레 세종 드 라 당스」(Les saisons de la danse)에 외면상으로는 별 흔들림이 없어 보이는 CCN이 실상 국가의 도움을 거의 못 받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또한 좀 더 큰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CCN이 마르세유를 제외하고는 대도시에 자리 잡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파리를 비롯해 리옹, 보르도, 릴, 스트라스부르와 같은 큰 도시에는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에(아래 표 참조) 파리와 리옹의 경우 오페라극장 소속의 발레단을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도시들은 근접한 도시의 무용단을 초대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또한 몇몇 CCN의 불안한 행정을 꼬집었는데 결국 그의 지적대로 피레네 중부지방의 조제프 뤼실로 발레단은 12년의 운영을 끝으로 1992년 해산했으며, 안-마리 레이노가 단장으로 있던 부르고뉴 지방의 느베르 CCN이 1994년에 문을 닫기도 했다.
이러한 문제점은 예술감독을 각각의 도시에 심어두고 국가와 도, 시의 차원에서 지원을 하는 식의 행정이 결코 이상적인 방향이 아니라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결국 10년간의 화려한 성장 뒤에 가려졌던 문제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나 프랑스 문화부는 이를 수정하는 대신 오히려 CCN을 보강하기 시작했다. 1998년 릴리외-라-파프시와 비아리츠시에 각각 마기 마랭과 티에리 말랑댕을 단장으로 한 새로운 CCN을 창립했으며,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1999년 툴루즈 시에 20번째의 CCN을 계획하기도 했다.
결국 문제점을 직시하긴 하지만 바로 수정하는 성급함 대신 거시적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프랑스 정부의 보호 아래 CCN은 3대에 걸친 안무가를 탄생시켰다. 제1세대는 도미니크 바구에를 비롯해 장-클로드 갈로타, 마기 마랭, 레진 쇼피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을 일명 ‘바뇰레 세대’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바뇰레 무용콩쿠르가 배출한 당시의 신인 현대무용 안무가들이 주축이 된 세대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센 생드니 국제 안무가의 만남’이라는 별칭으로 축제 성격이 짙은 행사로 바뀌었지만 70년대 말과 80년대 초에는 경연대회의 일종으로 신인 안무가를 발굴하는 등용문의 역할을 했다.
제2세대는 마틸드 모니에, 앙줄랭 프렐조카주, 필립 드쿠플레를 들 수 있다. 1세대와 2세대의 간격은 그리 크지 않아 이 둘을 같은 세대로 보기도 한다. 이후 1992년과 1993년에 걸쳐 제3세대가 형성되었는데 이들은 파리 국립 오페라발레학교 등에서 최고의 발레무용수로 성장했으나 이후 발레단 입단이 수월하지 않자 현대무용으로 방향을 돌린 안무가들이다. 당시 현대감각의 신세대라 불린 보리스 샤르마츠, 제롬 벨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렇듯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CCN의 예술감독도 대폭 바뀌었다. 현재 30년 전 초기 감독으로는 장-클로드 갈로타, 조제프 나주, 앙줄랭 프렐조카주 등이 남아 있는 정도이며, 나머지는 모두 교체되었다. 힙합 등 거리춤을 추는 안무가도 합류했다.
제3세대를 중심으로 자유로운 작품 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CCN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문화주의적 성향과 장르간 융합을 이끌어온 누벨 당스의 후예들은 또 다시 새로운 예술을 연구하기 위해 CCN의 울타리 안으로 모여들고 있다. 꾸준한 예산증가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오는 5월 22일 파리에서 있을 세미나 ‘30년 CCN’에서 충분히 다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CCN의 급성장 뒤에 가려진 무용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지속적인 정책으로 문제점을 보완하는 선진적 정신이 살아있는 한, CCN은 가장 이상적인 무용창작센터의 모델로 남게 될 것이다.
현재 19개의 CCN과 예술감독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출처_위키백과 “Les 19 Centres chorégraphiques nationaux”
http://fr.wikipedia.org/wiki/Centre_Chor%C3%A9graphique_Na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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